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③대법관 문턱서 네 번 걸린 김선수 “노동의 눈으로 법 보는 이도 필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2015년 11월 9일 서울고법은 조선호텔이 객실팀 등에서 일해 온 김모씨 등 8명의 일자리를 빼앗은 정리해고가 무효라고 판결했다. “무효”(서울지방노동위원회)-“유효”(중앙노동위원회)-“무효”(서울중앙지법)-“유효”(서울고법)-“무효”(대법원)에 이어 내려진 이 판결로 김씨 등은 4년 여 만에 일자리를 되찾았다.

2회 연속 추천위 통과, 제청은 안돼 #"민망하지만 추천 뜻 알기에 기다려" #"민법 눈으로 노·사 관계 봐선 안돼" #"단순파업 업무방해라는 판례 바꿔야"

김선수(56ㆍ사법연수원 17기) 변호사는 그 날을 30년 변호사 생활 중 가장 기뻤던 순간으로 꼽았다. “우리 사회에서 해고된 노동자가 4~5년 동안 법정 투쟁을 벌이는 것에는 초인적인 용기와 희생이 요구됩니다. 상고 여부를 두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는 모습을 지켜보았기에 기억에 남습니다.”

김 변호사는 '대한민국 대표 노동변호사'다. 27회 사법시험에 수석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1988년에 곧바로 고(故) 조영래 변호사의 남대문합동법률사무소에 합류했다. 이후 줄곧 ‘노동자를 위한 변론’ 의 길을 걸어왔다. 그는 2015년부터 네 번 연속으로 대한변호사협회가 추천한 대법관 후보였고 그중 최근 두 번은 대법관추천위원회의 3배 수 추천을 받았다. 신임 대법관 임명 제청 하루 전인 지난달 27일 찾은 김 변호사의 사무실(법무법인 시민) 책상 위에는 서울대 한인섭 교수가 쓴 책 『가인 김병로』가 있었다.

“이번에도 쉽진 않을 겁니다.” 그의 전망은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 후 법원 안팎에 떠도는 “김선수는 상수”라는 소문과는 달랐다. 그의 예상대로 지난달 28일 김 대법원장은 고위 법관 2명을 신임 대법관으로 임명 제청했다. 그는 또 후보에서 그쳤다.

지난달 27일 만난 김선수 변호사는 대법관이나 헌법재판관 제청 때가 되면 극도로 말을 아끼는 다른 단골 후보자들과는 달랐다. 그는 "대법원 구성 다원화는 '가치 다원화'여야 한다"고 말했다. 신인섭 기자

지난달 27일 만난 김선수 변호사는 대법관이나 헌법재판관 제청 때가 되면 극도로 말을 아끼는 다른 단골 후보자들과는 달랐다. 그는 "대법원 구성 다원화는 '가치 다원화'여야 한다"고 말했다. 신인섭 기자

안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 알면서 번번이 인사용 신원조회에 동의하는 이유가 뭔가요.

"추천해 주시는 분들에게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의견이 대법원에서 토론될 수 있게 해달라는 여망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대법원은 고위 법관 출신들로 구성된 획일적 공간이었으니까요. 번번이 제청 받지 못해 자리 탐으로 보일까 걱정되지만 추천하신 분들의 기대를 외면하는 것도 도리가 아닌 것 같아 고민이네요. 다음에는 동의하지 말아야 하나…."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엔 ‘김선수만은 안 된다’는 인식이 법원 내에 많았습니다.

"글쎄요. 한 두 명 달라진다고 합의제인 대법원 판결에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아닐텐데요. 대법원 구성에 균열이 올 수 있다고 본 게 아닐까요. 일본은 15명의 최고재판소 재판관 중 4명을 일본변호사연합회 추천을 받아 임명하는데도 실질적 가치 다원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을 받습니다. 우리 대법원에 노동자의 눈으로 법을 보는 대법관도 한 명쯤 필요하지 않을까요."

고위 법관 중에도 진보적 인사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동안 법원행정처 출신들이 대법관 자리를 독점해 왔지요. 새 대법원장은 행정 경험이 없는 ‘순수 법관’ 중심으로 바꿔가는 중인 듯합니다. 하지만 법대 밑의 세상은 법대 위에서 본 세상과는 많이 다르다고 하지 않나요. 고위 법관들은 대부분 사법연수원 수료 뒤 바로 법관이 되고 쭉 기록을 통해 세상을 보아 온 분들이지요. 어떤 구체적 사건을 입체적으로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대법관 추천위 심사와 제청 과정을 잘 아는 한 법조계 인사는 "도덕성에서는 아무런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다. 솔직히 김 변호사가 제청되지 않은 건 이념적 이유 때문이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의 어떤 내용이 대법원을 그토록 걱정케 했을까. 답을 찾는데 오래 걸리진 않았다.

대법원이 노동을 보는 관점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보나요

"시민법은 대등한 당사자가 자유로운 의사에 따른 맺은 계약을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는 사적 자치 원칙이나 계약 자유의 원칙을 뼈대로 합니다. 민법의 관점에서 실질적으로 대등하지 않은 노동자-사용자 관계를 판단하면 노동자의 진실한 의사가 재판에 반영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등장한 게 노동법입니다. 그러나 대법원 판결에는 아직 민법의 관점이 강하게 작동합니다. 민법의 일반원리인 신의칙을 동원해 강행규정 위반이라 효력이 없는 노사합의(상여금 등을 통상임금에서 배제한다는 합의)를 유효라고 본 게 대표적이지요. 최근 산별노조 관련 판결에선 ‘노동조합법은 간 데 없고, 헌법과 민법의 이론만 난무한다’는 개탄(지난해 2월 “산별노조 지회도 기업별 노조로 전환할 수 있다”고 한 판결에서 김신 대법관이 낸 소수의견)도 나오지 않았습니까."

대법관이 되면 전원합의체에서 다뤄보고 싶은 것 한 가지를 꼽는다면요

"단순 파업 참가자들에게 여전히 업무방해죄를 인정하는 판례는 바뀔 때가 됐습니다. 2011년 전원합의체 판결로 업무방해죄 인정 요건이 까다로워지긴 했지만 법리적으로는 "단순히 근로 제공을 거부하는 행위는 업무방해죄를 구성할 수 없다"고 본 소수의견이 국제 기준에 맞는 방향이죠."

이념적 성향이 공정한 재판에 장애가 되진 않겠습니까

"그래도 '프로' 아닙니까. 일방적으로 누군가를 대변할 때와 양쪽의 입장을 다 듣고 판단할 때 요구되는 역할이 다르다는 것은 기본 전제지요. 하지만 한편에서는 분명히 사회적 약자의 관점을 대법원에 가서 열심히 주장하라는 요구가 있습니다. 두 부분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 대법관이 되면 제 과제겠지요. '좌파냐 우파냐'라는 구분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법치·인권·정의·법치라는 가치에 대한 인식이 다를 순 있겠지요."

민변 회장 시절인 2011년 『검찰을 생각한다』출간 기념 'The 위대한 검찰' 토크 콘서트에서 패널로 참석한 김선수 변호사(맨 오른쪽). 왼쪽부터 조국 민정수석, 김인회 인하대 교수, 문재인 대통령. [연합뉴스]

민변 회장 시절인 2011년 『검찰을 생각한다』출간 기념 'The 위대한 검찰' 토크 콘서트에서 패널로 참석한 김선수 변호사(맨 오른쪽). 왼쪽부터 조국 민정수석, 김인회 인하대 교수, 문재인 대통령. [연합뉴스]

'2005~2006년 노무현 정부 사법개혁비서관' 경력은 30년째인 김 변호사의 법조 인생 중 유일한 외도였다. 사법개혁추진위원회(위원장 한승헌)를 이끄는 실무 책임자 역할이었다. 법학전문대학원과 국민참여재판 도입, 공판중심주의 강화 등이 그때 이뤄졌다. 문재인 대통령이 민정수석이던 시절이다. 한때 "사법개혁은 김선수가 다 한다"는 소릴 들었던 그와 '코드'가 겹치는 문 대통령과의 인연이 궁금했다. '기대'와 달리 김 변호사는 이렇다할 친분은 없다고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과 사적 인연이 있나요

"노 전 대통령은 민변의 창립멤버이고, 문 대통령은 민변 노동위원회에 함께 속해 있었죠. 하지만 친분이 두텁다고 할 정도는 못됩니다. 두 분 다 활동의 근거지가 부산이어서 부산에서 행사를 하면 보게 되는 정도였지요. 초기에 부산지역은 '부산 민변'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적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사법개혁비서관 시절에 문 대통령이 민정수석 아니었나요

"특히 사법개혁비서관은 노동계 추천으로 2003년부터 진행된 대법원 산하 사법개혁위원회에 참여해 한 논의의 결실을 보고 싶어서 맡은 한시직이었죠. 사법부ㆍ검찰ㆍ학계에서 온 구성원들과 매일 토론하며 입법안을 내고 국회를 설득하는 일이었죠. 다른 비서관들의 정무적 역할과는 달랐어요. 전문적 업무여서 민정수석 등에게 일일이 지시를 받거나 보고하면서 일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김 변호사가 존재를 가장 대중적으로 알린 계기는 2014년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이었다. 법조계 일각에선 그 이력을 대법관으로서 최대 결격 사유라고 주장한다. '민족'이나 '통일'이 아닌 '노동'에 방점을 찍고 살아온 김 변호사의 인생을 생각하면 역설이다.

통진당 측 변호인단장이었습니다

"그 즈음 통진당 당권파와 갈등을 겪다 정의당에 합류한 조준호씨가 통진당과의 손해배상사건 대리를 의뢰했다가 철회했어요. 사건을 맡았다면 이해충돌 때문에 정당 해산은 못 맡았겠지요. 통진당이 왜 저를 선택했는지 모르지만,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의 수준이나 포용성을 볼 때 정당 해산까지 갈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특별히 거절할 이유도 없더군요. 진행 중이던 이석기씨에 대한 형사 절차로 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선고 직전까지 9:0 기각을 기대했다던데요

"'9:0'이라고 하면 너무 예측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 것 같고…. 헌재가 기관의 위상을 생각해서라도 인용할 수 없다고 봤어요. 헌재 소장은 조직 보호의 관점에서, 야당 추천을 받았던 김이수 재판관은 당연히 기각 입장일 거라 생각했고…. 정당의 존재 가치는 국민이 선거로 심판한다는 게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적 작동 원리인데 강제 해산은 국민의 수준을 못 믿는다는 의미밖에 더 되나요. 그나마 김 재판관의 소수의견이 헌재의 체면을 살렸지요."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공수처 설치, 징벌적 배상제 도입 등 사법개혁의 큰 그림은 이미 노무현 정부 시절 나왔다. 당시 아이디어들이 구체화하는 일을 맡았던 그에게 문재인 정부의 사법개혁이 어떻게 보이는지 궁금했다. “잘 돼야 될텐데…”라던 김 변호사는 잠시 생각에 잠긴 뒤 말을 이었다.

형사공공변호인제를 주요 국정과제라고 했지만 그 뒤로 들리는 소식이 없습니다. 피의자 인권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면서 검경 개혁의 효과를 끌어낼 수 있는 의제지요. 기관별 개혁위원회에서 논의되는 검찰ㆍ경찰ㆍ국정원 등 권력 기관 개혁 논의를 조정하고 추진할 컨트롤 타워가 필요합니다.”

임장혁 기자ㆍ변호사 im.janghyuk@joongang.co.kr

관련기사

김선수는 누구

민변 회장 시절 정기대의원대회 사회를 보는 김선수 변호사. [사진 김선수 변호사]

민변 회장 시절 정기대의원대회 사회를 보는 김선수 변호사. [사진 김선수 변호사]

김선수 변호사는 전북 진안군 동향면 능길리에서 태어나 초등학교까지 이곳에서 자랐다. 중학교 1학년때 전학해 서울 우신고를 졸업했다. 1979년 서울대 법대에 진학해 ‘고전연구회’라는 써클에 들면서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1981년 유인물을 배포하다 체포돼 4일간 구금된 뒤 풀려나온 뒤 강제 징집됐다. 제대 후 김 변호사는 ‘노동변호사’를 목표로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김 변호사를 잘 아는 동료들은 그를 “지나치게 진지한 사람” “재미라곤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김 변호사는 27회 사법시험에 수석 합격한 뒤 한 고시잡지에 기고한 합격기를 “사법시험이란 것은 결국 법조인 선발을 위한 자격시험이다.…(중략) 구체적인 한국사회에 있어서 법조인의 위치와 역할은 무엇이며, 또 법조인의 현실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끝맺었다.
1988년 사법연수원 수료 이후 고(故) 조영래 변호사의 남대문합동법률사무소에 합류해 1990년 조 변호사가 서거할 때까지 함께 일했다. 남대문합동법률사무소는 ‘시민공익법률상담소’를 부설 운영하며 환경ㆍ노동ㆍ여성 등 다양한 분야의 공익소송을 개발했다. 조 변호사가 소송을 통해 다양한 정치적 메시지를 생산해 냈다면 김 변호사는 이때부터 ‘노동자를 위한 변론’ 외길을 걸었다. 김 변호사는 그간의 주요 변론 사례를 정리한 저서 『노동을 변호하다』에 이렇게 썼다. “지식인은 자신의 전문지식을 노동자들을 위해 써야 하며, 법조인은 전문적인 법률지식으로 노동자들의 활동을 지원해야 한다. 나는 이러한 생각으로 노동법을 공부하게 되었다.”

 남대문합동법률사무소의 1988년 야유회 목습. 가운데 조영래 변호사(왼쪽)와 김선수 변호사(오른쪽)가 보인다. [사진 김선수 변호사]

남대문합동법률사무소의 1988년 야유회 목습. 가운데 조영래 변호사(왼쪽)와 김선수 변호사(오른쪽)가 보인다. [사진 김선수 변호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