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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논설위원이 간다

"1년에 4번 집에 들어가, 아내도 투입"···탐정, 불법과 합법 사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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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조강수
조강수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논설위원이 간다] ‘공권력 사각’ 채운다 … 예비 탐정 3300명 ‘한국판 홈스’의 꿈

조강수의 세상만사

‘셜록 홈스·에르큘 포와로(영국), 괴도 뤼팽과 천재 소년 이지도르(프랑스), 탐정 갈릴레오(일본)….’

탐정법, 국회 법사위 문턱서 좌절 #현재 탐정 명함도 못 만드는 신세 #6년차 탐정 “불법·합법 경계 오가” #바쁠 때는 아내도 현장에 투입 #경찰·검찰, 살인·강도 등 맡을 때 #탐정, 화이트칼라 범죄 담당 가능

세계적 추리 작가들이 창조해낸 명탐정들이다. 『기암성』의 작가 모리스 르블랑은 “처음엔 그놈(뤼팽)이 나의 그림자였으나 지금은 내가 그놈의 그림자”라고 말했다고 한다.

모리스 르블랑의 '기암성'에 등장하는 바늘바위

모리스 르블랑의 '기암성'에 등장하는 바늘바위

모리스 르블랑의 집 표지판

모리스 르블랑의 집 표지판

한국에선 왜 명탐정이 안 나올까. “명탐정요? 탐정도 없는데….” 그러고 보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 회원국 중 탐정제도와 관련 법이 없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지난 20년간 11건의 공인탐정법안이 발의됐으나 전부 무산됐다. 동국대가 국내 최초로 ‘탐정(PIA)법무학’ 석사학위과정을 개설, 신입생을 모집 중이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되고 싶어 했을 사설탐정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지난 11일 오후 5시 경기도 하남의 대형 쇼핑몰. 셜록 홈스의 트레이드마크인 프록코트와 파이프 담배 대신 두꺼운 겨울 코트 차림에 안경 쓰고 휴대전화를 든 임병수(43)씨가 빠른 걸음으로 특정 매장으로 이동했다. 성장 가능성만을 보고 6년 전 불모지인 탐정업에 몸을 던졌다는 그는 ‘탑맨 임실장 공인탐정연구소’ 대표다.

짧은 머리와 희번덕거리는 눈빛이 강인하고 냉철하다는 인상을 준다. 매장에 간 그는 손님을 가장해 20대 남성 직원 주위를 맴돌며 누구랑 통화를 하는지, 대화 내용이 뭔지를 슬쩍슬쩍 엿들었다. 6억원대 채무를 지고 6개월 전 잠적한 50대 후반 여성의 소재를 찾아달라는 사건 의뢰를 받고 그 아들의 동선을 10일간 2인 1조로 주시해 오는 중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그는 “방금 전주에서 일을 보고 올라오는 길이었다”며 “바람난 30대 여성이 애 셋을 내팽개치고 집을 나가 상간남과 동거하며 이혼과 위자료 3000만원을 요구하는 사건인데 이런 사건을 많이 맡다 보니 내 혼도 비정상이 되는 것 같다”며 머리를 흔들었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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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연구소 대표 명함은 왜 안 주나.
“명함을 못 만든다. 신용정보이용·보호법 40조가 ‘탐정’ 명칭 사용 금지를 규정하고 있어서다. 그런데 사업자 등록증은 탐정업, 조사업으로 신청해 받았다. 또 탐정학원 운영은 불법이고 온라인교육·컨설팅은 가능하다. 현실과 법의 괴리가 심각하다. 멀쩡히 현실인 것을 법적으로 인정해 주지 않기에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탐정연구소는 어떻게 운영하나.
“서울 신사동에 있다. 상근직원 4명에 비상근 6명이 일한다. 바쁠 때는 아내도 현장에 투입한다. 회사 차가 6대 있고 그중 택배차도 있다. 미행할 때 택배잠바, 모자, 조끼 쓰고 할 때도 있다. 1종 대형면허, 화물운송 자격증, 영업용 번호판도 있다. 올해 2월 보험설계사 자격증도 한 달 교육받고 땄다. 배지 달고 보험 영업사원으로 위장해 접근하면 정보 파악이 수월하다. 탐정은 연예인처럼 상황별로 연기도 잘하고 눈치가 빨라야 한다. 매출은 월 1500만~2000만원 선인데 날씨가 추워지면서 의뢰 건수가 줄었다. 두 달 또는 석 달에 한 번 집에 갈 정도로 고달픈 일이다. 탐정은 심장이 쫄깃쫄깃해지는 재미를 느껴야 할 수 있다. 지금은 불법과 합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고 있다. ”
주로 어떤 사건을 하나.
“영화나 추리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살인 등 강력 사건이나 미제 사건 해결이 주 업무가 아니다. 그런 형사 사건들은 국가기관인 경찰이 한다. 공권력이 닿지 않는 민사 사건 등과 관련해 증거 자료 수집이나 사실 관계 확인이 업무의 80%를 차지한다. 외국은 변호사와 탐정이 계약을 맺어 증거수집을 맡기고 법정에서도 증거능력으로 인정한다. 지난 6년간 사람 찾기 100건 이상, 배우자 외도 300여 건을 해결했다.”
가장 기억나는 사건은.
“강원도 영월에서 초등생 딸 2명을 팬티 차림으로 데려온 적 있다. 친권소송 중이었는데 아빠가 강원도로 사실상 납치해 갔다. 성인오락실을 운영하는 그 아빠에게 아이를 맡기면 안 되겠다 싶더라. 엄마가 변호사와 상담한 뒤 우리를 찾아와 아이들을 데려와 달라고 했다. 머리를 써서 엄마와 여직원, 건장한 남성 2명을 대동하고 내려갔다. 아빠와 가족들 동선을 파악해 집에 할머니만 낮잠 잔다는 걸 확인하고 엄마와 여직원이 들어가 두 아이를 데리고 나왔다. 시속 150㎞로 달려서 의왕시 모처로 옮겼다.”
공인탐정제도가 도입되면 ‘개구리 소년’ 사건 같은 미제 사건이 줄어들까.
“그렇다. 외국엔 장기 미제사건이나 살인사건만 따라다니는 탐정도 있다. 국가 공인탐정제도가 시행되기에 가능하다. 특히 장애아동이나 노인 치매 실종사건은 장기 적출 등 2차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서 대책이 필요하다.”

임씨는 자칭 ‘탐정’이다. 임씨처럼 대한공인탐정협회 소속 민간조사원 자격증을 딴 이른바 ‘필드맨’은 3300명에 이른다. 하지만 법적으로 탐정은 직업으로서 인정·보호받지 못한다. 1999년부터 선진국형 공인탐정제도의 법제화가 추진됐으나 법무부와 대한변호사협회 등의 반대로 국회 법사위 문턱을 넘지 못하면서 번번이 무산됐다. 올해 7월 발의된 공인탐정업법도 표류 중이긴 마찬가지다. 그 주요 내용은 공인탐정은 경찰청장이 실시하는 자격시험에 합격하고 연수교육을 받아야 하며 이후 공인탐정업을 하려면 경찰청장에게 등록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동욱 동국대 법대 교수는 “탐정제도는 국가의 수사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아니라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채워주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법무부·검찰과 경찰이 관할권을 놓고 힘겨루기를 할 때가 아니라는 얘기도 있다.

그는 “탐정업 법제화는 음지에 있는 흥신소 등을 양성화해 통제한다는 의미가 있다” 고 덧붙였다. 과거의 주먹구구식 복덕방이 공인중개사가 된 것처럼 사설탐정도 국가가 관리하고 자격을 주는 공인탐정사로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김광호 동국대 겸임교수는 “국내에 들어와 있는 다국적기업들은 ‘컨설팅을 받는다’는 명목으로 사실상 자국의 탐정회사 직원들을 고용해 활용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궁극적으로 강제력을 필요로 하는 강도·살인·마약 등의 범죄는 국가공권력인 경찰·검찰이 맡고 물리적인 힘과 폭력을 수반하지 않는 화이트칼라 범죄, 즉 교통사고, 보험, 미아·실종자, 사이버범죄, 사람·물건의 소재 파악 등의 범죄는 탐정이 맡는 게 타당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최근 변호사에게 세무사 자격을 자동으로 주는 조항을 삭제한 세무사법 개정안이 국회선진화법의 적용을 받아 법사위를 거치지 않고 국회의장 직권상정으로 통과됐다. 국회가 어영부영 미루다간 공인탐정법도 그런 운명을 겪지 않을까 걱정된다.

요즘 극장가에선 영화 ‘오리엔트 특급살인사건’이 화제다. ‘추리소설의 여왕’으로 불리는 애거사 크리스티가 1934년에 쓴 게 원작이다. 80여 년이 지나서도 등장인물들이 살아 숨쉬는 듯하다. 한국에서도 명탐정이 나오길 바라는 건 사치일까.

조강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