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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난 돌봄에…올 신학기만 초등생 엄마 1만5000명 퇴직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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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학교 수업을 마치고 혼자 하교하는 초등학생. 맞벌이 부모는 수업이 끝난 후 아이를 믿고 맡길 곳이 없어 고민한다. 정종훈 기자

학교 수업을 마치고 혼자 하교하는 초등학생. 맞벌이 부모는 수업이 끝난 후 아이를 믿고 맡길 곳이 없어 고민한다. 정종훈 기자

9살ㆍ7살 두 딸을 둔 정 모(38ㆍ경기 과천시) 씨는 지난 3월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됐다. 14년간 다니던 은행을 제 발로 나온 것이다. 지난해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는 육아휴직을 쓰며 버텼다. 하지만 내년 둘째 입학을 앞두고 고심한 끝에 퇴사 결정을 했다. 그는 “지금까지의 경력이 아깝긴 하지만 늦은 퇴근 시간까지 아이들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회사를 나왔다. 아직 어린아이들을 학원에 돌리고 싶진 않다”고 말했다.

최근 5년 퇴사자, 한 해 평균 8000명 수준 #맞벌이 가구 아이들 '학원 뺑뺑이' 내몰려 #학부모들 "방과후 수업 공교육화하자" #교육계선 "정규 수업 부실해져" 반대

 정 씨처럼 초등 저학년 자녀를 돌보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는 엄마들이 1만500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열악한 방과 후 돌봄제도가 젊은 엄마들을 경단녀(경력단절여성)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방과 후 수업을 강화하거나 초등학교 수업 시수를 늘리자는 주장이 나온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10일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초등학교 1~3학년 자녀를 둔 20~40대 직장 여성 1만5841명이 올해 신학기 전후(2~3월)로 회사를 그만두고 남편ㆍ가족의 건강보험 피부양자로 얹힌 것으로 집계됐다. 상당수가 초등생 자녀를 돌보기 위해 직장을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2013~2017년 연평균 8268명이 이 시기 직장을 그만뒀다.

 오후 2~6시는 엄마들에게는 ‘공포의 시간’이다. 지난해 여성가족부 가족실태조사에 따르면 오후 2~4시 돌봄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35.1%, 오후 4~6시는 32.5%였다. 올해 4월 지역별 고용조사(통계청)에서 7~12세 아이를 둔 경단녀가 지난해 4월보다 2000명이 늘었다. 6세 이하, 13~17세 자녀를 둔 경단녀는 줄었다.

초등학생 하교 시간에 맞춰 아이들을 태워가기 위해 학교 근처에 줄지어 선 노란색 학원차들. 정종훈 기자

초등학생 하교 시간에 맞춰 아이들을 태워가기 위해 학교 근처에 줄지어 선 노란색 학원차들. 정종훈 기자

 맞벌이 가정 아이들은 ‘학원 뺑뺑이’를 하느라 더 힘들다. 4일 오후 1시쯤 서울 양천구 서정초등학교에서 나오던 2학년 이 모(9)양은 곧바로 피아노 학원에 간다고 했다. 매주 영어ㆍ피아노ㆍ컴퓨터ㆍ미술ㆍ수영 등 5곳의 학원에 다닌다. 이양은 “학원을 마치면 오후 5시 30분 정도인데 엄마ㆍ아빠는 회사에서 7시는 넘어야 집에 오세요”라며 “반 친구들도 저랑 비슷해요. 학원 가기 싫다고 막 그래요”라고 말했다.

 최근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에는 ‘돌봄 교실 확대’ 등을 요청하는 글이 꾸준히 올라오고 있다. 한 청원인은 “시댁ㆍ친정에 의지할 수 없는 생계형 맞벌이 부부는 학원 뺑뺑이를 돌릴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다른 글에서는 “사교육비 지출이 큰 부담이 되면 맞벌이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방학은 부모에게 더 힘든 시간이다. 겨울방학이 다가오자 한 온라인 여성 커뮤니티에선 “아이를 어디에 어떻게 맡기나” “한 달이라도 휴직하는 게 나을까”라는 고민이 줄을 잇는다.

수업을 마치고 보호자와 하교하는 초등학생들. 직장에 다니는 학부모들은 "퇴근 시간까지 학교에서 아이를 맡아주면 좋겠다"고 말한다. 정종훈 기자

수업을 마치고 보호자와 하교하는 초등학생들. 직장에 다니는 학부모들은 "퇴근 시간까지 학교에서 아이를 맡아주면 좋겠다"고 말한다. 정종훈 기자

보건복지부는 지난 8월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초등학생 돌봄 지원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지난달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초등 학부모 86명과 토론회를 열었더니 저출산 해소 대책으로 ‘학교의 역할이 커져야 한다’는 요청이 많았다. 특히 정규 수업 연장(90%), 방과 후 프로그램 강화(99%)가 많은 지지를 받았다.

 7일 서울 관악구 구암초등학교에서 만난 한 여성은 회사에 다니는 언니 대신 5학년ㆍ1학년 조카를 데리러 나왔다. 그는 “오후 7시까지만 학교에서 맡아주면 직장인 엄마들도 퇴근하면서 아이를 데려갈 수 있고, 오후에 따로 학원 뺑뺑이를 안 돌아도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엄마 손을 잡고 육교를 올라가는 초등학생과 그 밑에서 혼자 집으로 가는 초등학생의 모습. [연합뉴스]

엄마 손을 잡고 육교를 올라가는 초등학생과 그 밑에서 혼자 집으로 가는 초등학생의 모습. [연합뉴스]

 홍승아 여성정책연구원 가족ㆍ평등사회연구실장은 “초등 저학년이 정오~오후 1시에 하교하는 것은 집에 누군가 있다는 걸 전제로 하는 것이다. 학교 운영 시간도 가족 구조 변화, 여성 취업 증가에 맞춰서 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일부 학부모는 방과 후 수업의 질이 학원보다 떨어진다고 지적한다. 서울 성동구 방 모 씨는 “방과 후 학교는 너무 시끄럽고 산만해 제대로 교육을 받기 어렵다. 내년에는 아이(초등1)를 학원에만 보낼 생각”이라고 말한다. 정규 수업을 늘리되 교과수업 대신 현행 방과 후 수업을 공교육화하자는 것이다.

 반면 교육계는 반대한다. 김희규 신라대 교육학과 교수는 “초등 교사가 방과 후 수업에 참여하면 형식적으로 이뤄질 가능성이 크고, 업무 강도 증가로 정규 수업도 부실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구멍난 초등 돌봄 어떻게...

 이재희 육아정책연구소 부연구위원은 “방과 후 수업ㆍ돌봄 교실 등의 제도가 있지만, 서비스 공급이 적어 이용 학생이 적다. 이를 해결해야 초등학교 저학년 방과 후 돌봄 문제를 풀 수 있다”고 말했다.
 정종훈ㆍ김선영 기자 sakeh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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