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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 청각장애인 구두닦이가 울산경찰청장에게 손편지 쓴 사연

중앙일보

입력

지난 달 24일 70대 청각장애인 구두닦이 노인이 황운하 울산경찰청장에게 보낸 감사 편지. [사진 울산경찰청]

지난 달 24일 70대 청각장애인 구두닦이 노인이 황운하 울산경찰청장에게 보낸 감사 편지. [사진 울산경찰청]

지난 달 24일 황운하 울산경찰청장 앞으로 편지가 한 통 배달됐다.
편지지에는 한자가 섞인 반듯한 글씨가 빼곡했다. 빌려준 돈을 받을 수 있게 도와줘 고맙다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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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은 이랬다.
울산 울주군에서 구두닦이를 하며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던 청각장애인 김모(73)씨는 오래전 지인에게 200만원을 빌려줬다. 지인이 계속 돈을 갚지 않자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지난 11월 19일 황 청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본 황 청장은 수사관에게 문제가 없는지 조사를 지시했다. 내용을 파악한 경찰이 김씨 지인에게 연락해 조사 계획을 알리자 지인은 바로 돈을 갚았다. 김씨는 황 청장에게 편지를 보낸 지 5일 만에 돈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울산 경찰이 ‘범죄 척결자’에서 ‘문제 해결사’로 치안 보폭을 넓히고 있다.
황 청장은 “몇 년 전만 해도 경찰이 재산권 분쟁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최근 경찰 내부에서 ‘행정 경찰’로서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고 말했다. 보통 개인 간 분쟁에서 형사 입건을 하면 피해 보상을 받기 어려워진다. 입건 전 단계에서 경찰이 개입해 민사소송보다 더 빠르게 피해 보상을끌어낸다는 취지다. 황 청장은 “경찰권을 남용하는 게 아니라 국민이 원하는 경찰의 모습에 가까워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황운하 울산경찰청장. 중앙포토

황운하 울산경찰청장. 중앙포토

황 청장은 일선 경찰들에게도 적극적인 민원 해결을 주문했다.
지난 10월에는 역시 울주군에 사는 70대 남성이 경찰서를 찾았다. 알뜰폰 관련 상담 전화를 받고 강제가입을 했다가 해지를 하려니 고객센터가 거부한다는 사연이었다. 민원을 접수한 경찰이 고객센터에 전화했지만 역시 해지해줄 수 없다고 하자 방송통신위원회, 교육과학기술부에 알뜰폰 불법 사기 전화를 신고해 결국 해지를 할 수 있게 했다.

한 시민은 지난 10월 중구 반구동 신축공사장에서 떨어지는 진흙을 피하다 상해를 입었다. 지자체 도움을 요청했지만 민원이 접수되지 않아 경찰서 형사과을 찾았다. 담당 형사가 업무상과실치상 혐의로 공사 관계자를 불구속 입건하자 가해자가 자발적으로 피해 보상을 했다.

또 다른 시민은 한 회사와 계약해 약 2억5000만원 상당의 공사를 했지만 이 회사가 이유 없이 공사비를 미뤄 부도 위기를 맞았다. 사정을 들은 담당 수사관이 수사를 시작하자 회사가 공사비를 지급해 부도를 면했다.

울산경찰청은 황 청장을 비롯한 경찰들이 다양한 분야의 시민들을 만나는 '시민과 경찰협의회'를 매월 1회 열고 있다. 울산청에만 있는 제도다. [사진 울산경찰청]

울산경찰청은 황 청장을 비롯한 경찰들이 다양한 분야의 시민들을 만나는 '시민과 경찰협의회'를 매월 1회 열고 있다. 울산청에만 있는 제도다. [사진 울산경찰청]

‘시민과 경찰협의회(이하 시경협)’ 역시 억울한 민원을 해결하는 통로가 되고 있다. 지난 8월 취임한 황 청장은 9월 이 협의회를 신설했다. 다른 지역에는 없는 제도다.

시경협은 원래 시민, 지자체가 치안활동에 함께 참여하기 위해 만든 협의회다. 청장이 직접 참석해 사건 수사 등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 시민들의 사연을 듣고 적극적으로 해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매월 1회 열리는 시경협에는 택시기사, 이장, 아기 엄마, 인권변호사, 외국인 근로자, 탈북민, 장애인, 청소업체 종사자, 일용근로자, 주부, 대리운전 기사, 가정폭력 상담사, 독거노인, 전세 버스 운전자, 식당 종업원 등 다양한 분야의 평범한 시민이 참석했다.

시경협은 스쿨존 차량통행제한구역 지정, 장애인 성폭력 피해자 정기적 방문, 발달장애인 가정 정기적 방문, 대형 화물차량의 운전 교육 기회 마련 등 총 25건의 시민 제언을 받아들여 조치했다.

울산지방경찰청 전경. [연합뉴스]

울산지방경찰청 전경. [연합뉴스]

이들에게서 경찰에게 바라는 점을 듣고 정책에 반영하기도 한다.
탈북민 출신 오모(45, 여)씨가 탈북민 보호 강화를 요청한 탈북민 대표가 경찰과 탈북민들을 연결하는 ‘다리돌’ 프로젝트와 식당 종업원 이모(55, 여)씨가 제안해 만든 결손가정 아동 정기적 상담 제도가 대표적이다.

울산청은 12월 시경협이 22일 열릴 예정이라고 밝혔다. 초청 인원은 10명 안팎이다. 참가를 원하는 시민은 15일까지 울산청 기획예산계(052-210-2427)로 신청하면 된다. 최종 참가자는 희망자 중 추첨한다.

울산=최은경 기자 chin1ch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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