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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안쪽의 특권과 바깥쪽의 좌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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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김종윤 기자 중앙일보 편집국장
김종윤 경제부장

김종윤 경제부장

지대(地代·rent)란 토지 사용자가 땅 주인에게 지급하는 대가다. 땅은 제한된 자원이다. 늘리기 힘들다. 땅만 있으면 주인은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다.

정규직 과다 특권 해소 없는 ‘비정규직 제로’는 공염불 #혜택 줄여 정규직-비정규직 격차 줄이는 게 선결 과제

‘지대 추구(rent seeking)’는 지대 개념을 은유적으로 발전시켜 나왔다. 공급이 제한된 상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할 기회만 잡으면 이익을 챙길 수 있다. 한때 면세점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여겨졌다. 정부가 면세점 숫자를 제한하니 면허를 받은 업체만 영업할 수 있다. 과다한 독점 이익, 곧 차액 지대가 보장된 까닭이다. 면세점을 하려는 기업은 정부를 상대로 로비해 영업권을 얻는 데만 힘을 쏟으면 그만이다. 이미 면허를 받은 업체는 경쟁자의 시장 참여를 막는 데 로비력을 집중하면 된다. 굳이 생산적 활동을 할 필요 없다.

‘지대 추구’는 이렇게 특정 집단이나 개인이 국가의 영향력에 접근해 이익을 얻으려는 비생산적 활동을 말한다. 문제는 여기서 소외된 부류의 좌절감이다. 한쪽에서 특권을 챙기는 걸 보면서 이들은 상대적 굶주림에 분노한다.

문재인 정부는 ‘공공기관 비정규직 제로’를 주요 국정 과제로 제시했다. 일단 정부의 입김이 미치는 공공기관을 과녁으로 삼았다. 고용노동부가 나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현재 대부분의 공공기관이 이 가이드라인에 따라 정규직 전환을 논의 중이다.

그 한 장면. 지난달 23일 인천국제공항공사 대강당에서 열린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방안 공청회장. 시작부터 강당을 가득 메운 정규직과 비정규직 직원이 각각 외친 구호가 충돌했다.

‘결과 평등 No, 기회 평등 Yes. 무임승차 웬 말이냐 공정사회 공개채용!’

‘정규직-비정규직 손잡고 같이 가요. 제대로 된 정규직 전환!’

종종 야유와 고성이 터져나왔다. 한 정규직 사원은 이렇게 주장했다.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입사했다. 원칙을 무시하고 비정규직을 대규모로 직접 고용하는 건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다.”

‘나는 열심히 공부해 시험을 통과했다. 그런데 비정규직을 나와 같은 신분으로 대하는 건 받아들일 수 없다.’ 이런 논리에 정규직의 박수와 환호가 터져나왔다.

정년 보장, 높은 임금은 정규직의 ‘차액 지대’다. 생산성을 정확히 따지기는 어렵지만, 뿌리 깊은 방만 경영을 고려하면 공공기관 정규직은 생산성에 비해 더 좋은 대우를 받는 걸 부인할 수 없을 게다. 이들은 공개 채용이라는 절차를 거쳐 차액 지대를 누릴 수 있는 성(城)에 들어갈 입장권을 챙겼다. 비정규직이 성 안으로 들어오면 특권은 줄기 마련이다. 특권이 보장된 상황에서 이를 지키려는 자와 나누자는 자의 갈등은 필연적이다.

정부가 무조건 성문을 열라고 밀어붙이는 것도 해법은 아니다. 땀 흘려 진입에 성공한 직원은 입장권 없이 배를 갈아탄 직원을 무임승차했다며 외면할 것이다. 반대로 비정규직도 정규직의 과도한 텃세에 반발할 것이다.

물론 갈등을 없애는 방법이 있다. 예외 없이 특권을 보장하면 된다. 이건 지속할 수 없다. 무조건 퍼주기의 종말은 동반 추락이다. 문재인 정부의 비정규직 제로 정책이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지적을 받는 이유다.

공공기관 정규직의 특권은 그대로 둔 채 비정규직을 성 안으로 밀어넣는다면 오히려 특권 천국을 추구하는 세력만 더 단단해질 뿐이다. 아직도 저임금과 열악한 근무환경에 허덕이는 다른 부문의 비정규직은 어떻게 할 것인가. 모든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고 하면 기업은 오히려 고용을 줄일 공산이 크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이전에 정규직의 과다 특권을 줄이는 게 먼저다. 양쪽의 격차를 줄여야만 사람이 자유롭게 성을 드나들 수 있다. 그래야 고용시장도 유연해질 수 있다. 시험 합격 통지서가 평생을 보장하는 증서가 돼선 안 된다. 안쪽에선 특권이 넘치는데 바깥쪽에서는 좌절만 쌓인다면 그 사회의 미래는 뻔하다.

김종윤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