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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영기의 시시각각

원전 수출 따왔더니 검찰 수사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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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사람들은 한국전력이 영국 서북부의 무어사이드 원전을 수주했다고 환호하고 있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을 뿐이다. 내년 봄 최종 계약서에 서명할 때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다. 막판까지 경쟁했던 중국 광허그룹은 차고 넘치는 자본을 무기로 우리를 계속 물고 늘어질 태세다. 자칫 어디선가 발을 헛디뎌 20조원 프로젝트를 날려버리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축배 한 잔은 따라줄 줄 알았다 #수십만 개 일자리 끝까지 지켜야

원전 수출은 기술, 수주(受注), 금융 세 단계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이어가야 성사되는 국가 총력 산업이다. APR-1400으로 명명된 한국형 원전은 산업혁명의 발상지인 영국으로부터 기술 면에서 세계 최고의 안전성·경제성을 인정받았다. 한전과 한수원은 영국의 산업에너지 장관과 국장, 전문가 일행을 서울과 경주의 원자력 발전소, 창원의 두산중공업으로 몇 번씩 불러 현장의 감동 작전을 펼쳤다. 수주전 초기만 해도 “한국이 감히 무슨 원전 수출이냐”고 조롱에 가까운 발언을 하던 영국인들은 현장을 보면서 “우리 산업은 가내 수공업 수준”이라며 한국의 산업력에 경의를 표시했다.

이제 사업권 인수와 2028년까지 투입될 프로젝트 비용 마련을 위해 금융을 일으킬 차례다. 원전 수출은 능력이 되는 나라라면 무조건 추구하는 국가 과제다. 전문가들끼리 하는 얘기지만 원전은 원가를 공개할 수 없을 만큼 고수익 수출 산업이다. 게다가 원전 원조국인 영국이 승인하는 순간 국가 신인도는 세계 최상급이 된다. 수십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600조원에 이르는 해외 시장을 석권할 기회의 창이 한국 앞에 열린 것이다.

그런데도 청와대와 산업자원부의 반응은 떨떠름하다. “손해날 것 같으면 안 한다” “적자가 예상되면 사업을 추진할 근거를 잃게 된다”는 식의 반신반의, 애매한 말들이 계속 흘러나온다. 이들은 일본 도시바가 무어사이드 사업권을 포기한 데 대해 “우리가 부실 폭탄을 대신 떠안았다”는 집권세력 주류 인사들의 궤변에 더 신경을 쓰는 것 같다. 이런 궤변은 도시바의 웨스팅하우스 원전이 가격·공기·효율·가동률, 수익 예상률 등 모든 면에서 사업 능력이 떨어진다는 세계 원전업계의 오래된 상식을 외면하고 있다.

정부의 머뭇거리는 표정을 보면 원전 금융을 주도해야 할 국책은행 수출입은행이 얼마나 정성을 쏟아줄지도 의문이다. 수은(輸銀)은 그렇지 않아도 좀비화된 조선회사들을 구원하겠다며 엄청난 돈을 쏟아부어 기진맥진 상태다. 수은한테 원전 수출에 집중하라고 총대를 메고 나설 청와대나 정부 사람들이 딱히 안 보이는 것이 불길하다. 그렇다면 국회라도 소매를 걷어붙여 한전, 한수원의 원전 수출 전쟁을 도울 일이다. 가칭 ‘한국형 원전 수출 지원 특별법’이라도 만들 필요가 없는지 챙겨 보길 바란다.

사지(死地)에서 살아 돌아온 원전 수출의 영웅들에게 문재인 정부가 축배 한 잔쯤은 따라줄 줄 알았다. 현실은 반대였다. 한전의 조환익 사장은 영국 정부가 원전 수출 우선협상대상자 발표를 한 날 임기를 3개월 남긴 채 사퇴 선언을 해야 했다. 수주 현장을 지키느라 어머니 임종도 못했다는 조 사장인데, 그가 “이제 지쳤다”고 했다면 일주일 휴가라도 다녀오게 한 뒤 경질하는 예의쯤은 차려줘야 하지 않았을까. 비슷한 시점에 한수원의 이관섭 사장은 사무실과 집을 압수수색당하고 검찰 조사를 받았다. 산업부 차관 출신인 이 사장은 3년 임기 중 겨우 1년이 지났을 뿐이다. 아무리 하루빨리 자리를 내놓으라고 캠프 사람들이 빚쟁이처럼 아우성친다 한들 국가의 자산인 원전 비즈니스의 베테랑들을 저렇게 죄인 다루듯 모욕해도 되는지 이 정부의 낯두꺼운 행동이 그저 놀랍고 두려울 뿐이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