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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커피 인문학 시대 … 국내 첫 커피학과 개설한 김성헌 단국대 교수

중앙일보

입력

미니멀리즘, 모더니즘 커피를 찾아 20여 년간 커피 연구해온 인문학자…커피의 본질을 찾는 작업, 커피문화·예술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리더양성 꿈꿔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총체적 예술, 그 시대의 정신 담은 커피라야!”

김성헌 교수는 올 초 단국대 문화예술대학원에 세계 최초로 커피학과를 개설했다. 김 교수가 실습실에 마련된 로스팅 머신 앞에서 원두 향을 시향(試香)하고 있다.

김성헌 교수는 올 초 단국대 문화예술대학원에 세계 최초로 커피학과를 개설했다. 김 교수가 실습실에 마련된 로스팅 머신 앞에서 원두 향을 시향(試香)하고 있다.

언어철학자 놈 촘스키(Noam Chomsky)의 생명존중 사상과 근대 선승인 경봉(鏡峰, 1892~1982) 선사의 다선(茶禪)의 정신세계가 녹아든 커피라면 맛이 어떨까? 그가 내어준 커피 맛에서 묵직한 바디감에다 신맛·짠맛이 혀끝과 입안에 감돌고, 풍부한 향이 코끝에 오래 머문다.

날씨 좋은 지난가을의 어느 토요일에 찾아간 단국대 커피학과 실습실. 그는 에디오피아산 원두인 이르가체페를 골라 직접 로스팅하고, 전통의 삼베 깔때기를 이용한 핸드드립 커피를 내밀었다. 투박한 조선 도기에 담아낸 커피에서 전해지는 풍미감이 특별한 느낌을 준다.

커피 한잔 마시면서 왠 촘스키와 경봉 대선사의 얘기냐고 의아해 할 분도 있을 게다. 이 두 사람은 다름아닌 김성헌(52) 단국대 영미인문학과 교수를 커피인문의 세계로 이끌어준 스승들이다.

그는 올해 초 이 대학의 문화예술대학원에 커피학과 대학원 과정을 개설한 주인공이다. 국내 대학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처음 생겨난 커피학과라고 한다. 언어철학을 전공하고 학부에서 영미인문학을 가르치는 그가 어떻게 커피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일까?

커피는 하나의 생명체… 변형돼야 좋은 커피

대학원생부터 주부, 바리스타, 중소기업 사장까지 다양한 출신의 학생들이 커피학을 공부한다. 김성헌 교수가 실습실에서 수강생들에게 ‘커피의 철학’을 소개하고 있다.

대학원생부터 주부, 바리스타, 중소기업 사장까지 다양한 출신의 학생들이 커피학을 공부한다. 김성헌 교수가 실습실에서 수강생들에게 ‘커피의 철학’을 소개하고 있다.

국내 대학(외국어대학)에서 언어철학을 연구해 박사학위 논문준비를 위해 그는 1995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커피와 차의 고장으로 알려진 보스턴의 하버드대와 MIT(매사추세츠 공과대학)에서 방문학자 연구과정으로 공부했다. 그때 사제관계를 쌓은 이가 MIT의 촘스키 교수다.

3년여 동안 그의 강의를 들으면서 깊은 인연을 쌓지는 못했지만 귀국 후 대학 강단에 선 어느 날 촘스키 교수로부터 뜻밖의 연락을 받게 된다. 부인인 캐롤 촘스키 하버드대 교수가 말기암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데 “한국산 홍삼정을 구해줄 수 있느냐”는 부탁을 해온 것이다. 홍삼정이 맺어준 인연으로 몇 차례 촘스키 교수와 만남의 기회를 갖고 인연을 지금까지도 이어온다. 그때 김 교수가 촘스키 교수에게 물었다.

왜 하필 홍삼을 찾으셨습니까?
“어떤 일을 접근하는 방식은 보편성(Universality)과 아레테(Arete, 탁월함)로 나아가야 한다네.”
아레테의 예를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

이 질문에 촘스키 교수는 말로 하는 대답 대신에 자신이 마시고 있던 커피를 조용히 응시했다. 침묵과 대화할 수 있는 커피의 진면목에 그들은 변하지 않는 가치를 주고받은 것일까.

촘스키 교수와의 만남과 가르침을 통해 “커피는 하나의 생명체이며 변형돼야 한다”는 김 교수의 커피철학이 탄생했다고 한다.

“그분은 ‘인간의 언어능력은 하나의 생명체다. 본질은 항상 변형(transformation)을 한다’고 가르치셨죠. 언어능력으로 인해 인간은 사고(思考) 능력을 갖게 된 가장 진화한 동물인데, 식물로 치면 커피나무가 그렇습니다. 두 개체가 모두 진화의 마지막 단계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흥미롭게도 인간(호모 사피엔스)과 커피는 모두 아프리카 동부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두 가지 최상위 개체인 인간과 커피를 융합해 학문적으로 정립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고도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죠.”

김 교수는 하버드와 MIT에서 유학하던 시절, 틈나는 대로 보스턴에 산재해 있는 커피 인스티튜트를 찾아다니면서 커피의 추출기술과 로스팅 기술을 공부했다.

그는 어린 시절 고향인 부산의 국제시장에서 맛본 일본커피와 미군커피에 길들여졌지만, 외국어대 영어과 대학원에 다니던 시절 은사인 박순함 교수가 매일 원두커피를 갈아서 내려 마시던 걸 보고 처음으로 커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은사님은 전생에 프랑스 사람이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커피를 좋아하셨는데 국제시장 봉지커피만 알고 있던 제가 커피 맛에 처음 눈뜬 순간이었죠.”

2000대 초 영국 에섹스 대학(University of Essex)에 언어교육을 공부하기 위해 유학길에 올랐을 때, 그는 또 다른 커피의 세계를 만나게 된다. 영국 특유의 에스프레소 맛과 카페문화를 만나고 공부할 수 있는 기회였다.

“영국 커피시장과 영국커피협회를 조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죠. 커피 맛을 제대로 모르던 시기였는데 카페 문화가 남다르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영국 유학 후에는 방학 때마다 혼자 테마를 정해 커피여행을 시작했고, 유럽 챔피언십 등 커피대회에 참석하기도 했었죠.”

커피는 시간의 예술… 숙성된 맛이라야 깊다

김 교수는 커피대회를 참석하면서 각국 참가자의 진지하고 형형한 눈빛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커피의 과학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커피 본래의 맛을 찾아 유럽의 중앙으로 들어갔지만 그의 마음을 움직이는 커피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커피 여행은 영국과 독일, 이탈리아를 거쳐 터키에 다다르게 된다. 김 교수는 커피의 본향인 아프리카와 가까운 터키에서 “원전의 원전 같은 커피를 만났다”고 했다.

김 교수의 모더니즘에 의한 커피의 재해석도 흥미롭다. 그것은 시간을 뛰어넘어 커피의 본질(본성)을 찾아내는 탐구 작업이다. 김 교수는 평소 “그 시대의 예술이 그 시대의 자유를 담아야 하듯이 커피에는 그 시대의 정신을 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커피도 그 시대의 커피로 진화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좋은 커피’는 모더니즘 커피를 말한다.

“좋은 커피는 내면에서 광채가 납니다. 그런데 물이 좋아야 커피의 본성을 다룰 수 있거든요. 제가 말하는 모더니즘 커피는 가장 한국적인 커피를 하자는 것입니다.”

그는 자연에서 가져온 살아 있는 ‘생수’를 이용해 커피의 맛을 변화시킨다. 핸드드립 과정에서는 전통 삼베로 만든 필터를 사용하고, 커피를 전통 도자기에 담아낸다. 커피 받침에서도 은은한 참나무 향이 풍긴다. 커피와 자연, 우리 전통의 결합은 김 교수가 특히 중요시하는 대목이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사찰을 많이 다니면서 큰 스님들로부터 우리 차문화를 많이 접했어요. 그 과정에서 우리 자연수를 만나게 되고 차츰 우리 물맛을 알게 됐죠. 다른 나라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물맛이 전국 각지에 숨어 있어요. 저만이 아는 이들 옹달샘 물로 커피를 달이면 일반 정수물 커피와 비교가 안될 정도로 향미가가 풍부해져요.”

특히 어린 시절 통도사 극락암에 주석했던 경봉 대선사로부터 차문화를 보고 듣고 배운 것은 그에게는 커다란 행운이었다. 통도사의 신도회장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극락암을 자주 찾아갔고, 경봉 스님의 무릎 위에서 놀면서 차맛을 익혔다. 경봉 스님은 선종의 큰 봉우리이면서 선다일미(禪茶一味)를 실천해온 다승(茶僧)으로도 이름 높다. 스님은 조선 찻 사발에 말차와 잎차를 우려 마셨다. 평생 ‘끽다거(喫茶去, 차나 들고 가시게)’를 화두 삼아 다반사를 실천했다. 깊고 오묘한 진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차 마시는 데 있다고 가르치기도 했다.

불교와 가까워지면서 자연스럽게 물과 도기에 관심을 갖게 됐지만 그의 커피 철학에도 경봉 스님의 세상(사바세계)을 바라보는 화두가 고스란히 녹아 들었다.

“차를 알게 되면서 물의 질감과 물의 색감을 터득하게 됐죠. 경봉 스님이 즐겨 드시던 말차는 커피로 치자면 에스프레소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해왔던 차와 물에 대한 공부가 커피와 물에 대한 관심으로 진화된 것일 뿐입니다.”

도자(陶瓷)의 역할도 중요하다. 김 교수는 실습실을 찾는 손님들에게 신라토기와 가야토기 모양을 한 도기에 커피를 따라 내놓는다. 커피의 온도와 맛을 간직해주기 위해서는 섭씨 1250도 정도의 장작가마에서 구운 도자라야 한다. 김 교수는 커피와 물, 예술적인 도자를 일러 ‘3합(合)’으로 불렀다. “한국의 물과 흙은 오랜 역사를 통해 세계 최고 수준으로 인정받아 왔어요. 최고의 조건을 바탕으로 ‘한국 커피’를 구현해낸다면 이탈리아 커피, 터키 커피, 또는 아프리카 커피 같은 하나의 브랜드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가장 한국적인 커피가 세계적인 커피의 리딩 아이디어(Leading Idea)를 제시해줄 수 있는 거죠.”

한국의 물과 도자 세계 으뜸… ‘한국 커피’ 모색

김성헌 교수는 커피라는 매개체를 통해 커피를 둘러싼 ‘인간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김 교수가 커피머신에서 갓 추출해낸 에스프레소를 맛보고 있다.

김성헌 교수는 커피라는 매개체를 통해 커피를 둘러싼 ‘인간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김 교수가 커피머신에서 갓 추출해낸 에스프레소를 맛보고 있다.

올 초 개설된 커피학과에는 현재 11명의 학생이 커피학을 공부한다. 중소기업 사장에서 현직 바리스타, 일반 젊은 대학원생, 주부들까지 구성원은 다양하다. 김 교수는 커피시장과 커피문화의 확산에 발맞춰 커피를 학문으로 이해하고 또 이를 제대로 다룰 인력 양성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커피와 관련기기들의 배치까지 그의 손길이 곳곳에 뭍어 있는 실습실은 마치 공과대 실험실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온다. 하지만 그 안은 사실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커피향으로 가득하다.

“커피의 본질적인 맛을 찾으려면 최첨단 기술이 필요합니다. 커피 한 알의 성분을 온전히 뽑아내려면 과학과 기술이 모두 필요해요. 저희 학과가 커피교육의 접근방식을 과학과 예술, 기술(SAT; Science, Arts, Technology)로 정한 것도 그래서입니다.”

커피 생두 감별에서부터 로스팅, 추출, 커핑(센서리)를 통한 평가 기술 등 4가지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최첨단 장비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커피는 그 자체로 세련되고 우아한 존재죠. 커피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기술만으로는 한계가 있어요. 반드시 학문적인 이론이 뒷받침돼야 합니다. 바리스타만이 아니라 커피의 전반을 관리하는 큐그레이더, 로스팅과 커핑 전문가도 키워내야 합니다.”

평소 교육은 “갖고 있는 지식이 발현되도록 하는 것”이라는 소신을 갖고 있는 김 교수는 커피학과의 이념을 이렇게 정했다.

“우리 커피학과는 커피의 시간이 새겨지는 곳이고, 커피의 정신이 새겨지는 곳이며, 생명존중 이념이 실천되는 곳입니다.”

그는 “커피의 이념은 뿌리이며, 커피문화는 열매입니다. 좋은 커피가 나오면 한 단계 나아가 문화·예술로 꽃피울 수 있어야 합니다”고 말한다. 커피학 정립에 나선 김성헌 교수의 오랜 꿈이 커피 열매처럼 막 여물어가기 시작했다.

[박스기사] 단국대 커피학과는? - “검은 커피를 넘어서 아름다운 커피를 만나는 곳”

“커피는 다른 사람에게 전수되기 때문에 더욱 아름답죠. 우리 커피학과의 참 정신이기도 합니다.”

김성헌 교수는 평소 커피학의 교육목적에 대해 “구체적인 질문에 답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커피를 통해 인간사고가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지 밝히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커피학과 인문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예술대학원에 개설된 대학원 과정으로 인문(Humanities)을 바탕으로 SAT(Science, Arts, Technology), 즉 과학과 예술, 기술이 융합한 학문을 가르친다. 문화·예술, 인문 분야 교수진과 커피 전문가로 구성된 융합 특성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커피학과 2년 6개월 과정을 마치면 석사학위(커피학 전공 예술학 석사)와 함께 4개의 자격증(생두 감별 Q-grader, 로스터, 바리스타, 센서리 & 커핑)과 함께 ‘명장(Master)’이라는 칭호가 주어진다.

개설 배경 | “로스터, 바리스타 등 4개 자격증 커피장인”

한국무역협회 통계에 따르면 2016년도 국가별 1인당 연평균 커피 소비량은 놀랍게도 세계 2위를 차지했다(1위는 일본). 한국인은 하루에 평균적으로 2.2회 식사를 하면서 커피는 평균 2.6잔을 마신다는 통계도 있다. 커피는 기호음료를 넘어 한국인의 삶의 방식까지 바꾸고 있는 실정이다. 누굴 만나도 “우리, 커피 한잔할까”가 인사말이 된 지 오래다. 커피와 카페 문화의 급속한 확산으로 커피전문가 양성 및 취업, 창업 수요도 증가해 커피 시장은 확장일로에 있다. 하지만 체계적인 교육에 필요한 전문 교육기관의 부재로 각종 자격증이 넘쳐나지만 국제적으로 경쟁력을 갖춘 전문가 양성에는 한계가 있다는 평가가 있었다. 장호성 단국대 총장은 그동안 교양과목으로 개설돼 있던 커피인문학 과목을 발전시켜 커피학과 개설을 결심했다.

교육 과정 | “그리스 비극에서부터 커피 도예까지 공부”

이론과 실습 과정으로 나뉜다. 이론으로는 커피학 개론(1, 2), 커피와 문화예술(1, 2), 카페 오디세이, 커피와 인문예술, 바리스타 영어, 커피와 세계사, 커피 식물학, 커피과학의 이해, 커피 산업론, 커피 마케팅론, 커피와 패션디자인, 커피 세르모니, 커피와 도예예술 등을 배운다.

실기 과정에서는 생수·커피 센서리, 커피 추출의 원리와 실제, 커피 로스팅, 바리스타 실무, 아트커피 등으로 구성돼 있다.

커피와 인문 분야는 김성헌 교수, 커피와 도예는 조일묵 교수, 커피생두-로스팅-추출 분야의 손상영 교수, 패션분야 강혜승 교수, 문화예술 분야 백희진 교수 등이 가르친다.

“커피교육은 처음부터 최고·최상이 돼야 한다”(Beginning is Everything)는 방침 아래 커피학과 실습실의 장비들은 최첨단 장비를 갖췄다. 커피학과 실습실에는 커피 로스팅 기기인 기센(Giesen)과 프로바트(Probat)가 갖춰져 있다. 커피 생두 탄생의 모든 정보와 본성 감별을 가능케 하는 첨단 기기다.

- 글 김홍균 월간중앙 기자 redkim@joongang.co.kr 사진 김현동 기자 kim.h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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