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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되돌아보는 크리스마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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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김기현 서울대 철학과 교수

김기현 서울대 철학과 교수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를 전하는 은은한 캐럴. 트리 밑에서 가족들과 함께하는 오붓한 시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연상되는 일들이다. 어떤 이들은 활기찬 송년 자리와 쇼핑, 그리고 한 해를 보내며 친지들과 함께 보내는 담소의 시간을 생각한다. 이런 이미지들이 색이 바랜 이유는 나이가 들면서 세상의 각박한 모습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올 들어 유난히 주변이 스산하다. 북한의 계속되는 핵 위협 아래 우리의 마음은 위축된다. TV를 틀면 과거 적폐의 인물들이 검찰을 드나드는 모습이 잡히고, 그 뒤에서 적폐청산이니 정치보복이니 하는 아귀다툼이 들린다. 멀리 예수가 활동한 예루살렘에서는 화염병과 최루탄이 교차한다.

예수는 소외된 이들에 대한 사랑을 외치며 등장 #기독교는 시대를 일깨우는 외부자로 거듭나야

예수는 어떤 모습으로 이 땅에 왔을까? 로마에 지배되는 이스라엘 땅에 지도층이 권력과 영합해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며 율법에 얽매여 이웃에 대한 사랑을 잃어갈 때 예수는 태어났다. 물질에 눈이 어두워 종교적 가치를 망각해 가는 이들의 가판대를 엎으며,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 선언한다. 예수는 사랑을 외치며 병과 가난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치유하고 위로한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가 복을 받는다고 선언하며 예수는 자신의 시대에 도전한다. 이런 도덕적 힘이 있었기에 초대 교회는 300년에 걸친 온갖 박해를 견뎌 냈고 기독교는 서양 문명의 주축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1200년이 지나 또다시 기독교가 기득권과 결탁해 타락해 갈 무렵, 마르틴 루터는 교회의 부패에 항의해 비텐베르크 한 교회의 문에 95개의 논제를 쓴 서한을 못 박는다. 자신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받은 루터는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매여 있다. 양심에 어긋나는 것은 옳지도 안전하지도 않기에 나는 어떤 것도 철회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여기 확고히 서 있다.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고 말한다. 유럽의 한 구석에서 발생한 작은 저항으로 끝날 수 있었던 사건이 세계적 운동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타락해 가는 세태를 비판하고, 기독교의 본래의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외친 것이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개인의 행복 추구가 지상명제인 개인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인터넷 시대 사람들은 다른 이들과 살을 맞대는 기회가 적어져 거리는 멀어져 가고, 감정이입과 공감의 능력은 힘을 잃어 간다. 양보와 헌신은 고리타분한 훈계로 들리고, 이타심은 유용한 생존전략이라는 포장을 입을 때에만 귀가 솔깃해진다. 사회에 온기가 돌 리 없고, 갈등과 적자생존의 문화가 팽배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예수의 시대보다 우리의 시대가 덜 오염되어 있다고 누가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얼마 전 나온 통계에 따르면 개신교도가 인구의 거의 20%를 차지하고, 천주교도는 8%에 이른다. 우리의 인구 중 거의 30%가 기독교도다. 우리 시대의 문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더 큰 힘을 생각하기 쉽지 않다. 예수의 이야기는 사회가 오염되어 갈 때 외부자로서 경종을 울리는 도덕적 사표로 기독교가 시작되었음을 알려 준다. 시대적 흐름에 내부자가 되어 세속적 권력과 결합되었을 때 흔들렸고, 다시 외부자가 되어 반성을 외쳤을 때 또다시 종교개혁이라는 큰 흐름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한잔 술로 축제를 즐기기보다 예수의 고난을 되새기며 탐욕과 이기심에 갇힌 우리의 모습을 찬찬히 되돌아보면 어떨까 싶다. 그런 성찰들이 쌓일 때 우리의 기독교는 개인의 복락을 추구하고,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하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 시대를 일깨우는 외부자로서의 본래적 사명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김기현 서울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