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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건 넘는 '그들 리그' 흙수저, 공기업 못뚫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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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김회룡기자 aseokim@joongang.co.kr

삽화=김회룡기자 aseokim@joongang.co.kr

#2014년 한 공공기관 채용에 응시했던 A 씨는 응시자답지 않게 마음이 푸근했다. 면접위원 5인 중 3인이 자신과 같은 모임 회원이었던데다가 해당 기관의 기관장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응시와 면접은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A 씨는 아무런 문제 없이 합격했다.

공공기관 채용비리 특별대책본부, 중간조사결과 발표 #275개 공공기관서 한달 보름 만에 2234건 적발 #기관장 지시에 무자격자 선발은 비일비재 #면접 단계에서 특정인 노골적 지원 #특정인 선발 위해 ‘서류 커트라인’ 왕창 내리기도 #대책본부, 정도 심한 143건 징계, 44건은 수사의뢰키로 #문제 많은 19개 기관은 경찰까지 동원해 심층조사 #지방공공기관 및 공직 유관단체 등도 전수조사 #다만, 부정합격자 퇴출·부당탈락자 구제 당장은 어려울 듯 #

#한 공공기관은 서류전형에서 최종 선발 예정 인원의 2~5배수를 합격시키기로 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조금 뒤 30배수로 불어나더니 급기야 45배수까지 확대됐다. 알고 보니 특정 응시자가 서류전형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단 한 명을 뽑은 이 채용의 최종 승자는 역시 해당 응시자였다.

“공공기관 채용은 ‘그들만의 리그’”라는 취업준비생들의 볼멘소리가 속속 사실로 밝혀지고 있다. 감사원 감사와 국정감사 과정에서 채용 비리 실태가 무더기로 적발된 데 이어 공공기관 채용 비리 특별대책본부도 불과 한 달 보름여의 조사 만에 2000건이 넘는 문제 사례를 적발했다.

공공기관 채용비리 특별대책본부장인 김용진 기재부 2차관(왼쪽 세번째)이 8일 대책본부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 기획재정부]

공공기관 채용비리 특별대책본부장인 김용진 기재부 2차관(왼쪽 세번째)이 8일 대책본부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 기획재정부]

대책본부는 8일 중간조사결과를 발표하고 지난 10월 16일부터 11월 30일까지 275개 공공기관의 2013~2017년 채용실태를 전수조사한 결과 2234건의 문제 사례를 적발했다고 밝혔다. 위원구성 부적절(527건), 규정 미비(446건), 모집공고 위반(227건), 부당한 평가 기준(190건), 선발 인원 변경(138건) 등 유형도 다양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역시 기관장의 부정지시나 서류조작 등 채용 비리 혐의 사례들이 많았다. 대책본부에 따르면 한 기관은 공개경쟁 없이 기관장이 지인으로부터 소개받은 사람을 특별 채용했다. 이후 계약 기간 종료 시점이 다가오자 해당 인사를 내보내기는커녕 오히려 상위 직급으로 승진시켜 재임용했다. 기관장이 지인 자녀의 이력서를 인사담당자에게 전달하면서 채용토록 한 사례는 부지기수였다. 한 기관은 외국에 있는 기관장의 지인에게 채용 의사를 알리는 이메일을 송부해 응시토록 해 채용하는 친절을 베풀기도 했다.

삽화=김회룡기자 aseokim@joongang.co.kr

삽화=김회룡기자 aseokim@joongang.co.kr

점수 조작도 공공연했다. 채용업무 담당자가 특정 응시자를 면접 대상으로 선발하기 위해 경쟁자들의 경력 점수를 깎아내리는 수법으로 점수를 조작한 곳도 있었다. 면접 전형 과정에서 가점 대상자에게 가점을 부여하지 않아 불합격 처리하고, 대신 지역 유력인사의 자녀를 채용한 기관도 있었다.

‘짜고 치기’ 사례도 많았다. 한 기관의 채용 면접에서는 면접위원도 아닌 사람이 면접장에 들어와 응시자 2명 중 1명에게만 질의를 했다. 질의를 받은 응시자는 최종 합격했다. 한 기관은 내부 인사만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에게 부모의 성명, 직업, 근무처가 적시된 응시원서를 제공했다. 채용된 응시자는 기관 내 고위급 인사의 자녀였다.

채용 공고문에 명시된 전공과 무관한 자를 합격시키거나 필요서류도 제출받지 않은 채 채용 절차를 진행해 무자격자를 채용한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모집공고를 경영정보 공개시스템(알리오)에 공시하지 않고, 홈페이지에만 공고한 뒤 전직 고위직 인사가 추천한 특정인을 채용한 곳도 적발됐다.

대책본부는 2234건 중 부정지시나 서류조작 등 채용 비리에 해당한다고 판단된 143건에 대해 문책 등 징계 조치하고 그중에서도 혐의가 무거워 보이는 44건은 수사 의뢰하기로 했다.

[국정감사-강원랜드 등/20171019/국회/박종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의 강원랜드 등에 대한 국정감사가 19일 열렸다. 함승희 강원랜드 사장이 강원랜드 채용비리 의혹 관련 자료의 출처 문제로 공방을 벌이는 여야 의원들을 지켜보고 있다. 박종근 기자

[국정감사-강원랜드 등/20171019/국회/박종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의 강원랜드 등에 대한 국정감사가 19일 열렸다. 함승희 강원랜드 사장이 강원랜드 채용비리 의혹 관련 자료의 출처 문제로 공방을 벌이는 여야 의원들을 지켜보고 있다. 박종근 기자

공공기관 채용 비리는 앞서 감사원 감사 과정에서 촉발됐다. 감사원은 53개 공공기관에 대해 채용업무 감사를 진행한 결과 100건의 지적사항을 적발해 이 중 4건에 대해 수사 요청했다. 이후 국정감사 과정에서 강원랜드, 금융감독원, 국기원, 우리은행 등의 채용 비리의혹이 속속 불거지면서 논란이 증폭됐다. 이렇게 되자 문재인 대통령이 10월 23일 특별점검 지시를 했고, 김용진 기재부 2차관을 본부장으로 하는 대책본부가 만들어졌다.

 &#39;우리은행&#39; 무거운 분위기   (서울=연합뉴스) 김주형 기자 = 이광구 우리은행장이 채용비리 논란에 사퇴의사를 밝힌 2일 오후 서울 중구 소공로 우리은행 본점에 직원들이 오가고 있다. 2017.11.2     kjhpress@yna.co.kr/2017-11-02 16:06:23/ <저작권자 ⓒ 1980-2017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39;우리은행&#39; 무거운 분위기 (서울=연합뉴스) 김주형 기자 = 이광구 우리은행장이 채용비리 논란에 사퇴의사를 밝힌 2일 오후 서울 중구 소공로 우리은행 본점에 직원들이 오가고 있다. 2017.11.2 kjhpress@yna.co.kr/2017-11-02 16:06:23/ <저작권자 ⓒ 1980-2017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앞으로도 공공기관 채용 비리 조사는 계속된다. 정부는 특히 문제의 소지가 크다고 판단한 19개 기관을 대상으로 심층 조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심층 조사는 22일까지 대책본부와 공공기관 주관 부처뿐 아니라 국무조정실과 경찰청까지 나서 현장조사 형태로 진행된다.

이와 별도로 행정안전부와 국민권익위원회 주관으로 824개 지방 공공기관과 272개 기타 공직 유관단체에 대해서도 전수조사가 이뤄진다. 연말에는 채용 비리 근절을 위한 제도개선 방안도 마련할 계획이다.

정부는 특별조사가 마무리된 이후에도 ‘채용 비리 신고센터’를 상설 운영하면서 제보나 신고 사안을 접수해 지속해서 조사하기로 했다.

다만 부정 합격자의 퇴직이나 억울한 탈락자의 구제가 당장 이뤄지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대책본부장인 김용진 차관은 이날 브리핑에서 “채용 과정에서 억울하게 불합격 처리된 사람의 구제 여부와 관련해서는 관계 기관마다 인사 규정이 별도로 있어서 (당장 구제하기는) 어렵다. 관련 기관들과 협의하겠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기재부의 한 관계자는 “부정합격자의 경우에도 합격자 본인이 직접 부정합격 과정에 연루된 것으로 확인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나는 몰랐다’고 말한다면 징계하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날 부정채용 기관이니 기관장, 관련자들의 실명을 공개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현재 조사가 진행중이고 수사 의뢰된 사항이라 범죄 혐의가 확정되기 전에는 실명을 공개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세종= 박진석 기자 kaila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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