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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만의 인간혁명]진나라 vs 로마제국, 누가 이겼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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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는 전국시대 나라 중 기병을 활용한 전술이 가장 발달했다. 로마군단은 단검과 긴 창, 방패를 쓰는 보병이 강했다. [EBS 다큐] [게임 토탈워]

진나라는 전국시대 나라 중 기병을 활용한 전술이 가장 발달했다. 로마군단은 단검과 긴 창, 방패를 쓰는 보병이 강했다. [EBS 다큐] [게임 토탈워]

2500년 전 동서양 문화엔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을까요? ‘인간혁명’은 지난 두 차례에 걸쳐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했습니다. 왜 하필이면 같은 시기에 세계 4대 성인인 소크라테스와 공자, 석가모니가 함께 활동을 했고, 또 동시에 정신문화의 꽃을 화려하게 피웠는지 말이죠.

BC 5세기 동서양이 함께 피운 인문의 꽃 #폴리스와 소피스트, 춘추시대의 제자백가 #'철기 보급'과 '문자 확산'이 인문발달 촉진 #동서양 동시에 진(秦)나라와 로마제국 등장 #자객 형가의 진시황 암살 시도, 전쟁 촉매 #문화다양성의 로마, 분서갱유 일으킨 진(秦) #AI 등 4차 혁명으로 ‘기술제국’ 앞둔 시대 #관용과 개방, 다문화 정신이 미래문명 핵심

 먼저 그리스에선 BC 5세기 도시국가(폴리스)의 발달과 소피스트의 등장으로 인문의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200여개의 폴리스가 선의의 경쟁을 통해 서로를 발전시키면서 생산력이 급증하고 ‘시민’이란 계급이 나타났죠. 시민은 인류 역사 최초로 직접민주주의를 실행하면서 문명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런 시민을 키우는 소피스트의 등장은 학문과 사상의 다양성이 꽃을 피우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같은 시기 중국에선 춘추전국시대가 펼쳐졌습니다. 농업혁신으로 물질적 풍요를 누리면서 기존에 없던 새로운 계층이 생겨났죠. 바로 ‘사(士)’의 등장입니다. 중국 역사에 처음으로 나타난 ‘지식인’ 집단으로 제후의 통치를 돕기도 하고 귀족 자제들의 선생이 되기도 했습니다. 바로 ‘제자백가’입니다. 유가, 법가, 도가 등 동아시아 철학과 사상의 원류가 이 때 모두 형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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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처럼 동서양 모두 같은 시기에 소피스트와 ‘사(士)’ 같은 지식인 계층이 등장할 수 있던 건 당시 일어난 기술혁신 때문입니다. 농사에서 철제 농기구가 확산되고 ‘우경(牛耕·소를 농사에 이용하는 것)’이 시작된 거였죠. 이전 시대의 청동기로는 불가능했던 농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생산력이 급증하고 단순히 ‘먹고 사는 것’을 넘어 세계의 근원과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활동이 활발히 이뤄졌습니다.

사진을 클릭하시면 윤석만의 인간혁명 홈페이지로 이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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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동서양은 또 다시 비슷한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바로 제국의 등장입니다. 동양에선 진(秦)나라가, 서양에선 로마제국이 출현합니다. 150~200개의 작은 나라들이 경쟁을 하던 시대가 끝나고 하나의 거대 왕조가 들어선 것이죠.

 오늘 ‘인간혁명’은 같은 시대에 서로 다른 지역에서 제국을 이뤘던 두 나라 진(秦)과 로마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려 합니다. 두 제국은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지, 만일 두 문명이 충돌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지난 역사 속으로 상상의 여행을 함께 떠나보시죠.

십보일살(十步一殺)의 협객, 진왕을 노리다

 사마천(司馬遷, BC 145년 ~ 86년)이 지은 ‘사기(史記)’에는 ‘자객열전’이 나옵니다. 사마천은 20세 때부터 중국 전역을 돌며 자료를 수집하고 태사령이 돼 국가의 장서를 섭렵했죠. 그는 황제와 제후의 이야기뿐 아니라 이들을 암살하려 했던 자객의 이야기까지 따로 묶었습니다. 그중 으뜸은 진시황을 죽이려 했던 형가(荊軻, 미상 ~ BC 227년)의 이야기죠.

사마천 사기의 '자객열전' 86권에는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형가의 이야기가 자세히 소개돼 있다. [네이버]

사마천 사기의 '자객열전' 86권에는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형가의 이야기가 자세히 소개돼 있다. [네이버]

 형가는 전국시대 말기 위(衛)나라 사람입니다. 진(秦)이 위(衛)를 멸하면서 연(燕)나라에 가서 살았습니다. 원래 무예에 출중했으나 나라 잃은 설움을 표현할 길 없던 그는 매일같이 술독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에겐 고점리(高漸離)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축(筑, 현악기의 일종)’을 잘 다루는 예술인이었습니다.

 형가는 객잔에서 술을 마시고 취하기 일쑤였습니다. 그 때마다 고점리가 켜는 축의 선율에 맞춰 저잣거리 한 복판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습니다. 자신의 조국을 멸한 진(秦)을 비판하며 어지러운 시대를 한탄했죠. 이런 그의 행동은 마치 자기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펼쳐졌습니다. 훗날 형가의 이런 모습은 ‘방약무인(傍若無人)’이란 고사로 남게 됐습니다.

형가를 모티브로 한 영화 '영웅'. 장이머우 감독이 연출하고 리롄제(李連傑, 이연걸)이 형가를 소재로 한 캐릭터 '무명' 역할을 맡았다. [영화 영웅]

형가를 모티브로 한 영화 '영웅'. 장이머우 감독이 연출하고 리롄제(李連傑, 이연걸)이 형가를 소재로 한 캐릭터 '무명' 역할을 맡았다. [영화 영웅]

 하지만 그는 무예와 음주가무 못지않게 학문이 깊었습니다. 연(燕)의 내로라하는 현인과 호걸이 그를 찾았죠. 그러던 어느 날 형가는 연(燕)의 왕으로부터 진(秦)의 왕 영정을 죽여 달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당시 진(秦)은 천하를 통일하기 직전이었고 진왕 영정은 아직 시황제로 등극하기 전이었습니다.

 형가를 모티브로 한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 ‘영웅’에 나오는 것처럼 형가는 무림의 고수였습니다. 영화에선 이를 ‘십보일살(十步一殺)’이라고 표현했죠. 열 걸음 앞에만 있으면 누구든 한 번에 죽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형가는 천하를 피로 물들이는 진왕을 암살하기 위해 그와 교분이 두텁던 협객(俠客)들과 머리를 맞댑니다. 형가는 진왕을 죽이고 그 또한 그 자리에서 목숨을 끊겠다고 결의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궁중의 무수한 호위무사를 뚫고 진왕에게 다가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마침 진왕은 과거 진(秦)의 장군이었던 번어기의 목을 가져온 사람에겐 십보(十步) 안에서 자신과 알현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했습니다. 형가는 번어기를 찾아가 자신의 뜻을 설명했고, 번어기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목을 쳐 형가에게 바칩니다.

 형가는 번어기의 목을 들고 진왕을 찾아갑니다. 크게 기뻐한 진왕은 온갖 환대를 하며 형가를 반깁니다. 진왕의 앞에 다가선 형가는 숨겨온 비수를 꺼내 진왕을 찌르려 하지만 실패로 돌아갑니다. 소년시절부터 전쟁에서 단련된 진왕 역시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었던 거죠. 장이머우 감독은 ‘영웅’에서 왕궁에서 벌어지는 진왕과 형가의 싸움을 특유의 영상미로 담아냈습니다. 영화에선 두 사람의 수준 높은 무예 실력이 막상막하인 걸로 나오죠.

 그러나 형가는 결국 무참히 살해되고 맙니다. 진노한 진왕은 죽은 형가의 시체를 참수에 처합니다. 이듬해인 BC 226년 진왕은 자신에게 자객을 보낸 연(燕)으로 쳐들어가 멸망시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형가의 암살 시도는 결국 진(秦)의 천하통일을 앞당긴 꼴이 됐습니다. 이후에도 몇 번의 암살 시도를 겪은 진왕은 갈수록 잔악하고 흉포해졌습니다.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인 전국시대 말의 7개 나라 영토. [위키백과]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인 전국시대 말의 7개 나라 영토. [위키백과]

영토와 사상까지 통일하려 했던 진(秦)

 중국 최초로 통일을 이룬 진왕은 스스로를 시황제(始皇帝)라 칭합니다. 차이나(China)라는 중국의 영문명도 이때 유래했죠. 진시황은 전국시대까지 실시됐던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도입해 중국 전역을 황제의 직할 아래 둡니다. 강력한 병권과 법가 사상을 바탕으로 엄격하게 백성을 다스렸죠. 특히 나라마다 문화와 생활 방식이 달라 분쟁과 갈등이 생겼다고 생각한 진시황은 영토 뿐 아니라 사회·경제·문화적 통일을 시도합니다.

 먼저 각 나라마다 다르게 쓰인 화폐를 모두 폐지하고 진(秦)이 만든 통일 화폐를 쓰도록 했습니다. 또 전국시대엔 각 지역마다 문자의 차이가 많았는데 진(秦)은 천하의 문자를 소전(小篆, 진시황 등극 이후 나라별로 다른 글씨체를 간소화해 만든 통일 서체)로 정하고 다른 문자는 모두 못 쓰게 했습니다. 이는 군현제 실시와 함께 중앙집권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죠.

 아울러 도량형을 통일해 상업의 발달을 촉진시킵니다. 또 수레바퀴의 크기와 폭을 규정하고 도로까지 표준화 하죠. 이 때 만들어진 진(秦)의 표준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어진 중국 왕조의 기본 체제로 자리 잡습니다. 진(秦)에 이어 유방이 세운 한(漢)나라도 사실상 진시황이 만들어 놓은 시스템을 거의 그대로 사용하게 되죠.

진나라의 군대는 말을 타고 싸우는 기병이 중심이었다. [EBS 다큐 불멸의 진시황]

진나라의 군대는 말을 타고 싸우는 기병이 중심이었다. [EBS 다큐 불멸의 진시황]

 그러나 넘치는 것은 늘 부족함만 못한 법이죠. 진시황의 통일 의지는 학문과 사상에까지 뻗칩니다. 과거 제자백가로 활동했던 선비들로부터 진(秦)의 정치·사회·문화 체제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한 거였죠. 그 때 승상을 맡고 있던 이사(李斯, 미상 ~ BC 208년)가 과격한 제안을 합니다. 바로 분서갱유(焚書坑儒)입니다.

 “봉건시대엔 제후들이 전쟁이 끊이지 않아 천하가 어지러웠지만 이제는 통일이 돼 안정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옛 책을 배운 사람들 중에 과거의 것만 옳다고 여겨 새로운 제도와 문화를 반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실생활에 필요한 의약, 농업 등에 대한 실용서적과 진(秦)의 역사서 외에는 모두 불태워 없애버리소서.”

 진시황은 이사의 제안에 따라 천하의 책들을 모아 불태워 없애 버립니다. 당시는 아직 종이가 발명되기 전이라 대나무로 만든 ‘죽간(竹簡)’에 글씨를 써 책을 만들었는데 이 때 없어진 희귀한 자료들이 매우 많았다고 합니다. 이 일을 ‘분서(焚書)’라고 부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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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듬해 진시황은 아방궁이 건립되자 불로장생을 연구하는 도인들을 불러 후하게 대접했는데 이중 몇몇이 진시황의 재물을 빼돌리고 종적을 감췄습니다. 이 일로 항간에는 진시황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죠. 그러자 진시황은 자신을 비방한 관리와 유생을 모두 잡아 산 채로 구덩이 파묻었는데, 그때 죽은 사람이 500명 가까이 됐습니다. 이를 ‘갱유(坑儒)’라고 합니다. 이처럼 진시황의 공포정치는 갈수록 심해졌고 형가처럼 그를 원수로 삼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무적군대 진나라 기병

 하지만 진시황의 힘은 막강했죠. 불사를 꿈꿨던 그는 자신을 신과 동일시하며 강력한 군사력과 중앙집권을 바탕으로 중국 전역을 통치합니다. 통일 직전까지 진(秦)의 군대는 우는 아이도 멈추게 할 만큼 무서웠습니다. 다른 6개의 나라가 범접하기 힘들만큼 용맹하고 강력했던 것입니다.

중국 최초 통일왕조인 진(秦)나라 시황제의 무덤에서 발굴된 병마용의 모습. [중앙포토]

중국 최초 통일왕조인 진(秦)나라 시황제의 무덤에서 발굴된 병마용의 모습. [중앙포토]

 진나라의 군대는 탄탄한 조직력과 엄격한 군기를 바탕으로 적군을 제압했습니다. 중국 시안의 진시황 무덤에서 발견된 실물 크기의 병마용 8000개는 당시 진(秦)이 군사국가로서 얼마나 큰 위용을 자랑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로 침략전쟁을 펼치다보니 진(秦)의 군대는 공성전(攻城戰)에 능했습니다. 상대 진영은 성을 사수하고 방어하기에 바빴습니다. 진(秦)의 군대는 1m 간격으로 병사들이 대열을 형성해 성을 에워싸고 전투를 펼칩니다. 그 덕분에 성벽을 타고 오르는데 필요한 운제(雲梯)나 성벽을 부수기 위한 충차(衝車) 같은 무기들이 발달했습니다. 운제는 구름까지 갈 만큼 높이 오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공성전에서 쓰이던 무기인 운제. 보병들이 성을 타고 오르는 무기로 진나라가 많이 썼다. [네이버]

공성전에서 쓰이던 무기인 운제. 보병들이 성을 타고 오르는 무기로 진나라가 많이 썼다. [네이버]

 활과 같은 원거리 무기도 발달합니다. 특히 병사 개인 무기인 궁과 달리 일종의 기계식 활인 ‘노(弩)’라는 무기가 많이 쓰였습니다. 진나라는 1개조별로 수십개의 활을 쏠 수 있는 ‘노(弩)’ 부대가 따로 있었죠. 영화를 보면 비가 내리듯 활을 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를 가능케 한 것이 ‘노(弩)’였습니다.

 발달한 무기와 함께 군사의 전의를 높이는 진(秦)의 군공작(軍功爵) 제도는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는 핵심 비결 중 하나였습니다. 바로 군사적 공로에 따라 작위를 주는 것이었죠. 전쟁에서 세운 공로에 따라 복식과 토지 등을 분배했고 공로가 큰 이들은 가족이 법을 어겨도 면제를 해줬습니다. 반면 군영에서 이탈하면 그 옆 사람까지 처벌하는 엄격한 기강을 설립해 서로를 견제하게 했죠.

 또 진(秦) 뿐 아니라 전국시대의 모든 나라들은 잦은 전쟁을 겪어야 했기에 각종 병법서가 발달했습니다. 오기의 ‘오자(吳子)’, 손빈의 ‘손자(孫子)’, ‘사마양저’의 ‘사마법(司馬法)’ 같은 전문서적이 많이 간행됐죠. 넓은 평야에 모여 백병전투를 벌이는 싸움뿐만 아니라 기상천외한 전술과 전략을 다루면서 전쟁의 양상이 달라지게 됐죠.

한번에 수십개의 화살을 발사할 수 있는 기계식 활인 ‘노(弩)’. 진나라의 주력무기 중 하나로 영화와 드라마 등에서 노를 사용해 비오듯 활을 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영화 영웅]

한번에 수십개의 화살을 발사할 수 있는 기계식 활인 ‘노(弩)’. 진나라의 주력무기 중 하나로 영화와 드라마 등에서 노를 사용해 비오듯 활을 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영화 영웅]

진나라와 로마제국이 맞붙는다면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상상을 해봅니다. 만일 비슷한 시기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했던 로마와 진(秦)이 맞붙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말이죠. 도시국가로 시작한 로마는 BC 2세기 영토를 대폭 넓히며 제국의 기틀을 다집니다. 특히 그 유명한 카르타고의 한니발과 맞서 싸운 포에니 전쟁을 통해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게 되죠.

 특히 율리우스 카이사르(BC 100년 ~ 44년) 같은 걸출한 영웅들이 출현하면서 ‘팍스 로마나’를 일굽니다. 로마의 영토는 북쪽으로는 현재 영국 영토의 중북부까지, 유럽 대륙에서는 라인강을 시작으로 북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국경선을 긋습니다. 동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 인근까지 뻗어가며 남쪽으로는 이집트와 리비아 등 북부 아프리카에 이릅니다. 서쪽에는 오늘날 스페인이 있는 이베리아 반도를 로마제국에 편입하면서 ‘팍스 로마나’를 이룹니다.

포에니 전쟁 이전과 이후의 로마제국 영토. [두산백과]

포에니 전쟁 이전과 이후의 로마제국 영토. [두산백과]

 로마가 이처럼 거대 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던 건 ‘로마군단(Legion)’이라고 불리는 무적의 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군단의 규모는 적게는 3000~4000명에서 많게는 6000~7000명까지 다양했습니다. 로마제국 전성기에는 이런 군단이 수십개가 존재했죠. 각각의 군단은 중무장을 한 보병이 군단의 주축을 이뤘고 기병이 이를 지원했습니다.

 중장보병이 주로 사용하는 무기는 길이가 50cm 정도 되는 단검인 ‘글라디우스’였습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주인공인 러셀 크로우가 사용하던 무기입니다. 단검과 함께 자주 쓰던 무기는 스피어라는 길이가 긴 창이었습니다. 군단은 긴 창과 몸 전체를 덮을 수 있는 큰 방패로 전쟁에 나섰습니다.

로마제국의 보병들이 사용했던 무기. 왼손에는 자신의 몸 전체를 가릴 수 있는 큰 방패를, 오른손에는 길이가 짧은 글라디우스 단검을 들고 있다. [(CC)MatthiasKabel at Wikipedia.org]

로마제국의 보병들이 사용했던 무기. 왼손에는 자신의 몸 전체를 가릴 수 있는 큰 방패를, 오른손에는 길이가 짧은 글라디우스 단검을 들고 있다. [(CC)MatthiasKabel at Wikipedia.org]

 전장에서 병사들은 마치 오늘날 전경들이 진압작전을 하듯 방패로 빈틈없이 대열을 짜고 그 사이 좁은 틈으로 창을 내밀어 공격했습니다. 수백 수천명의 병사들은 지휘관의 지시에 맞춰 마치 하나의 유기체라도 된 것처럼 조직적으로 움직였습니다. 이 같은 강력한 군대가 뒷받침이 됐기 때문에 로마는 거대한 제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죠.

 그렇다면 동양과 서양에서 각자 패권의 자리를 쥐고 있던 진나라와 로마제국이 전쟁을 벌였다면 어땠을까요?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하지만, 이는 매우 흥미로운 질문이기도 합니다. 만일 이들이 함께 했던 시대, 즉 BC 3세기를 전후로 두 나라가 전쟁을 벌였다면 진나라가 좀 더 우세했을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사병들의 용맹함과 전투 기술만의 차이가 아니라, 싸우는 방식에서 두 나라는 매우 달랐기 때문입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진나라는 전장에서 기병이 중심이었고 각종 공성 무기와 원거리 무기가 발달해 있었습니다. 로마제국 역시 기병과 활을 쓰긴 했지만 군단의 핵심은 보병이었죠.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보병이 글라디우스와 스피어를 들고 싸우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진나라의 군대도 보병의 숫자가 훨씬 많았지만 실제 싸움의 주축은 말을 탄 기병이었습니다. 춘추전국시대와 진나라, 그리고 진나라 말기를 다룬 초한지 등의 영화를 보면 말을 타고 전장을 휘저으며 싸움을 벌이는 장수들의 모습이 많이 나옵니다.

 또 수백년간 전쟁이 계속되면서 각종 병법서가 활개를 치고 다양한 전술이 사용된 점도 진나라가 군대가 유리할 수 있는 장점이 될 겁니다. 한 가지를 더 고려한다면 진나라가 있던 시절엔 로마제국은 이제 막 제국의 기틀을 다지던 때였다는 것이죠. 로마의 전성기는 중국으로 치면 한나라 시대인 기원후 1~3세기입니다.

글라디우스 단검과 방패를 들고 싸우고 있는 검투사의 모습. [영화 글래디에이터]

글라디우스 단검과 방패를 들고 싸우고 있는 검투사의 모습. [영화 글래디에이터]

권력이 아닌 문화의 힘

 이처럼 군사적 측면에선 진나라가 로마제국을 이겼을 겁니다. 하지만 진나라는 진시황으로부터 불과 3대에 이르러 멸망했고 로마는 1000년을 번영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때문일까요? 국제평화연구소를 설립한 노르웨이의 석학 요한 갈퉁(Johan Galtung)은 그의 책 ‘제국주의의 구조(The Sturcture of Imperialism)’에서 제국의 3가지 조건으로 군사력과 경제력, 문화력을 꼽고 있습니다. “피지배민들의 마음을 얻어야만 진정한 제국이 완성된다”는 설명이죠.

 이런 측면에서 진나라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췄지만 세 번째 요소인 문화력을 갖지 못했죠. 진나라는 8000개의 병마용이 있는 불가사의한 진시황릉을 조성하고 북방에 만리장성을 쌓을 만큼 엄청난 경제력을 지녔습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역대 최강의 군대 또한 갖고 있던 진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진나라엔 문화력이 없었습니다. 분서갱유로 대표되는 사상과 학문의 탄압이 피지배민들로 하여금 원한과 분노의 마음을 강하게 키웠습니다. 개방적이지 못하고 관용을 베풀지 못하는 진나라의 정치 체제도 문화력을 키우지 못한 요인 중 하납니다.

단검인 글라디우스를 들고 출전하는 로마군단. [게임 토탈워]

단검인 글라디우스를 들고 출전하는 로마군단. [게임 토탈워]

 반면 로마제국은 ‘로마군단’ 못지않게 ‘로마문화’라는 강력한 지배 도구가 있었죠. 로마가 군사력과 경제력만 있고 문화의 힘이 없었다면 1000년 역사와 ‘팍스 로마나’를 구가하지 못했을 겁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는 말처럼 오랜 세월 자신의 문화와 이민족의 문화가 결합돼 제국의 문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식민지를 건설할 때도 자국의 정치 체제를 받아들이고 충성을 맹세하면 그 지역의 생활양식과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했죠. 특히 초기 로마가 제국을 건설해 갈 때는 단순히 무력을 통한 군사적 정복 활동만을 하진 않았습니다. ‘동맹’과 ‘편입’을 통한 로마적인 정치 방식이 있었죠. 요약하자면 전쟁에선 진(秦)이 이겼을지 모르나, 문화력에선 로마의 압승입니다.

영화 토탈리콜에서 그려진 미래 사회의 모습. [영화 토탈리콜]

영화 토탈리콜에서 그려진 미래 사회의 모습. [영화 토탈리콜]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는 4차 산업혁명은 비단 과학과 산업의 발전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미래엔 기술이 곧 군사력이고 경제력입니다. 기술이 발전하더라도 이를 뒷받침하는 문화력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제 아무리 세계를 제패한 혁신기업과 패권국가라도 진나라처럼 오래가지 못할 겁니다. 즉 물질적 성장에 걸맞게 제도와 의식 같은 정신적인 성숙이 뒤따라야 한다는 거죠.

 그 중에서도 핵심은 다양성을 중시하고 개방·관용의 정신이 밑바탕 되는 문화를 키우는 일입니다. 어느 한편으로 쉽게 여론이 쏠리고 나와 다른 사람은 ‘적’으로 배척하는 문화 속에선 과거 아테네의 소피스트와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와 같은 인문의 꽃이 필 수 없습니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다양한 생각보다 하나의 주관이 강조될 때 우리는 다시 진(秦)의 분서갱유와 같은 일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윤석만 기자 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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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만 기자는

 윤 기자는 2010년부터 교육 분야를 취재했다. 특히 인성·시민 교육 및 미래와 관련한 보도에 집중했다. 앞으로는 성적과 스펙보다 협동과 배려, 공감 같은 인성역량이 핵심능력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를 주제로 ‘휴마트(humanity+smart) 씽킹’이란 책을 냈다. 유네스코가 15년마다 주최하는 세계교육포럼에서 세계시민교육 심포지엄의 기조발표자로 나서기도 했다. 중앙인성연구소 사무국장을 겸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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