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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상대정의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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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이건용 작곡가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이건용 작곡가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절대음감은 음고(音高) 하나하나에 대한 감각이다. 어떤 음이 들리면 다른 참고 없이 그 높이를 ‘a’ 혹은 ‘C’ 하고 식별한다. 상대음감은 음 관계를 알아듣는 감각이다. 기준음과 비교해 음을 파악한다. 절대음감은 보통 어린 시절 악기와 음악을 많이 접촉함으로써 생긴다. 따라서 이 음감의 소유자는 음감뿐 아니라 음악성 자체가 발달돼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일찍부터 현악기와 피아노를 전공한 사람들에게 많은데 악기를 연습하는 동안 음에 대한 인식이 예민하게 되었을 것이다.

절대음감도 환경적 신체적 조건에 따라 변해 #뜻의 구김 없이 조건 맞추는 상대정의감 필요

나는 상대음감을 가지고 있는데 악기와 접한 경험이 적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대신 매일 아침 가정예배에서 음악성이 풍부한 아버지와 형제들 틈에서 찬송가를 화음으로 불렀던 경험이 나에게 쓸 만한 화음 감수성, 즉 상대음감(화음은 음들의 관계이므로)을 주었다.

상대음감은 조성이 있는 20세기 이전의 음악들을 듣고 익히며 연주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고, 오히려 음악의 구조적 이해에는 더 유리하다. 조성, 구조라는 말 자체가 상대음감적이다. 그러나 조성이 없는 음악, 음들 간의 충돌이 복잡한 경우에는 절대음감이 요긴하며 이러한 곡의 오케스트라 지휘를 상대음감만으로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음감을 만들어 주고 또 음감의 대상이 되는 음높이는 항상 똑같은 것이 아니었다. 즉 옛날의 C 음이 반드시 오늘의 C 음과 같지 않았다. 음높이는 악기마다 달랐고, 시대마다 기준음도 변했다. 오르간처럼 규모가 큰 악기 제작에는 각 건반에 따른 파이프의 음높이를 정하는 일, 기준음을 정하는 일이 사활적으로 중요해 음률체계에 관한 문제를 늘 고민했다. 지금 서양음악에서 널리 통용되는 표준음고, 즉 ‘ā=주파수 440’은 1834년에 와서야 정해졌다. 지금도 바로크음악 전문악단은 ā음을 주파수 415에 맞추곤 하는데, 바로크 시대의 악기 및 음률제도에 따른 것이다. 이 음은 440에 비해 반음이 낮은 소리여서 현재의 절대음감의 소유자에게는 ā♭으로 들린다. 절대음감은 개인적으로도 변한다. 내가 아는 몇몇 절대음감 소유자는 나이가 들면서 음감이 반음 낮아져서 ā가 ā#으로 들린다고 말한다. 절대음감은 그 말처럼 절대적이지 않다.

절대음감은 어린 시절에 형성되는 게 보통이어서 훈련으로 만들어지기 어렵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상대음감은 어느 정도 훈련이 가능하다. 음 자체의 기억이 아니라 음 관계의 기억이므로 그 관계를 분명하게 식별하는 감각이면 다른 데에 적용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애국가의 첫 시작 “동해물과”의 가락은 계이름으로 “솔도시라”인데 이 가락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를 힘들이지 않고 (혹은 교육을 통해) 높은 음으로도 낮은 음으로도 부를 수 있고 또 듣고 적을 수 있다. 이것이 상대음감이다.

정의를 실현하는 정치세계에도 ‘감’이 작용한다는데 ‘절대정의감’보다는 ‘상대정의감’의 소유자가 많았으면 좋겠다. 마음의 뜻을 구기지 않은 채 조건에 따라 낮게도 높게도 실현하는 이가 있다면 그가 바로 우리가 원하는 정치가 아니겠는가? 생각해 보면 ‘절대’라는 말과 ‘감’이라는 말의 결합이 묘하다. 절대온도의 경우처럼 절대란 개인적 경험을 초월해 과학과 논리에서 근거를 찾는 개념이다. 감이란 본래 개인의 주관적 범주의 일이다. 개인의 감을 절대적으로 여겨 보편적으로 적용하려 하면 어떻게 되는가? 음감이야 음악을 즐기는 데서 끝나고 또 개인적인 차원의 일이지만 이런 감이 정치사회에 작용할 때는? 자신의 감각이 노화했는 줄도 모르고 자꾸 “저 소리는 반음이 높다”는 식의 주장을 한다면, 또 그런 절대정의감 소유자들끼리 만나 양보하지 않고 상대방이 틀렸다고 반목을 계속한다면 피곤한 일이 될 것이다.

오늘날의 정치판은 어떤가? 간혹 진영논리 때문에 힘들다는 소식을 접한다. 이들에게 ‘상대정의감’ 훈련을 하면 도움이 될는지.

이건용 작곡가·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