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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논설위원이 간다

김치 1만 포기 담그고 회장집 개밥까지…직장인의 절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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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논설위원이 간다] 김장 1만 포기 담그고 회장님 별장에서 닭 사료 주고 …

서경호의 산업지도 

뒤늦게 건강 진단을 받으려는 직장인들로 건강검진 센터가 붐비는 걸 보면 역시 연말이다. 일터에서 바쁘게 한 해를 버텨낸 모든 이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개인 건강이 중요한 것처럼 조직의 건강도 중요하다. 우리가 일하는 일터는 얼마나 건강할까.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 쏟아진 온갖 을(乙)들의 절규를 들여다봤다. 카카오톡 오픈채팅에서 ‘갑질’을 검색하거나 인터넷에서 gabjil119.com을 치면 쉽게 들어갈 수 있다. 조직 건강이 중요하다는 글로벌 컨설팅 회사 맥킨지의 조언도 정리했다.

카톡 오픈채팅에 쏟아진 절규 #한 달간 1330건 갑질 제보 쌓여 #건강한 조직 강조한 맥킨지 #“CEO, 거울부터 들여다봐야” #닦달하는 조직에서 무슨 창의력 #사람 귀하게 여겨야 회사도 잘돼

20일 서울 정동의 ‘직장갑질 119’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 박점규 스태프. 옆에 쌓은 종이 가면은 지난 7일 갑질 피해자들의 첫 오프라인 모임에서 사용했던 소품이다. [조문규 기자]

20일 서울 정동의 ‘직장갑질 119’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 박점규 스태프. 옆에 쌓은 종이 가면은 지난 7일 갑질 피해자들의 첫 오프라인 모임에서 사용했던 소품이다. [조문규 기자]

#분노의 카톡방

“회장님이 별장 관리, 개인 봉사활동 운전까지 직원한테 시킵니다. 명절에 가족여행 가서 별장이 빈다고 닭 사료, 개 먹이까지 주라고 해요.”

“종합병원 이사장 아들 결혼식에 직원들을 동원해 안내를 시켰는데 이런 경우 대응할 방법이 없을까요?”

카카오톡 오픈채팅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공익단체 ‘직장갑질 119’에 올라온 갑질 고발 사례다. 심지어 김치회사도 아닌데 ‘김장 1만 포기’를 직원들에게 담그게 했다는 믿기 힘든 제보까지 있었다. 예전에는 사장과 관리자들이 갑질을 많이 했지만 요즘은 정규직 과장이 파견사원에게, 정규직 대리가 계약직 사원에게 갑질을 한다는 하소연이 많다. 사회의 최약자에 대한 폭력은 사방에서 나온다.

이 카톡방에 익명으로 직장에서 겪은 부당한 대우와 회사의 갑질을 제보하면 변호사·노무사·노동전문가들이 교대하며 실시간으로 조언해 준다. 지난달 1일 시작한 이 오픈 카톡방에 11월 한 달간 4만207번의 대화가 오갔고, 연인원 5634명이 들어왔으며 1330건의 갑질 제보가 쌓였다. 직장갑질 119의 오진호 총괄스태프는 “반 년 정도는 홍보해야 할 줄 알고 현수막까지 곳곳에 내걸 계획이었는데 이렇게까지 뜨거운 반응이 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박점규 스태프는 “사회의 민주화가 직장 민주화로 이어져야 하는데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직이 늘고 직장 구하기가 힘들어지면서 직장 민주화는 거꾸로 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인기 비결을 분석했다. 위계(位階)를 중시하고 직급을 계급인 양 여기는 병영문화도 한몫했다고 했다.

카톡방에 직접 들어가 봤다. 19~20일 이틀간 지켜본 결과, 단톡방 참여 인원은 꾸준히 800여 명 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스태프로 불리는 전문가들이 상담하는 월~토요일 오전 10시~오후 10시 사이는 물론, 스태프가 쉬는 나머지 시간에도 메시지는 끊임없이 올라왔다. 울분을 토하고 서로 위로하며 정보를 나눴다.

선정적인 장기자랑에 강제 동원되는 한림성심병원 간호사들의 사연도 이곳에 올라온 고발이 계기가 됐다. 언론 보도로 이어졌고 한림성심병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추가 제보가 이어졌다. 이런 식이었다.

“43세 간호사입니다. 나이 많은 저도 장기자랑에서 예외는 없습니다. 5년 전 OO병원에 다닐 때 책임간호사인 저에게까지 걸그룹 춤을 강요했습니다. 그 일로 심한 충격과 자괴감에 빠져 바로 이직했습니다. 너무 수치스럽고 모욕감이 듭니다.”

성심병원 사태는 다른 병원과 일터의 ‘강요된 장기자랑’을 사라지게 했다. 한림성심병원 직원들은 직장갑질 119 스태프와 함께 별도의 네이버 밴드를 만들었고, 다른 중소병원 직원들의 독립 밴드도 탄생했다. 박점규 스태프는 “오픈 채팅방은 접근성이 좋지만 자료가 축적되지 않는 단점이 있어 직장·직종별 밴드로 모임을 발전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20일에도 방송작가와 보육교사의 모임이 따로 분가했다. 앞으로 직종별로 표준협약을 만드는 게 목표다. 적어도 이러저러한 일을 부당하게 지시하면 ‘갑질’이라는 공감대를 만들기 위해서다.

#맥킨지의 충고

갑질이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었다. 맥킨지가 분기 소식지인 ‘맥킨지 쿼털리’ 최근호에서 조직의 건강과 인사관리에 대한 다양한 분석을 내놓았다. 컨설팅 회사인 만큼 최고경영자(CEO)에 대한 조언이 많다. 대략 이런 내용이다. ‘조직의 건강(organizational health)’은 성과를 개선하는 지름길이다. 건강한 직장은 직원에게도 좋고 실적 또한 좋아진다. 일단 성과부터 따지고 조직 건강을 장기 과제로 미루는 것은 옛날 방식이다. 조직의 건강은 단순히 조직 문화나 인사관리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누가 경영하고 어떤 충격이 오든지 간에 조직이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방식이다. 변화에 빨리 적응하기 위해선 강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하지만 변화는 톱다운 방식만으로는 부족하다. 아래에서 위로(바텀업), 또 옆에서 옆으로 실행돼야 한다. 직급에 상관없이 영향력 있는 인재들이 동참해야 한다. 결국 구성원들을 연결하고 동기를 부여하며 소통하는 게 중요하다. 조직의 스트레스는 직원들이 제대로 대우받고 있지 못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생긴다. 이런 직원이 많을수록 건강을 위해 치러야 하는 조직의 비용이 커진다.

CEO를 향한 조언은 오픈카톡방에서 원성을 사고 있는 한국의 갑질 경영자들도 귀 기울일 만하다. 로버트 서튼 스탠퍼드 경영대학원 교수의 지적이다. “무례함과 괴롭히기가 유행이다. 현명한 리더는 무엇보다 스스로 거울부터 들여다봐야 한다. 권력이 생기면 남 얘기를 듣기보다 자신이 원하는 것에 몰입하도록 직원들에게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노벨상 수상자인 대니얼 카너먼의 말처럼 과도한 자신감이라는 저주는 가장 파괴적인 인간의 편견이다. 주변에 진실을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진실을 달콤한 당의(糖衣)로 덮지 않을 사람에게 솔직하게 피드백을 구해야 한다.”

#카톡방과 맥킨지가 만나는 지점

지난해 말 기준으로 한국 노동자의 노조 조직률은 10.3%다. 노동자 10명 중 9명은 노조가 없다. 사업장 규모가 작을수록 노조 조직률은 떨어진다. 300명 이상 사업장에서는 55.1%가 노조원이지만 중소기업 규모인 30~99명 사업장에선 노조 조직률이 3.5%밖에 안 된다. 특히 비정규직의 노조 가입률은 2.9%에 불과했다. 비정규직 대부분은 힘들 때 기댈 언덕조차 없다는 얘기다. 박점규 스태프는 “오픈 채팅에 참여하는 사람 대부분이 중소기업 노동자로 보인다”며 “도저히 노조를 만들 상황이 아닌 이들에게 힘이 되고 싶다”고 했다.

직장갑질 119를 만든 이들은 진보 성향의 노동운동가와 전문가 그룹이다. 박 스태프는 4차 산업혁명 얘기도 했다. 과거처럼 경영진이나 간부가 직원을 닦달하고 몰아쳐 대는 분위기에서 어떻게 창의력이 발휘되는 4차 산업혁명이 가능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직장민주화는 수많은 ‘을’들이 눈치보지 않고 제 얘기를 할 수 있고, 회사가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라고도 했다. 존중받는 직원이야말로 회사 발전의 주역이라는 그의 말은 뜻밖에 맥킨지의 제언과 상당 부분 겹쳐 있었다.

서경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