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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하경 칼럼

중국은 왜 문재인 대통령을 홀대했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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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
캐리커쳐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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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덩치가 커졌지만 어른이 되려면 한참 멀었다. 외국 정상을 안방에 불러 놓고 혼자 밥을 먹게 하고, 수행기자를 흠씬 두들겨 팬 것은 문명국가의 상식을 배신한 행위다. 문재인 대통령은 15일 베이징대 연설에서 “중국과 한국은 근대사의 고난을 함께 겪고 극복한 동지”라고 툭툭 털고 넘어갔다. 하지만 상처 입은 국민은 다르다. 실컷 모욕하고 매질한 뒤에야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보복을 풀고 평창에 관광객을 보내 준다면 “우리를 속국으로 생각하나”라는 울분이 생길 수밖에 없다.

72년 닉슨 방중도 ‘투항’으로 왜곡 #‘대통령 혼밥’ ‘기자 폭행’ 본질은 #한국 혼냈다는 인민 무마용 선전 #꼭 따져야 중국의 최면상태 깰 것

45년 전인 1972년 2월 반공주의자인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공산 중국을 방문해 ‘세계를 바꾼 일주일(A week that changed the world)’을 보낼 때의 일이다. 닉슨을 수행한 미국 기자들이 시골에 내려가 하급 관리에게 닉슨 방중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어이없게도 “미국이 중국에 투항해 마오쩌둥(毛澤東) 주석과 함께 세계 혁명을 하려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평소 교육받은 대로 이야기한 것이다. 그대로 전했다가는 큰일 나겠다고 판단한 통역이 이 대목을 고의적으로 누락시켰다. 전말을 보고받은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는 “통역하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라고 칭찬했다.

닉슨이 미·중 화해를 위해 마오쩌둥을 만나러 왔지만 중국 정부는 미국을 원수로 생각하는 인민들에게 있는 그대로 알릴 수 없었다. 그래서 ‘닉슨 투항’이라는 황당한 페이크 뉴스로 둔갑시켰던 것이다. ‘대통령 홀대’ 직후 중국 인사로부터 들은 비사(秘史)다. 당시는 느닷없이 미국 대통령이 방문한 상황이라 인민의 혼란을 막아야 한다는 사정이라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한·중 관계는 완전히 다르다. 양국 수교 이후 25년간 최고의 경제 파트너였고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속사정을 잘 아는 중국의 유력 인사에게 문 대통령 홀대 이유를 물었다. “사드 문제로 중국에 까불었던 한국을 혼내 줬다고 인민들에게 선전하는 카드로 사용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한국을 줄곧 “미국의 앞잡이”라고 비난해 왔는데 갑자기 국가주석이 한국 대통령과 만난다는 사실을 그대로 알리기는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는 “45년 전 닉슨이 투항하러 왔다고 인민을 속인 것과 ‘대통령 혼밥’의 본질은 같다”고 명쾌하게 정리했다.

이하경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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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자기 나라 지도자의 체면을 위해 인민을 가상현실에 가둬 놓고 한국 국가원수를 모욕한 것이다. 루쉰(魯迅)이 ‘아큐정전’에서 중국의 정신적 성장을 막는 고질적 후진성으로 지적했던 정신승리법이 떠오른다. 지금의 중국인은 늘 지고도 이겼다고 끊임없이 자기최면을 걸었던 100년 전의 중국인과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인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타국을 무시하는 것이야말로 시대착오적인 21세기 정신승리법이 아닌가. 이런 낡은 방식을 가지고 자유무역의 수호자를 자임하면서 일대일로를 추진하고 글로벌 리더십을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중국의 자기최면 관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중국 유력 인사는 “공산당 선전기구는 지도부가 듣고 싶어 하는 내용만을 보고한다”고 했다. 아무리 한국의 여론이 악화돼도 팩트가 아니라 해석이 진실로 둔갑하는 구조는 여전할 것이란 얘기다. 중국은 앞으로도 ‘대통령 혼밥’과 ‘기자 폭행’을 반복할 가능성이 있다.

올해 3월 선즈화(沈志華) 중국 화둥사범대 교수가 다롄외국어대 강연에서 “사드 보복은 적이 바라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북한은 중국의 잠재적 적이고, 한국은 친구일 수 있다”고도 했다. 핵심을 짚은 그의 탁견(卓見)이 인터넷을 통해 퍼져 나가자 중국 외교부와 사회과학원에 비상이 걸렸고 학자들을 동원해 비판대회를 추진하려 했다는 새로운 사실을 최근 알게 됐다. 그가 시진핑(習近平) 주석과 특수 관계가 아니었다면 매장됐을 것이다. 건전한 비판의 경로가 막혀 있는 중국 시스템의 한 단면이다.

하지만 북핵 위협에 직면한 한국은 이런 중국과 손을 잡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렇더라도 부당한 횡포에 대해서는 반드시 따져서 사과를 받아 내야 한다. 중국 의존도도 줄여야 한다.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10개국, 중남미, 아프리카와의 교류 협력도 강화해야 한다. 지금처럼 중국에만 올인하고 저자세로 나가면 계속 무시당하고 동맹국인 미국은 물론 일본과도 사이가 멀어진다.

중국에서조차도 “한국이 사드 보복을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도 안 하고 참았는데 대통령까지 홀대한 것은 문제가 있다”는 반성론이 나온다. 한국이 여기서 물러서면 중국은 자기최면에서 깨어나지 않고 계속 괴롭힐 것이다. 생존을 위해서라도 한국은 중국에 당당하게 맞서야 할 것이다.

이하경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