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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트] 한 흑인 여성의 10년 전 외침, 2017년 혁명이 되다

중앙일보

입력

'미투' 해시태그가 세상을 뒤흔든 2017년. 여권 신장 시위에 참가한 한 여성. [AFP=연합뉴스]

'미투' 해시태그가 세상을 뒤흔든 2017년. 여권 신장 시위에 참가한 한 여성. [AFP=연합뉴스]

‘더는 참지 않겠다’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 한 해였다.
얼마 전 타임지는 ‘올해의 인물’로 미투(Me too) 캠페인에 참여해 성폭력을 고발한 여성들을 선정했다. 파이낸셜타임스 또한 사내 성희롱을 고발한 우버의 전직 엔지니어 수전 파울러를 ‘올해의 인물’로 뽑았다. 미국 온라인 사전 메리엄-웹스터는 올해의 단어로 ‘페미니즘’(feminism)을 꼽았고, 페이스북에서 올해 최대 화제가 된 사건은 ‘세계여성의 날’인 것으로 집계됐다.

여권 신장 운동은 최근 몇 년 새 전 세계적 화두로 떠올랐지만 올해의 성과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그 중심에는 소셜미디어에서 미투 해시태그(#MeToo)를 달아 성폭력을 고발한 ‘미투 캠페인’이 있다.

할리우드 거물 하비 웨인스타인 성추문에서 시작 

미투 캠페인에 동참한 리즈 위더스푼 [사진=위더스푼 인스타그램]

나체로 오디션 본 일을 폭로한 제니퍼 로렌스 [사진=로렌스 인스타그램]
하비 웨인스타인

미투 운동은 지난 10월 할리우드 거물 제작자 하비 웨인스타인이 30년간 저질러온 성폭력이 드러나며 시작됐다. 할리우드 스타 애슐리 주드ㆍ앤젤리나 졸리ㆍ귀네스 펠트로 등이 그의 성추행을 연이어 폭로했고 파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러자 배우 알리사 밀라노가 트위터를 통해 미투 캠페인을 제안했다. SNS에 성폭력 피해 경험을 털어놓고 연대하자는 이 캠페인에 여성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미투 운동은 연예계뿐 아니라 IT업계ㆍ스포츠계 등 전방위로 뻗어 나갔고, 미국을 넘어 전 세계로 퍼졌다.

알리사 밀라노 트위터

알리사 밀라노 트위터

수많은 여성의 용기 있는 고백에 유명하고 힘 있는 이들이 권좌에서 줄줄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하비 웨인스타인의 몰락에 뒤이어 유명 배우 케빈 스페이시가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에서 하차했고 앵커 찰리 로즈, 미 상원의원 앨 프랭컨 등도 자리에서 내려왔다. 영국에선 몇몇 정치인이 자살하는 일도 벌어졌다.

미투는 정치에 직접적인 영향도 끼쳤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 12일 ‘미투 시대’의 첫 번째 선거였던 앨라배마주 상원의원 보궐선거에서 미성년자 성추행 의혹을 받던 공화당 로이 무어 후보가 민주당 더그 존슨에게 패배했다”며 “이는 지진과도 같은 변화”라고 보도했다.
오랫동안 공화당에 압도적 지지를 보내온 이곳의 표심을 미투 운동이 바꿔놓았다는 것이다. 신문은  “2012년 공화당 후보였던 미트 롬니는 백인 남성의 84%, 백인 여성의 83%의 지지를 얻었지만 무어는 백인 남성의 72%, 백인 여성의 63%의 표를 얻는 데 그쳤다”며 “전통적 백인 지지자들이 등을 돌렸고, 특히 흑인 여성의 투표가 큰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시카고트리뷴은 “미투 운동은 우리가 뉴스와 코미디, 영화 그리고 정치를 보는 눈을 변화시키고 있다”고 분석했다.

여성들의 인식 변화와 SNS를 통한 끈끈한 연대 

파이낸셜타임스가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우버 엔지니어 수전 파울러. 우버 사내 성희롱을 고발한 그의 용기있는 행동은 이후 미투 캠페인에 큰 영향을 줬다. [사진=파울러 홈페이지]

파이낸셜타임스가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우버 엔지니어 수전 파울러. 우버 사내 성희롱을 고발한 그의 용기있는 행동은 이후 미투 캠페인에 큰 영향을 줬다. [사진=파울러 홈페이지]

미투 운동이 이토록 폭발적인 힘을 가지게 된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성범죄의 경우 피해를 보고도 수치심과 보복의 두려움 등으로 이를 숨기는 이들이 많았지만, 최근에는 ‘공론화해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런 인식의 변화에 SNS를 통한 끈끈한 연대가 보태졌고, 연대의 힘은 해당 업계와 특정 지역을 넘어섰다. 비밀리에 정보를 공유하던 ‘소곤소곤 문화’가 광장 밖으로 나오며 세상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나도 당했어’(Me Too)라는 말 자체가 가진 힘 또한 주효했다. 10년 전 미투 운동을 처음 시작한 ‘미투의 창시자’인 사회운동가 타라나 버크는 “성폭력 피해자들은 수치심 때문에 이를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며 “그러나 ‘나도 그랬어’라는 말 한마디, 그 공감의 힘은 수치심을 털어버릴 수 있게 한다”고 설명한다.

저임금 일자리·유색 인종 여성에겐 여전히 어려워 

타임지는 2017년 '올해의 인물'로 침묵을 깨고 미투 캠페인에 동참한 여성들을 선정했다. [AP=연합뉴스]

타임지는 2017년 '올해의 인물'로 침묵을 깨고 미투 캠페인에 동참한 여성들을 선정했다. [AP=연합뉴스]

그러나 현재의 미투 운동이 중산층 이상, 특히 백인 여성들 사이에서만 불고 있는 바람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세계적인 통계학자 네이트 실버가 운영하는 통계업체 파이브서티에이트는 “지난 수개월간 미투 운동은 사무직 근로자 중심으로 이뤄져 왔으며 특히 대중에 익숙한 업종에 국한돼 왔다”고 지적한다. “저임금 일자리의 여성들은 아직 카타르시스의 순간을 맛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특히 가정부ㆍ웨이트리스 등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노조의 도움을 제대로 받지 못할뿐더러 ‘고객은 항상 옳다’는 문화 때문에 고초를 겪는다”고 분석했다. 또 “성폭력을 고발했을 때도 사회적 신분 때문에 법정에서 불리한 판결을 받을 때가 많으며, (미국에서) 이런 업종에 종사하는 대부분 여성이 유색인종”이라고 설명했다. 낮은 임금을 받는 여성, 유색 인종 여성이야말로 성폭력에 취약한데도 미투 운동에서 소외돼왔단 얘기다.

타라나 버크 [사진=PBS 인터뷰 캡처]

타라나 버크 [사진=PBS 인터뷰 캡처]

미 흑인 커뮤니티 내에선, 미투 운동의 창시자인 버크의 활약이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비판하고 있다.
NYT는 “흑인 여성들은 흑인인 버크의 오랜 노력이 저명한 백인 페미니스트들로부터 수년 동안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타임지가 ‘올해의 인물’을 발표하며 표지에 버크를 싣지 않아 이런 비판은 더욱 거세졌다.

공교롭게도 버크가 이 운동을 시작한 이유는, 성폭력 피해를 보고도 인종 차별의 벽에 가로막혀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해온 유색 인종 여성들을 위해서였다. 그는 “성폭력은 인종과 성별, 계급을 가리지 않지만 피해자에 대한 대응에는 차별이 있다. 가장 소외된 목소리가 가장 희미해진다”(보스턴글로브)며 그 계기를 밝힌 바 있다. 미투는 백인 여성들에 의해 전파되고 증폭됐지만, 10년 동안 유색 인종 여성들을 중심으로 뿌리를 다져온 운동이란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는 지적이 설득력 있는 이유다.

보다 조직적 네트워크, 남성들의 관심 필요해 

그렇다면 미투 운동은 이런 비판을 넘어 보다 많은 사람을 위해 진화할 수 있을까.

 지난 9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벌어진 여성들의 시위 [AFP=연합뉴스]

지난 9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벌어진 여성들의 시위 [AFP=연합뉴스]

CNN은 “성폭력에 대한 분노를 표하는 해시태그는 이전에도 많았지만 늘 한때의 유행으로 끝났다”며 이제 미투 운동의 지속가능성을 고민할 때라고 보도했다. 지난해만 해도 캐나다 작가 켈리 옥스퍼드가 시작한 #ItsNotOkay(괜찮지않아)가 엄청난 반향을 끌어냈지만, 금세 시들해졌다는 것이다.
디지털 공간을 연구하는 사회학자 젠슈라디(프랑스 툴루즈경제대학)는 “온라인에서 시작된 캠페인이 성공하려면 보다 조직적인 네트워크가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버크 또한 “미투 운동은 수많은 성폭력 ‘생존자’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려주기에 단순한 해시태그를 넘어선, 치유를 위한 더 큰 대화의 시작”이라며 “한때의 유행이어선 안 된다”(워싱턴포스트)고 우려했다.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이제 남성들이 움직여야 할 때”(CNN)라고 입을 모은다. “남성 대부분은 성폭력을 휘두르지 않지만 주변의 성폭력에 대해서는 침묵하는데 이를 바꿔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또 페이스북에서 ‘좋아요’를 누르는 행동을 넘어, 여성이 남성과 같은 일을 하고도 동일한 임금을 받지 못하는 문제, 피임과 낙태 문제 등 전반적인 여성의 권리 향상으로 관심이 확대돼야만 미투 운동이 더 긴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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