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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길영의 빅 데이터, 세상을 읽다

반차, 반반차, 반반반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6면

송길영 다음소프트 부사장

송길영 다음소프트 부사장

반공일이라는 말 기억나시나요? 주 6일제로 일하던 시절 오전 근무만 하는 토요일을 이르던 말입니다. 요즘 평일에 당시의 토요일처럼 반일 쉬도록 하는 게 바로 반차입니다. 4시간 휴가라 볼 수 있죠.

한 인터넷 검색창에 ‘반차’를 치면 ‘오전 반차 핑계’와 ‘오후 반차 사유’가 연관 검색어로 나옵니다. 늦잠을 잔 직원이 지각을 피하기 위한 이유를 만들어내는 장면이나 오후에 일찍 퇴근하기 위해 상사에게 사정을 설명해야 하는 우리 현실이 그대로 비쳐집니다. ‘육하원칙에 따른 근거’를 내라고 한다거나 사유와 목적지를 쓰라고 돼 있는 휴가신청서 서식의 빈칸을 보고 있노라면 휴가가 당연한 권리인지, 누군가 베풀어주는 시혜인지 헷갈릴 따름입니다. 이러다 보니 ‘은행 업무’가 반차의 적절한 핑계로 좋은데, 이때 나의 주거래 은행은 회사 근방 5㎞ 이내에 없는 희귀한 은행이어야 한다는 게시판 속 ‘웃픈’ 이야기가 공감을 받습니다.

빅 데이터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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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차휴가청구권은 근로자의 권리이므로 회사가 승인해야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날 아침 후배 사원이 반차를 쓰겠다고 문자를 보내 오면 ‘지각할까 봐 휴가를 쓰는 것 같아 괘씸하다’는 상사의 글들이 심심치 않게 보입니다. 이럴 때면 후배 직원들은 또 상사의 ‘갑질이 시작됐다’고 생각하겠죠?

최근에는 반반차로 2시간의 휴가를 허락하는 회사도 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만난 한 기업의 직원은 자신이 다니는 회사엔 1시간 휴가도 있다고 했습니다. 고작 1시간을 휴가내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 보았더니 그 의미가 남다를 수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저녁 6시, 이제 퇴근만 남았는데 갑자기 김 부장이 ‘다들 밥이나 먹고 마저 일하지’라고 말을 꺼내 결국 밤 10시를 훌쩍 넘겼다는 수많은 경험담을 떠올리게 된 겁니다. 만약 미리 오후 5시에 탈출한다면 1시간이 아니라 무려 5시간 넘게 일찍 퇴근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일은 삶에서 중요한 부분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삶의 전체는 아닙니다. 일의 성과만으로 개인이 평가되고, 그 자신도 누군가의 고용인인 김 부장이 하는 그 나름의 ‘갑질’이 사라지는, 반반반차와 같은 복잡한 규정에 기대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조속히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송길영 Mind Mi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