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서소문 고가 아래에는 ‘대보찻집’이란 다방이 있었다. 낡고 반질반질한 ‘ㄴ’자형 소파, 팔뚝만 한 물고기가 헤엄치는 어항, 테이블마다 UN 성냥통이 놓여있던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이었다. 그곳에선 갖은 약재로 끓인 ‘십전대보차’를 팔았다. 대접만 한 찻잔에 빛 고운 대추와 잣이 동동 띄워져 있던 차 한 잔이면 코앞까지 와 있던 감기도 놀라서 도망갈 뜨끈함이 느껴졌다. 찬바람이 불면 온기 머금은 그 한 잔이 그립다. 옛날식 다방을 찾아 길을 나섰다.
다방커피는 '둘둘둘'이 진리! 서울의 오래된 다방 탐방기
을지다방
」한 노신사가 다방 문을 열고 들어서자 차가운 기운이 따라온다. 주인장과 안부를 주고받고 천천히 신문을 읽기 시작한다. 습관처럼 찾는 오랜 단골에게 주문을 재촉하는 눈치는 없다. 나지막한 TV 소리와 신문을 넘기는 소리만 있다. 이곳의 시간은 느리게 간다.
박옥분씨(60)는 '을지다방'의 세 번째 주인이다. 1985년 이곳을 인수했다. 33년째 매일 아침 일곱 시 반부터 저녁 일곱 시까지 문을 연다. 일요일 하루만 쉰다. “잘나갈 땐 주방장·전속 마담·홀 서빙·카운터까지 한 9명이 같이 일했었어. 주방장은 요즘으로 치면 바리스타지. 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용모단정은 물론 교양도 있어야 했어. 전화가 하도 많이 와서 카운터에는 전화만 받는 사람을 둬야 할 정도로 장사가 잘됐었어"
을지다방엔 그 시절 간판은 물론 소파·탁자·주전자도 그대로 남아있다. 쉴 새 없이 변하는 서울에서 유독 시간이 멈춘 듯한 곳, 늘 익숙한 풍경이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여유를 준다. 쌍화차 한 잔을 주문했다. 물론 계란 노른자 동동 띄워서. 너무 뜨겁지 않은 적당한 온도. 알싸한 향. 고소하게 씹히는 견과류까지 모든 게 완벽하다. 비법을 물었다. “그런 걸 어떻게 공개해. 몸에 좋다고 무조건 많이 넣는 게 좋은 건 아니야. 오히려 맛이 없지. 적당히 적정량. 그게 비법이야”라는 모범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일하는 게 즐거워. 자부심도 있고. 돈도 벌면서 어떻게 하면 손님들께 좋은 것을 대접할까 그런 생각으로 장사하고 있어” 여주인의 비법은 바로 이런 영업철학이 아닐까?
주소/서울 중구 충무로 72-1. 연락처/02-2272-1886. 대표메뉴/다방커피 2500원, 쌍화차 4000원. 영업시간/07:30 ~ 19:00(일요일 휴무)
학림다방
」대학로에 위치한 '학림다방'은 1956년에 문을 열었다. 올해로 61년째. 그간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다. 현재 4대 사장인 이충렬씨(62)가 1987년에 인수해 운영 중이다. 원래 학림(鶴林)이었던 이름은 서울대 문리대 축제 '학림제'의 영향으로 자연스레 배움의 숲이란 뜻의 학림(學林)이 되었다. 문을 열 당시 서울대 문리대에 24개의 강의동이 있었는데 학림은 제25 강의실로 불리기도 했다.
서울대 교수와 학생들의 아지트, 김승옥·김지하·황지우·고 이청준 등 문화예술인의 사랑방, 공안당국의 국가보안법 위반 조작사건인 ‘학림사건’의 시작점, 설경구·송강호·황정민 등 대학로를 주름잡던 연극배우들의 뒤풀이 장소,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촬영으로 외국인 관광객들의 인증샷 코스...... 학림을 대표하는 수식어는 수없이 많다. 오래된 이야기와 매력으로 서울시 '미래유산'(2013년)과 '오래가게'(2017년)에도 선정됐다. 만석으로 발걸음을 돌리는 손님들이 많아져 최근에는 분점도 냈다. 커피 볶던 공간을 개조해 아담한 학림커피로 만들었다.
자연스레 세대교체가 이뤄지고 있지만, 이 사장은 변화가 반갑지만은 않다. “사실 지금은 붕 뜬 것처럼 느껴져요. 이후가 걱정되기도 해요. 떠들썩하게 하지 말고 가만히 두는 게 오히려 이곳을 오래 지키는 방법이 아닐까요”라며 “벌써 운영한 지 30년이 넘었어요. 소중한 생각과 추억들이 켜켜이 쌓여있기에 그것들의 가치가 이어져 나가면 좋겠어요. 그게 바람이에요"라고 말했다.
그래도 학림은 학림이다. 시인 황동일은 학림 입구에 이렇게 적었다. “.......이 초현대, 초거대 메트로폴리탄 서울에서/ 1970년대 혹은 1960년대로 시간 이동하는/ 흥미로운 체험을 할 수 있는 데가/ 몇 군데나 되겠는가?/ 그것도 한 잔의 커피와/ 베토벤쯤을 곁들여서….”
주소/서울 종로구 대학로 119 2층. 연락처/01-742-2877. 대표메뉴/비엔나커피 6000원, 치즈케이크 6000원. 영업시간/10:00 ~23:00(연중무휴)
브람스
」안국역 사거리 2층. 근엄한 표정의 작곡가 요하네스 브람스 얼굴이 그려져 있다. '브람스'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채우던 공간이었다. 음악을 듣기 위해 문 열기 전부터 줄을 서기도 하고 금세 만석이 되어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곳은 클래식을 좋아하던 젊은 부부가 시작했다. 두 번 주인이 바뀌었어도 그때의 분위기가 한결같이 유지되고 있다. 삐걱거리는 마룻바닥과 분홍색 벨벳 의자는 30년 넘게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조마리아 사장은 클래식의 매력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클래식 전문가는 아니지만, 변화무쌍한 클래식의 매력에 빠져 있어요. 한 곡을 기쁠 때, 슬플 때, 누군가 그리울 때... 그때그때 느끼는 기분에 따라 달리 들을 수 있잖아요. 낭만과 여유가 여기에 있죠. 요즘 사람들은 너무 바쁘고 경쟁적이에요. 점심 먹고 잠시 앉을 새도 없이 커피 한 잔 사 들고 사무실로 들어가잖아요. 이곳에 오면 클래식을 잘 알지는 못하더라도 정서를 같이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브람스는 선율에 담긴 추억이 재생되는 장소다. 이곳에서 소개팅했던 남녀는 이십 년 후 딸과 함께 처음 만났던 자리에 같이 앉았다. 택시를 타고 가다가 아직 남아있는 브람스를 보고 내려서 들어오는 손님도 있다. 매해 12월 31일마다 오던 커플은 작년엔 결혼해서 찾았다. 조 사장은 “올해는 새 식구와 함께 올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브람스는 ‘옛날식 다방커피’를 판다. 진한 원두커피에 따로 내어주는 설탕 둘, 프림 둘 넣고 휘휘 저어주면 세월이 흘러도 그 자리에 남아있는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주소/서울 종로구 율곡로 61 2층. 연락처/02-743-2059. 대표메뉴/다방커피 4500원, 대추차 6000원. 영업시간/평일 11:30 ~24:00, 주말 13:00 ~ 22; 00(설, 추석 당일만 휴일)
사진·글·동영상 장진영 기자 artja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