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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갑생의 바퀴와 날개] 380억 들여 터미널 짓고 2년 안돼 공항 폐쇄…정치논리에 낭비된 SOC 예산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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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갑생의 바퀴와 날개  

 그래픽= 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 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최근 전남의 무안공항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호남고속철도 2단계(광주~목포) 노선이 무안공항을 경유토록 계획을 바꾼 게 이유인데요. 광주에서 목포까지 기존계획대로 건설하는 것에 비해 10분 이상 더 걸리고 건설비도 1조 1000억원이나 추가되기 때문입니다.

 계획 변경을 추진한 쪽에서는 수요가 없어서 고전 중인 무안공항을 살리려면 꼭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는데요. 하지만 제대로 된 수요조사나 효과분석을 거치지 않은 탓에 "3000억원짜리 공항 살리려고 1조 1000억원을 투입하는 건 바보짓"이라는 비판도 나옵니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은 호남고속철도의 무안공항 경유를 합의하고 이런 내용을 담은 예산안도 통과시켰다. [중앙포토]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은 호남고속철도의 무안공항 경유를 합의하고 이런 내용을 담은 예산안도 통과시켰다. [중앙포토]

 그런데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근본적으로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계획 변경의 주체가 정책 당국이 아닌 정치권이란 점인데요.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지도부가 11월 말 회동에서 호남고속철도의 무안공항 경유에 합의한 데 이어 이달 초 국회에서 관련 예산까지 통과시킨 겁니다.

 이 과정에서 정책 당국의 의견은 거의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익명을 요구한 국토교통부의 한 관계자는 "지금 이 상태로는 효과가 별로 없어 보이지만 정치권에서 결정하고 예산까지 책정했으니 별도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모든 게 정치적 논리로 결정됐다는 의미인데요. 이 논란을 보면서 과거 정치권의 입김에 따라 추진됐던 사업들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한번 들여다봤습니다. 공교롭게도 대부분 공항 얘기입니다.

 고속도로 개통 알고서도 여객터미널 확장 

 경북 예천군에 있던 예천공항은 2004년 폐쇄되고 현재는 공군기지로만 사용 중인데요. 당초 공군 비행장이었던 이곳에 아시아나항공이 운항을 시작한 건 1989년입니다. 당시 민간항공기 취항에 신군부 출신의 현역 여당 의원이 힘을 썼다는 설이 돌았는데요. 1994년에는 대한항공도 취항했습니다.

예천공항의 가건물 터미널. [중앙포토]

예천공항의 가건물 터미널. [중앙포토]

 하지만 기본적으로 수요가 많지 않은 데다 IMF 경제위기로 항공수요가 줄면서 타격이 컸습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2000년 예천공항에서는 새로운 공사가 시작됐는데요. 380억원을 들여 여객터미널 신축에 들어간 겁니다. 기존 터미널이 공군부대 내부에 위치한 비좁은 조립식 가건물인 탓에 이용이 불편하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런데 2001년 대한항공이 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철수했습니다. 새 여객터미널이 문을 연 건 1년여 뒤인 2002년 말인데요. 이후 예천공항은 노선 폐지와 재개를 거듭하다 결국 2004년 5월 문을 닫았습니다. 380억원을 들여 만든 새 터미널을 불과 2년도 못 쓰고 폐쇄한 겁니다.

380억원을 들여 새로 지은 공항터미널. 하지만 채 2년을 쓰지 못했다. [중앙포토]

380억원을 들여 새로 지은 공항터미널. 하지만 채 2년을 쓰지 못했다. [중앙포토]

 공항 폐쇄의 가장 큰 원인은 중앙고속도로 개통이었습니다. 예천 주변을 지나는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굳이 비행기를 이용할 필요가 없어진 건데요. 사실 중앙고속도로는 터미널 신축 전부터 이미 구간별로 속속 개통되거나 공사 중이었습니다. 한 치 앞을 내다 보지 못한 게 아니라 애써 모른 척 한 것 아닌가 싶은 상황입니다.

 이 터미널 신축을 두고 당시 유력 정치인의 이름이 거론됐습니다. 정부 최고위층이 신축을 약속해줬다는 얘기도 나왔다네요.

 수요 없어서 개항 미루다 결국 비행훈련원

 1320억원을 투입한 울진공항도 정치적 고려가 빚은 '비운의 공항'입니다. 당초 2003년 개항예정이었지만 수요가 없어 2005년, 다시 2008년으로 연기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는데요.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결국 2010년 공항 개항은 포기하고 대신 민간조종사 양성을 위한 비행교육훈련원으로 바뀌었습니다. 울진공항 건설 얘기가 처음 나온 건 1990년대 초입니다. 경북 울진이 오지인 탓에 도로나 철도 교통이 불편해 공항이 필요하다는 취지였습니다.

개항도 못하고 비행교육원으로 바뀐 울진공항. [중앙포토]

개항도 못하고 비행교육원으로 바뀐 울진공항. [중앙포토]

 이후 공사가 시작된 건 2000년이었는데요. 하지만 착공 직후 한국교통연구원이 하루 이용객이 50명에 불과할 거란 보고서를 냈습니다. 정상적인 공항 운영이 불가능한 수치인 겁니다. 그런데도 공사는 강행됐습니다. 당시 정권 실세였던 울진 출신 정치인의 입김이 세게 작용했다는 소문이 무성했습니다.

 울진공항은 이후 감사원 감사에서도 수요가 너무 적다는 지적을 받으면서 개항이 계속 연기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죠.

부지만 대거 매입했다가 사업계획 취소 

 김제공항. 사실 김제공항은 터만 있었을 뿐 삽도 뜨지 못한 기록에만 남은 공항입니다. 김제공항은 1999년 당시 건설교통부(현 국토교통부)가 수립한 공항개발 중장기기본계획에 포함됐습니다.

김제공항 건설을 위해서 정부가 매입했던 부지. [연합뉴스]

김제공항 건설을 위해서 정부가 매입했던 부지. [연합뉴스]

 이후 정부는 2001년부터 전북 김제시 백산면과 공덕면 일대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는데요. 157만㎡(약 47만5000평) 규모로 연간 123만 명의 승객을 수용하겠다는 김제공항 건설용 부지였습니다. 이처럼 2004년까지 땅을 사들이는 데 450억원 가까이 투입했습니다. 착공을 눈앞에 둔 상황이었는데요.

 그러나 2004년 감사원이 “수요가 부풀려졌다”고 지적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실제로 건교부가 수요 재검증을 벌인 결과, 5년 뒤를 기준으로 예상 승객은 연간 25만 명에 불과했습니다. 하루 평균 600~700명꼴로 예상치의 20~25%밖에 안 된 건데요. 상황이 이렇게 되자 건교부는 한참 뒤로 착공을 미루더니 2008년 아예 건설계획을 취소했습니다.

연간 123만명의 승객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계획됐던 김제공항 조감도. [중앙포토]

연간 123만명의 승객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계획됐던 김제공항 조감도. [중앙포토]

 당초 김제공항 건설이 추진된 건 항공 교통 소외 지역인 전북에 수준 높은 항공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명분이었는데요. 인근 군산공항은 미군과 함께 쓰고 있어 활용에 한계가 있다는 이유도 포함됐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치권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후문입니다. 당시 실세로 통하던 도지사와 전북 출신 유력 정치인이 힘을 썼다는 건데요. 정확한 수요 예측에 따른 판단보다는 정치적 고려로 결정됐다는 의미인 셈입니다.

 역 설치 결정도 안 됐는데 설계부터 발주   


  이번에는 고속철도역과 관련한 사연입니다. 앞서 소개한 공항들에 비하면 낭비된 액수는 적습니다만 내용은 못지않게 황당합니다. 경부고속철도 개통을 2년 앞둔 2002년의 일입니다. 당시 건교부에서 오송역(충북 청원군 강외면 오송리)의 신축 설계용역을 발주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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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오송역은 경부고속철도 건설기본계획에 포함돼 있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다만 경부고속철도에서 호남고속철도가 갈리지게 될 분기역 후보지로 천안, 대전과 함께 오송이 올라있는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건교부 담당 공무원에게 물었습니다. "이제 오송역은 짓기로 결정이 된 건가요?" 그런데 답변이 뜻밖이었습니다. "아직 결정된 건 없는데, 설계 예산이 잡혀 있어서 발주를 안 할 수 없었어요."
 내용을 더 들여다보니 오송 지역을 지역구로 하는 유력 여당 정치인이 2002년도 예산안에 임의로 설계비 30억원을 넣었다는 겁니다. 이 정치인의 위세가 워낙 센 탓에 건교부로서는 설계예산을 불용처리할 수 없었던 겁니다.

KTX 오송역은 2002년 계획에 없던 설계가 발주되는 해프닝을 겪었다. [프리랜서 김성태]

KTX 오송역은 2002년 계획에 없던 설계가 발주되는 해프닝을 겪었다. [프리랜서 김성태]

 이 때문에 아직 건설 여부도 결정되지 않은, 게다가 분기역이 되느냐 아니냐에 따라 규모도 크게 달라질 역의 설계부터 발주되는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진 겁니다. 물론 이후 오송역이 건설계획에 추가됐고, 분기역으로도 결정됐지만 2002년 당시의 상황은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습니다.

 무안공항 KTX 경유, 예산 낭비 안되려면  

 무안공항은 애초 호남권의 거점공항을 목표로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완공되면 인근의 광주·목포공항을 폐쇄하고 무안공항으로 민간공항기능을 모두 통합하기로 예정돼 있었는데요. 하지만 완공을 앞둔 시점에 광주 지역의 반발로 광주공항 폐쇄가 무산되면서 국제선 기능만 무안공항에 합쳐지고 국내선은 그대로 광주에 남는 기형적인 상황이 됐습니다. 목포공항만 예정대로 폐쇄됐습니다.

평소 이용객이 적어 창구와 대합실 등이 텅 빈 무안국제공항. [중앙포토]

평소 이용객이 적어 창구와 대합실 등이 텅 빈 무안국제공항. [중앙포토]

 이처럼 첫 스텝이 꼬인 무안공항은 만성적인 수요부족에 시달리고 있는데요. 지역에서는 무안공항 활성화를 위한 대책 마련 요구가 높습니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이 논란을 무릅쓰면서까지 호남고속철도 노선이 무안공항을 경유하게 바꾼 것도 이런 맥락으로 보입니다.

호남고속철도의 무안국제공항 경유를 촉구하는 집회가 지난 9월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 앞에서 열렸다. [중앙포토]

호남고속철도의 무안국제공항 경유를 촉구하는 집회가 지난 9월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 앞에서 열렸다. [중앙포토]

 하지만 KTX 경유만으로는 무안공항을 살리기엔 역부족입니다. 무엇보다 광주공항 통합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광주공항에 함께 있는 공군기지 이전 문제도 전향적으로 추진해야 합니다. 대신 광주 등 인근 도시와 무안공항 간의 연계 교통망을 더욱 확충해서 무안공항 이용이 편리하게 해줘야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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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지자체와 지역 정치권이 합심해서 많은 항공사가 무안공항에 취항할 수 있도록 다양한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안도 추진해야 합니다. 공항이 활성화되려면 무엇보다 취항하는 항공사가 많고 노선이 다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전폭적인 노력 없이 정치권이 단지 KTX 경유만으로 "내 할 일은 다 했다"고 나온다면 앞서 살펴본 많은 예산 낭비 사례와 유사한 길을 걸을 가능성이 큽니다. 1조원이 넘는 돈이 별 쓸모 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부디 낭비가 아닌 발전적인 투자의 길을 가길 기대합니다.

 강갑생 기자 kksk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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