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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시민문화공동체 10만 곳 육성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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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포트필립은 호주 멜버른 지역에 있는 항구도시다. 이 지역에는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는 특이한 표지판이 하나 있다. ‘한 시간에 열 번 웃는 곳’이라는 표지판이다. 그런데 이 표지판을 설치한 후 포트필립 시민들 삶에 작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길에서 마주치는 이웃이나 낯선 여행객한테 더 자주 미소를 짓고 ‘구다이(G’day·안녕)’라는 인사를 건네게 되었다. 시민들이 서로한테 건네는 미소는 사람들이 더 친밀하고 더 안전한 지역에 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를 ‘미소 효과’라고 한다. 피터 싱어의 『더 나은 세상』에 나오는 일화다.

문화를 경제 가치로만 환산하는 #산업국가 프레임은 파산 선고 #생계 어려운 기성 예술가들을 #도서관·미술관·공연장에 상주시켜 #시민이 문화 즐기게 도와줘야

포트필립시의 목표 중 하나는 ‘친밀한 공동체’다. 서로 적대하고 경쟁하는 환경은 시민들을 불행하게 만든다. 시민들이 자주 인생을 나누고 서로 알아갈 수 있도록 시에서 주민들 사이의 길거리 파티도 열어준다. 프로그램은 시민들이 짜지만 바비큐 장비 등을 대여하고 안전사고에 대비한 보험을 들어주는 등 서비스를 제공한다. 시민들 간의 잦은 대화를 통해서만 친밀감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쓰레기를 처리하고 범죄를 예방하는 등 행정서비스를 제공하고, 일자리를 늘려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 것만이 국가의 일은 아니다. 경제적 풍요가 시민들의 질 높은 삶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모두가 살아가는 단 한 번뿐인 인생에서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차라리 조금 가난하더라도 더 재미있고 더 의미 있는 세상에서 이웃과 어울려 긍정적이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쪽을 택하는 편이 낫다.

촛불과 함께 문화를 경제적 가치로만 환산하는 산업국가의 프레임은 파산을 선고받았다. 포트필립의 시민들처럼 우리 역시 삶의 정신적 가치를 형성하고 행복을 실감할 수 있는 세상으로 전환할 것을 요청하는 중이다. 그러려면 문화를 바라보는 눈부터 달라져야 한다. 상품과 달리 문화는 소비를 통해 전혀 소진되지 않는다.

시론 12/11

시론 12/11

북디자이너 정병규 선생이 늘 강조하지만 책의 가격과 책의 가치는 다르다. 상품으로서의 책은 판매된 후 곧바로 가격이 절반 가까이 떨어진다. 그렇지만 내용이 탁월하거나 만듦새가 훌륭한 책은 시간이 흐를수록 ‘문화의 힘’이 작용하면서 가치의 역행이 일어난다. 가치를 인정받은 후에는 헌책의 가격이 새 책의 가격보다 수십 배, 수천 배 치솟는 일도 흔하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문화적 가치는 무한대에 이르리라. 이러한 ‘헌책의 경제학’은 단순한 산업의 논리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다. 책만 그러랴. 미술도, 음악도, 문화재도, 축제도, 체육도, 관광도 마찬가지다. 문화를 앞에 놓고 돈을 먼저 이야기하지 말라. 문화는 본래 한 사회의 잉여를 소진함으로써 삶의 만족을 생성하는 행위인 것이다.

석가탑과 다보탑을 보라. 물질로 보면 돌덩이에 불과하다. 산산이 해체해 얼마든지 받침돌로 재활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을 돌이 아니라 탑으로 보는 것이 문화다. 돌을 쓸데없는 방식으로, 이전엔 존재하지 않았던 특이한 방식으로 쌓음으로써 탑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 예술이다. 문화예술정책이란 예술가들이 우리 사회의 넘쳐나는 잉여를 자유롭게 소진할 수 있도록 온갖 방식으로 지원하는 일이다. 하물며 문화로써 돈을 벌어들이라고 닦달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뿐이다. 문화는 항상 산업을 넘어선다.

그러나 문화는 ‘예술가의 전유물’일 수 없다. 롤랑 바르트나 미셸 푸코 같은 철학자들이 반세기 전에 ‘저자의 죽음’을 선포한 이유를 곱씹을 필요가 있다. 성숙한 사회란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평등한 입장에서 일상을 문화로 만드는 데 참여하는 평등한 사회이고, 이 사회에서는 아무도, 어떠한 영역에서도 특권의 자리를 선험적으로 부여받아서는 안 된다.

문화적 아름다움은 예술가가 일방적으로 작품에 집어넣는 게 아니다. 시민들의 삶 속에서 의미를 생성할 때 작품은 아름다움을 획득한다. 문화생활은 시민들의 적극적인 의미 활동이지 예술가가 부여한 의미를 소비하는 것일 수 없다. 시민들이 자유롭게 아름다움을 추구할 수 있도록 ‘감정교육’을 전개하고, 저자(예술가)와 적극적으로 아름다움을 다투도록 도와야 한다. 예술가는 생산하고 시민들은 소비하는 ‘계몽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시민들 스스로 주체가 되어 예술을 생산하고 즐길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문화가 생활이 되고 생활이 문화가 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도록 창작·독서·연주·공연·감상 등을 행하는 자발적 시민문화공동체 10만 곳을 육성하자. 그리고 생계가 어려운 기성 예술가들을 국가의 비용으로 도서관·미술관·문학관·음악관 등에 상주시켜 이들을 도울 수 있도록 한다면 문화국가로 가는 길이 열릴 것이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