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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영화 감상이 취미라고 말하는 사람들 부러워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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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영화관 차별구제 소송 이긴 시각장애인 김준형씨

3대 멀티플렉스 영화관을 상대로 낸 차별구제 청구 소송에서 이긴 시각장애인 김준형씨는 ’비장애인인 어머니와도 즐겁게 영화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강정현 기자]

3대 멀티플렉스 영화관을 상대로 낸 차별구제 청구 소송에서 이긴 시각장애인 김준형씨는 ’비장애인인 어머니와도 즐겁게 영화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강정현 기자]

“영화 감상이 취미라고 말하고 싶어요.”

최신작 즐기고 싶은데 극장선 답답 #친구가 종이 말아 귀에 대고 설명도 #지금도 해설·자막 붙인 영화 있지만 #편수 많지 않고 비장애인 관람 방해 #FM수신기·특수안경 개인별 서비스 #판결 확정되면 3대 복합관서 가능 #국내 시청각 장애인 모두 50만 명 #‘시혜 아닌 관객 확장’ 발상 전환을

지난 7일 3대 멀티플렉스 영화관(CGV·롯데시네마·메가박스)을 상대로 한 차별구제 소송에서 이긴 1급 시각장애인 김준형(25)씨의 작지만 큰 꿈이다. 김씨 등 4명의 시청각장애인이 낸 소송에서 서울중앙지법 민사 28부(부장 박우종)는 “영화관들은 장애인들이 장애인이 아닌 사람과 동등하게 영화를 관람할 수 있도록 화면 해설·자막·보청기기를 제공하라”고 판결했다.

지난 12일 서울 종로의 한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만난 김씨는 마지막으로 본 영화가 ‘베테랑’(2015년 8월 개봉, 류승완 감독)이라고 했다. “어머니와 보러 갔어요. 액션 신이 많았는데 저는 누가 누구를 때리는지도 모르겠더라고요. 어머니들끼리 ‘아들이 영화 보여 줬어’ 같은 자랑을 많이 하시잖아요. 그런데 저는 어머니한테 영화 보러 가자는 말을 쉽게 못하겠더라고요.”

김씨는 “집에서라면 ‘왜 저렇게 된 거야?’ ‘누가 죽은 거야?’ 등 궁금한 것을 물어볼 수 있지만 영화관에선 귓속말도 어렵잖아요. 옛 여자친구는 영화 팸플릿을 돌돌 말아 제 귀에 대고 설명해 주기도 했어요”라며 웃었다.

김씨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는 이범수씨다. “예전부터 이범수씨 나온 드라마를 재미있게 봐서 영화도 이범수씨가 나온다고 하면 다 챙겨 봐요. 이덕화 아저씨나 김수미 아줌마 같은 노련한 배우도 좋아하고요.” “취미가 뭐냐”고 묻자 김씨는 “그 질문에 ‘영화 감상’이라고 답하는 이들이 부럽다”고 답했다. 김씨는 색소폰 연주가 취미다.

◆차별금지법 도입되자 소송 준비=시청각장애인들의 영화관람권이 이슈로 부각된 것은 2011년 영화 ‘도가니’ 개봉 때였다. 특수학교에 다니는 청각장애 학생들이 교사들에게 성폭력과 학대를 당한 사건을 다룬 영화였지만 정작 청각장애인들이 보긴 어려웠다. 그해 대종상 시상식장 앞에서 장애인단체들은 “장애인도 영화를 볼 권리가 있다”며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소송을 제기할 법적 근거가 부족했다. 2008년 장애인차별금지법이 만들어져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및 문화·예술사업자에게 ‘장애인이 문화·예술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정당한 편의를 제공하여야 한다’는 의무가 부여됐지만 적용 범위는 단계적으로 확대돼 ‘스크린 기준 300석 이상의 영화관’은 2015년 4월에야 적용 대상이 됐다.

한국농아인협회와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가 만든 영화 ‘우아한 거짓말’ 배리어 프리 버전. 시각장애인을 위해 등장인물들의 대사뿐 아니라 효과음과 배경음악 등을 자막으로 보여준다. [유튜브 캡처]

한국농아인협회와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가 만든 영화 ‘우아한 거짓말’ 배리어 프리 버전. 시각장애인을 위해 등장인물들의 대사뿐 아니라 효과음과 배경음악 등을 자막으로 보여준다. [유튜브 캡처]

시기를 기다려 온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등은 2015년 말부터 소송을 기획했고 지난해 2월 법무법인 지평의 임성택(53·사법연수원 27기) 변호사와 손잡고 소송을 냈다. 변호인단에는 1급 시각장애인 김재왕(공익인권변호사 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 변호사도 참여했다.

김씨는 “제값을 내더라도 저도 제가 보고 싶은 영화를 편한 시간에 집 근처 영화관에서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소송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2015년 6월 시각장애인의 놀이기구 탑승을 제한하는 에버랜드를 상대로 한 차별구제 소송도 내 재판이 진행 중이다.

◆‘오픈형’ 배리어 프리 영화는 비장애인이 불편=현재 시청각장애인들이 영화를 볼 수 있는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화면을 음성으로 해설해 주고 들을 수 없는 이들을 위해 대사와 소리를 자막으로 알려 주는 ‘배리어 프리(barrier free)’ 영화들이 간혹 제작·상영된다. 영화진흥위원회와 한국농아인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3월부터 지난 10월까지 영화진흥위원회 예산 지원을 받아 41편의 한국 영화가 ‘배리어 프리’ 버전으로 상영됐다. 하지만 상영 횟수는 한 달에 전국에서 83회 정도에 불과하고 시간대는 관람객이 적은 주중 낮이나 주말 오전으로, 장소는 특정 지점으로 제한돼 있다.

‘배리어 프리’ 영화를 상영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소리 해설과 대사 자막이 붙은 채로 모두에게 상영되는 ‘오픈형’이다. 현재 영화관들이 매달 ‘장애인 영화 관람 데이’ 등의 이름으로 상영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장애인이 아닌 관람객들에게는 방해가 된다는 게 문제다. 김씨는 “비장애인인 어머니와 함께 ‘장애인 영화 관람 데이’에 간 적이 있는데 어머니가 정신이 없었다고 하시더라고요. 동작이 다 보이는데 설명이 계속 나오니까요. 그리 즐거운 경험은 아니었습니다”고 했다.

그래서 나온 게 ‘폐쇄형’ 장비다. 특수안경을 쓴 사람에게만 보이도록 자막을 따로 내보내거나 FM 송수신기를 통해 이어폰을 꽂은 사람에게만 화면에 대한 해설을 들려주는 식이다. 영화관들은 아직 소극적이다. 재판 과정에서 영화관 측은 “안정적으로 쓸 수 있는 상용화된 장비가 없고, 있다고 해도 상당한 비용이 소요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부산국제영화제는 배리어 프리 영화를 상영하면서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화면 해설을 제공하고 있고, 국내에서도 배리어 프리 영화의 자막을 재생할 수 있는 스마트 안경이 유통되고 있다. 상영관 좌석 뒤에 화면을 설치해 자막을 제공하는 방법 등 여러 가지 대안이 있다”고 판단했다.

영화관 화면과 동시에 안경에 흐르는 자막을 볼 수 있는 ‘AR 스마트 안경’. 재판부는 이 안경을 포함해 시청각장애인들이 영화관에서 쓸 수 있는 시청각 기기를 검증한 후 판결을 내렸다. [엡손코리아 제공]

영화관 화면과 동시에 안경에 흐르는 자막을 볼 수 있는 ‘AR 스마트 안경’. 재판부는 이 안경을 포함해 시청각장애인들이 영화관에서 쓸 수 있는 시청각 기기를 검증한 후 판결을 내렸다. [엡손코리아 제공]

◆“시혜 아닌 ‘관객 확장’으로 생각했으면”=이 판결이 확정되면 국내 전체 스크린 2281개 중 2098개를 가진 3대 영화관에서 시청각장애인들이 보다 편하게 영화를 즐길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가장 많은 스크린을 보유한 CGV 관계자는 “항소 여부는 아직 검토 중이다. 궁극적으로 장애인들이 영화 보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도입 방식 등 표준을 정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해외 사례 등을 찾거나 기기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진행 중이다”고 말했다.

임 변호사는 “국내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이 각각 25만 명이다. 이를 합하면 50만 명인데 이들도 ‘1000만 관객’에 포함될 수 있다. 미국의 최대 영화 체인인 리갈사는 큰돈을 들여 장애인용 영화 안경을 개발하면서 이를 장애인에 대한 ‘시혜’가 아닌 ‘관객 확장’으로 봤다”고 말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FM 송수신기는 저시력·노안 등으로 보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도 사용할 수 있고, 특수 안경을 통해 외국인들은 자신의 언어로 된 자막을 볼 수도 있다. 김씨는 “복지나 시혜 차원이 아니라 블루오션이 될 수도 있다는 발상의 전환이 있었으면 한다. 어머니한테도 영화관 가자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날이 곧 오길 기대한다”고 했다.

‘배리어 프리’ 영화 얼마나 자주 상영되나

● 최근 20개월간 택시운전사·군함도· 귀향 등 41편 상영
● CGV·롯데시네마·메가박스 등 전국 영화관
● 시간대는 주로 평일 오후 또는 주말 오전
● 전국에서 매달 평균 83.15회 상영(편당 평균 40.6회)
● 전체 상영 횟수의 0.057%, 일반 상영 1750번에 한 번꼴
※자료: 영화진흥위원회, 한국농아인협회.
2016년 3월~2017년10월 기준

[S BOX] 청각장애인 시청용 ‘스마트 안경’ 드론 영상 보는 데도 안성맞춤

청각장애인을 위한 특수안경은 TV에 시선을 고정하지 않고도 즐길 수 있도록 개발된 ‘AR 스마트 안경’이 원조다. 국내 유일의 판매처인 ‘엡손코리아’의 진재혁 과장은 “안경을 쓴 채로 눈앞에 펼쳐지는 증강현실을 보는 데 최적화된 기기”라고 설명했다. 드론 업계에서도 인기가 있다. 드론이 하늘을 나는 모습을 보면서 동시에 안경을 통해 드론 카메라에 잡힌 영상도 볼 수 있어서다. 자막 서비스 업체 ‘하나캡션’의 유진희 대표는 “스크린당 스트리밍 서버와 안경 2개를 설치하는 데 드는 비용은 약 480만원으로 일주일에 장애인이나 외국인이 4명만 오면 이 비용을 충당할 수 있다”고 말했다.

특별한 기기 없이 스마트폰만으로도 보조 자막을 보는 방법도 있다. 벤처기업 ‘엑세스아이씨티’는 영화의 소리를 1000초분의 1 단위로 인식해 해당 구간에 맞는 오디오나 자막을 동기화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이 회사 최학주 이사는 “관건은 우선 ‘배리어 프리’ 자막이나 음성 해설이 제작돼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오픈형은 영화 원본에 해설을 입혀야 해 편당 1500만~2000만원이 들지만 폐쇄형은 동기화만 시켜 주면 되기 때문에 300만~500만원이면 가능하다”고 말했다.

문현경 기자 moon.h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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