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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내셔널]佛 루브르가 선택한 문경한지를 만드는 부자

중앙일보

입력

"루브르박물관이 경북 문경에서 생산하는 전통 한지의 우수성을 알아본 건 우연이 아닙니다. 한지를 알리기 위한 노력과 60년이 넘게 전통적인 제조 방식을 고수해 온 뚝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루브르, 유물 복원 종이로 한지 선택 #일본화지·중국선지보다 내구성 우수 #5대째 문경한지 만드는 김씨 부자 #"100% 전통방식으로 한지 생산"

문경한지가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인 프랑스 파리에 있는 루브르박물관의 러브콜을 받았다. 해외에 있는 한국 유물의 복원을 비롯해 외국 유물 복원 작업에도 한지를 쓰기 위해서다. 당초 한지와 비슷한 제조작업을 거치는 일본의 화지(和紙)와 중국 선지(宣紙)가 유럽 박물관 복원용 종이의 99%를 차지했다.

하지만 내구성 문제로 박물관 측은 수년 전부터 세계 각국에 수소문해 영구적인 보존성을 갖춘 종이를 물색해왔다고 한다. 그러다 지난해 2월 문경한지의 작업과정을 직접 보게 됐다. 아리안 드 라 샤펠 루브르박물관 소장은 한지장인 김삼식(75)씨의 문경전통한지 작업장에 들러 한지 제작과정을 살피고 한지를 구매해 갔다. 이후 본격 한지를 매입할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문경한지. 백경서 기자

문경한지. 백경서 기자

지난 11일 오전 경북 문경시 농암면 속리길에 위치한 '문경전통한지' 작업장. 경북도 무형문화재 한지장(제23-2호)인 김삼식씨와 김춘호(42)씨 부자의 한지 제작 작업이 한창이었다.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는 한지 작업으로 가장 바쁜 시기다. 내년을 위해 닥나무를 베는 작업을 하는 동시에 올해 한지 뜨기 작업을 마무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경 전통한지의 주 재료인 전통 참닥나무. 백경서 기자

문경 전통한지의 주 재료인 전통 참닥나무. 백경서 기자

김삼식 한지장은 9세 때부터 자형(누나의 남편) 집에서 3대째 내려오는 한지 제작을 돕기 시작했다. 이후 67년째 가업을 이어받고 있다. 지금은 아들·딸 등 가족이 힘을 합쳐 한지를 만든다. 아들 김춘호씨의 입장에서 보면 5대째다. 김춘호씨는 "고생스럽게 만든 전통한지인데도 일반한지와의 가격차이가 1.5배 정도밖에 나지 않아 사실 안타까운 마음이 크다"며 "부인에게 결혼 당시 문경한지를 열심히 제작해 전세계에 알려볼 테니 그전엔 병원비 나가지 않도록 절대 아프면 안 된다고 할 정도였다"고 했다.

경북도 무형문화재 김삼식 장인. [사진 문경전통한지]

경북도 무형문화재 김삼식 장인. [사진 문경전통한지]

이들 부자는 100% 전통적인 방식으로 한지를 만들기에 일반한지보다 제작에 30배 넘는 시간이 걸린다. 한지의 재료인 닥나무는 3000평 밭에서 직접 재배하는 토종 '참닥'만 쓴다. 또 한지 작업 중에 화학약품은 절대 첨가하지 않는다. 화학약품이 한지의 내구성을 떨어뜨릴 수 있어서다. 모두 천연재료가 들어가야 하는 한지를 만들기 위해선 단 하나도 부자 손을 거치지 않는 작업이 없다.

이날 집 앞 밭에서 닥나무를 베던 김삼식 한지장은 "국산 전통 참닥나무여야 한다. 예전에는 동네 어르신들을 통해 참닥을 조달했는데 이제 다들 늙어서 우리가 빚을 내 닥나무 밭을 조성했다"고 말했다. 한지의 주재료인 참닥나무는 11~12월에 베어낸다.

잘 익은 닥나무의 머리부분을 비틀어 껍질을 깐 후 벗겨낸다. 벗겨진 닥은 겉껍질이 붙어 있다고 '피닥'이라고 한다. [사진 문경전통한지]

잘 익은 닥나무의 머리부분을 비틀어 껍질을 깐 후 벗겨낸다. 벗겨진 닥은 겉껍질이 붙어 있다고 '피닥'이라고 한다. [사진 문경전통한지]

이후 1월부터 11월까지 한지제작을 위한 준비과정이 진행된다. 베어낸 닥나무는 8시간 이상 증기로 찌고 한차례 껍질을 벗겨내면 피닥이 된다. 건조해 둔 피닥을 물에 불려 닥칼을 이용해 한 번 더 껍질을 벗기면 하얀 닥인 백닥이 된다. 백닥 제작은 전통한지 제작과정 중에 시간이 가장 많이 소요되는 작업으로 봄~가을 내내 진행한다. 추수가 끝난 11월부터 메밀대·콩대·고추대 등을 태워 재를 만든다. 이 재로 만든 알칼리 용액에 백닥을 넣어 끓인뒤 두드리면 닥 섬유가 완성된다.

피닥에서 껍질을 한차례 더 벗기면 백닥이 된다. [사진 문경전통한지]

피닥에서 껍질을 한차례 더 벗기면 백닥이 된다. [사진 문경전통한지]

다음은 황촉규(黃蜀葵) 뿌리를 발로 밟아 으깨 점액질을 만들어야 한다. 아들 김춘호씨는 "화학 분산제를 사용하면 한지가 덜 촘촘하고 질기지 않아 직접 황촉규로 분산제를 만든다"고 설명했다. 물:닥섬유:황촉규를 200:1:3으로 섞으면 한지를 뜰 용액이 준비된다.

닥섬유, 물, 황촉규가 배합된 용액에서 외발뜨기를 하면 한지가 만들어 진다. 백경서 기자

닥섬유, 물, 황촉규가 배합된 용액에서 외발뜨기를 하면 한지가 만들어 진다. 백경서 기자

다음은 한지 제조의 핵심 작업인 한지뜨기다. 일본 선지보다 한지의 내구성이 우수한 이유는 전통적인 방식의 한지뜨기 작업인 외발뜨기 덕분이다. 외발뜨기는 앞에서 용액을 떠 뒤로 흘려내리고 왼쪽에서 떠서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쪽에서 떠서 왼쪽으로 흘려 내리는 방식이다. 닥섬유가 가로세로로 엉켜 내절도 및 인장강도가 높아진다. 하지만 일본이나 일반 공장에서 생산되는 한지의 경우 이러한 외발뜨기 작업대신 편한 가둠뜨기를 진행한다. 단순히 닥섬유 물을 가둬 놓고 저절로 엉키도록 하는 방식이기에 외발뜨기보다 내구성이 낮을 수밖에 없다.

문경한지 장인 김삼식씨가 외발뜨기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 문경전통한지]

문경한지 장인 김삼식씨가 외발뜨기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 문경전통한지]

외발뜨기를 10여 차례 하면 습지상태의 한지가 만들어진다. 이 습지를 떼어 막대기에 붙인 뒤 빗자루나 솔을 이용해 건조하거나 은행나무 판에 일주일 정도 말리면 한지가 완성된다.

김춘호씨는 "매번 티끌이 적고 내구성이 높은 완벽한 한지를 만들려고 다짐하지만, 참 어렵다. 아버지와 제가 한지 앞에서 항상 겸손해지는 이유"라고 말했다.

지난 11월 24일 루브르박물관을 찾은 김춘호씨가 문경한지의 우수성을 박물관 측에 설명하고 있다. [사진 문경전통한지]

지난 11월 24일 루브르박물관을 찾은 김춘호씨가 문경한지의 우수성을 박물관 측에 설명하고 있다. [사진 문경전통한지]

사실 이렇게 김씨 부자가 공을 들여 만든 전통 한지가 루브르박물관에 가기까지는 김민중 복원사와 최태원 충북대 교수 등 국내학자와 전문가들의 역할이 컸다. 특히 김민중 복원사는 2010년부터 문경전통한지의 우수성을 담은 논문을 발표했다. 또 닥나무 생산부터 한지 제조까지 모든 것을 직접 할 수 있는 곳은 문경전통한지 작업장 뿐이란 사실을 박물관 측에 알렸다. 김춘호씨는 "6~7년 전 김민중 복원사로부터 전화가 와서 '우수한 한지를 전세계로 알려야 한다'고 했다. 그때부터 마음을 합쳐 노력한 결과"라고 말했다.

루브르 박물관의 테스트 작업을 거쳐 박물관이 문경한지를 본격 매입하면 문경한지뿐만 아니라 국내 한지 생산 작업장들이 모두 바빠지게 될 것이라는 게 김춘호씨의 설명이다.

김씨는 "우리는 한해 최대 2만장밖에 만들지 못한다. 이제부터 교육에도 힘써 100% 전통적인 방식으로 한지를 만드는 장인들을 길러내고, 다양한 지역의 한지장인들을 만나 기술교류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경=백경서 기자 baek.kyungse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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