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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권력에서 최고 참모로 전락한 수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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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특파원 시절 리커창(李克强· 63) 총리를 두어 번 본 적이 있다. 매년 3월 열리는 양회(전인대와 정치협상회의)가 끝나고 열리는 내외신 기자회견장에서다. 그는 밝고 순수해 보였다. 그러나 말이 많았고 몸동작이 컸다. 기자가 묻지 않은 질문에도 답하고 싶어 안달하는 모습이었다. 재기가 너무 넘친 듯했다. 어쩔 땐 손동작이 너무 커서 부자연스러웠다. 그는 중후함보다는 소탈함으로, 노회, 혹은 치밀함보다 순수함으로 대결하려는 그런 스타일의 리더로 보였다. 13억 중국을 통치하는 리 총리에 대한 단견이다.

기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리커창 총리 [사진 SCMP]

기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리커창 총리 [사진 SCMP]

리 총리, 두말할 것 없이 중국 권력 2인자다. 시진핑(習近平) 주석 다음이다. 그런데 2인자에 부합하는 권력을 갖고 있느냐 하면 좀 의문이다. 부정적인 답변이 지배적이다. 이론적으로 보면 집단 지도체제인 중국에서 총리는 경제 정책을 총괄해야 하고 행정부인 국무원을 쥐락펴락해야 맞다. 행정에 관한 한 그는 직책과 직위가 1인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 주석 1인 권력이 강화되면서 총리의 위상은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2017년 10월 말에는  ‘당 중앙 집중 영도 강화 호위에 관한 약간의 규정’이 당 중앙 정치국에서 통과됐다. 이에 따르면 총리도 시 주석에게 매년 서면으로 업무보고를 해야 한다. 정치국 상무위원 개개인에게 담당 분야 최고의 결정권이 위임됐던 이전 집단지도체제는 사라진 것이다. 총리마저 주석과 상하 관계가 돼야 하는 중국 신(新) 권력 체계의 부상이다.

리 총리의 추락은 공산주의 청년단(공청단)의 몰락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공청단은 후진타오(胡錦濤) 전 국가주석과 리 총리의 권력을 기반으로 공청단 고위직을 지낸 인사들의 정치 세력을 말한다. 한데 공청단 지도부가 거의 와해 상태다. 친이즈(秦宜智) 공청단 제1서기가 2017년 9월 국가질량감독검험검역총국(질검총국) 부국장으로 좌천된 이후 2017년 말 현재 후임 인선이 안 되고 있어서다.

당 청년조직인 공청단은 공산당 엘리트의 산실로 불렸다. 2015년 말 기준 공청단원 수는 8746만 명으로 중국 전체 공산당원 8900만 명과 맞먹는다. 그동안 공청단의 수장인 제1서기는 장관급 대우를 받으며 사실상 차세대 지도자의 등용문으로 여겨졌다. 성장, 부장(장관) 이상 직위로 영전하는 것이 관례였다. 후 전 주석을 비롯해 리커창 총리, 후춘화(胡春華) 광둥(廣東) 성 서기, 쑹더푸(宋德福) 전 푸젠(福建)성 서기, 저우창(周强) 최고 인민법원 원장, 루하오(陸昊) 헤이룽장(黑龍江)성 성장 등이 공청단 제1서기를 지낸 중국 정계의 스타들이다. 후 주석 시절 이들이 승승장구하면서 공청단은 태자당(혁명 원로나 고위 관료 자녀들의 정치 세력), 상하이방(상하이 시 고위직 출신의 정치세력)과 함께 중국 권력의 삼분(三分)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시 주석이 “공청단이 귀족주의에 빠졌다”고 비판한 이후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물론 친이즈 전 서기가 사실상 차관급이라고 할 수 있는 질검총국 부국장으로 좌천되기 전부터 공청단의 쇠퇴는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 후 전 주석의 비서실장(당 중앙판공청 주임)을 지낸 링지화(令計劃) 전 통일전선 공작 부장이 2015년 8월 부패 혐의로 낙마한 것이 결정타였다. 공청단의 좌장인 후 전 주석의 최측근이자 공청단의 핵심 중 핵심인 링 부장이 실각했으니 더는 의지할 곳이 없었다.

그 여파는 폭풍에 가까울 정도였다. 2017년 10월 19차 당대회에서는 국가 부주석을 지낸 리위안차오(李源潮) 국가 부주석마저 중앙위원에서 탈락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67세로 '7상8하'(67세면 유임, 68세는 은퇴) 관례 적용 대상이 아니었다. 사정이 이러니 요즘 공청단은 공청단 출신이라는 걸 숨기기에 바쁘다.

2015년 9월 3일 베이징에서 열린 열병식을 보는 시진핑 국가주석(맨 왼쪽부터), 장쩌민 전 주석, 후진타오 전 주석, 리커창 총리 [사진 CNN]

2015년 9월 3일 베이징에서 열린 열병식을 보는 시진핑 국가주석(맨 왼쪽부터), 장쩌민 전 주석, 후진타오 전 주석, 리커창 총리 [사진 CNN]

리 총리는 1955년 7월 안후이(安徽)성의 성도 허페이(合肥)에서 태어났다.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 주석,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 후진타오(胡錦濤) 전 국가 주석, 우방궈(吳邦國) 전 전인대 상무위원장 등도 안후이 사람이다. 이른바 중국 정가의 안후이방의 대표 주자라 할 수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수재였다. 소학교 시절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가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이미 중국은 문화대혁명의 대혼란에 빠져든다. 정상적인 학교생활이 불가능했다. 학생들은 홍위병 활동에 동참하기 위해 수업을 거부했다.

리커창 역시 고민했다. 그때 부친이 폭압적이고 살인적인 홍위병 대신 안후이성 문사관(文史館)에서 일하던 리청(李誠·1906~77)의 제자가 되길 권했다. 그는 동의했다. 그리고 스승으로부터 ‘사기’ ‘한서’ ‘후한서’ ‘자치통감’ 등 중국 고전을 배웠다. 리청은 총명한 리커창의 수업 태도를 보고 국가의 동량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그래서 매일 구두로 국학 지식과 천문지리를 전수했다. 동시대 학생들이 피비린내 나는 문혁 살육전에 빠져있는 사이 리는 당대 최고 유학자를 5년간 모시고 착실하게 인생과 인격의 기초를 닦았다. 아버지 잘 만난 덕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시대의 광풍, 문혁 자체를 피할 수는 없었다. 1974년 3월 그는 농촌으로 하방(下放) 됐다. 그가 간 곳은 안후이성 펑양(鳳陽) 현의 다먀오(大廟)공사 둥링(東陵) 대대. 펑양현은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의 고향이다. 그는 이곳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연말이 되면 절반 정도 외지로 나가서 구걸하고, 5월 보리를 수확할 때가 돼서야 돌아왔다. 그들은 구걸을 수치로 느끼지도 않았다.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불가피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리커창은 당시 처참한 농촌의 실상을 보면서 미래 대권에 대한 꿈을 다졌다고 한다.

20살 청년 리커창은 급했다. 당장 농민들이 굶지 않아야 했다. 그래서 과학 영농법을 도입했다. 분업과 농산물 품종 개량을 병행했다. 많은 실적이 있었고 농촌 환경도 개선됐지만, 근본적인 해결책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상부에서 그는 펑양 현의 희망이고 미래였다. 리커창은 하방 2년 만인 1976년 하방 조직의 당 지부 서기에 오른다. 1976년 5월 입당한 뒤 얻은 첫 조직의 최고 책임자 자리였다.

문혁 주도자였던 4인방이 체포된 후 중국은 중단됐던 대학 입시를 부활시켰다. 1977년 8월 일이다. 4개월 뒤인 그해 12월 치러진 첫 대입시험에는 무려 670만 명이 응시했지만, 이 중 대학에 들어간 사람은 27만 3000명에 불과했다. 리커창은 29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중국 최고 명문인 베이징대 법학과에 합격한다.

중국 최고의 명문인 베이징 대학 교문 [사진 바이두 백과]

중국 최고의 명문인 베이징 대학 교문 [사진 바이두 백과]

당시 베이징대학은 전국 수재 중 수재들로 들끓었다. 그중에서도 리커창의 성적은 발군이었다. 졸업할 때 리커창은 법학과의 성적 우수생 4명 중 한 명이었다.

1982년 베이징대학을 졸업한 후 리커창은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그는 동기들처럼 미국 유학을 가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 베이징 대학교 당 위원회 부서기인 마스장(馬石江)은 리커창의 리더로서의 재능을 아꼈다. 그리고 그에게 학교에 남아 공청단 베이징대학 위원회 서기를 맡아 달라고 부탁한다. 훗날 그의 권력 기반이 됐던 공청단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후 그는 무려 16년간 공청단의과 벼슬길을 함께 한다.

그는 역동적이었다. 베이징대 공청단에 강좌를 개설하고 각종 문화 활동을 기획했다. 작지만 개혁 조치도 이어졌다. 회의 첫날 그는 정례 회의는 1시간을 초과하지 않아야 한다고 선언한다. 시간을 초과하면 누구든 회의장을 나가도 좋다고 했다. 사상 논쟁으로 수 시간씩 진행되던 회의는 그날 이후 1시간을 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주관하는 회의는 30분 이내에 모두 끝났다. 그렇게 그는 리더십을 키웠고 단원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는 1983년 베이징대 지부에서 공청단 중앙서기처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공청단 중앙학교부 부장 겸 전국학생 연합회 비서장을 맡았다. 리커창과 후진타오 주석(당시 공청단 제1서기)의 인연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후진타오는 총명하고 적극적이며 성실하기까지 한 리커창에 주목한다. 그리고 리는 그해 연말 공청단 서기처 후보 서기에 임명된다.

후 전 주석은 1985년 구이저우(貴州) 성 서기로 옮겨가면서 리커창을 공청단 서기로 올린다. 당시 서기처 서기는 8명. 제1서기가 쑹더푸(宋德福, 2007년 사망)였고, 류옌둥(劉延東), 리위안차오(李源潮), 장바오순(張寶順), 리커창, 뤄쌍(洛桑), 류치바오(劉琦寶) 등이 서기를 맡고 있었다. 이들 모두가 후진타오 주석 시절, 중국 정가를 주름 잡았던 거물들이고 류옌둥은 아직도 부총리를 맡은 중국 최고의 여성 정치인이다.

후 주석의 리커창 사랑은 갈수록 파격을 더했다. 1992년 50세의 젊은 나이에 정치국 상무위원에 오른 그는 다음 해인 1993년 리커창을 공청단 제1서기로 발탁한다. 당시 리커창의 나이가 38세. 공청단 제1서기로는 최연소였다. 후 주석이 42세의 나이에 공청단 제1서기에 임명된 것보다 무려 4년이나 빨랐다. 이후 1998년까지 5년 동안 리커창은 당시 공산당 중앙서기처 서기이던 후진타오에게 직보하며 한층 깊은 신뢰를 쌓게 된다.

공청단 계열로 분류되는 리커창 총리 [사진 중앙포토]

공청단 계열로 분류되는 리커창 총리 [사진 중앙포토]

리커창은 후진타오와 권력을 함께 하면서 성격도 그를 닮아갔다. 성실함에 범생 이미지, 흐트러짐 없는  몸가짐은 물론 윗사람에게 고분고분하고 반항할 줄 모르는 성격까지 후진타오의 모습이다. 이후 리커창은 ‘리틀 후’로 불렸다.

리커창은 공청단에 근무하는 동안 빈곤지역 학생들이 돈이 없어 배움의 기회를 잃지 않도록 돕는 희망공정(希望工程) 사업을 성공적으로 정착시켰다. 공청단 중앙이 운영하는 중국 청년여행사를 발전시켜 궤도에 올려놓은 것도 리커창이다.

그는 자신의 학업에도 열중했다. 공청단 시절 베이징대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5년 쓴 그의 논문 제목은 ‘중국 경제의 3원 구조를 논한다.’ 이는 1991년 중국 사회과학원이 격월간으로 발행하는 권위 있는 학술지 ‘중국사회과학’ 제3기에 실렸으며 중국 경제학계의 최고상인 ‘쑨예팡(孫冶方) 경제 과학상 논문상’을 받았을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어 1988년엔 ‘농촌공업화 : 구조 전환 과정에서의 선택’이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1994년에는 박사학위까지 취득했다.

리커창은 1999년 44세라는 역대 최연소로 허난(河南) 성 대리성장에 임명됐다. 권력을 위해 공청단의 울타리를 벗어난 것이다. 그리고 3년 후인 2002년 12월에 허난성 당 서기 겸 성장으로 승진한다. 모두가 후진타오의 파격 후원 덕이었다.

그가 허난성 대리성장이 됐을 때 현지 관리들은 불안해했다. 나이가 너무 어린 데다 다양한 행정 경험이 없어서였다. 그러나 그는 2004년까지 5년간 허난성 성장으로 재직하며 성의 1인당 지역총생산(GRDP)을 1990년대 초 31개 성 중 28위에서 중위권인 18위로 끌어올렸다. 1998년 4308억 위안이던 허난성의 지역 총생산은 6년 만에 8554억 위안으로 무려 2배 가까이 늘려놓았다. 현지 관리들은 물론 주민들의 그에 대한 인기는 하늘로 치솟았다. 후진타오 이후 그가 있다는 말이 나온 게 이때부터였다.

2004년 12월 그는 랴오닝(遙寧)성 당 서기로 이동한다. 랴오닝 성은 다른 지역에 비해 주거 환경이 열악했다. 리커창은 여기서 그의 첫 정책 리더십을 시험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잠 잘 집이 있어야 한다(人人有房住)’라는 구호 아래 푸순(撫順) 시의 판잣집 100만 호의 주택 개량사업을 벌인다. 2년에 걸친 대대적인 주택 개량사업 끝에 184만 5000호의 집을 개량하고 50만 호의 주택 문제를 해결했다. 또한 동북진흥계획의 세부항목으로 다롄(大連), 잉커우(營口), 단둥(丹東) 등 연해 공업지구 개발을 위한 ‘5점 1선(五點一線)’ 계획을 추진하며 3년 만에 랴오닝성이 ‘조화사회’의 선두로 올라서게 했다. 젊은 서기 리커창의 인기는 그렇게 식을 줄 몰랐다.

지방정부 시절 리커창은 청렴한 자세를 견지했다. 외부 접대를 받는 적이 없었다. 2006년 부친상을 당했을 때는 현지 관리들이 보낸 선물을 완곡하게 거절해 돌려보내기까지 했다. 미래 대권을 위한 스스로의 신중함과 경계였다.

2006년 12월 ‘뉴스위크’ 아시아판은 ‘내일의 스타’ 특집에서 리커창을 중국의 미래 지도자로 소개했다. 시진핑(習近平) 당시 저장(浙江)성 서기는 안중에도 없을 때였다. 중화권 언론도 일찌감치 리커창을 주목했다.심지어 일부 매체는 그가 허난(河南) 성과 랴오닝성의 당 서기로 재직할 때 공공연하게 ‘내일의 태양’이라며 ‘용비어천가’를 미리 읊기도 했다. 심지어 오카다 가쓰야 전 일본 민주당 대표까지 2005년 랴오닝성을 방문한 뒤 “리 서기가 장차 중국의 미래 지도자가 될 것으로 믿는다”고 자신했다.

그리고 리커창은 2007년 10월 제17차 당 대회에서 꿈에도 그리던 정치국 상무위원에 오른다. 그런데 권력서열은 7위로 시진핑(6위)에 한발 밀리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다. 당시만 해도 시진핑은 상무위원 진입 자체가 불투명한 인물로 인식되고 있었다. 아무도 리커창이 시진핑에 밀릴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이후 다양한 분석이 쏟아졌다.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설득력을 얻었다. 첫 번째는 후진타오 주석이 후계자로 자신의 최측근 인사를 지명하는 데 부담을 느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두 번째는 장쩌민 전 주석과 쩡칭홍(曾慶紅)전 부주석 등 원로그룹이 공청단파의 권력 장악을 견제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가장 설득력 있는 분석이다. 실제로 후 주석의 임기 동안 공청단파는 지방과 정부의 요직을 차례로 접수해 왔다. 세 번째로 군부의 반발이다. 태자당 출신인 시진핑은 군부 내 네트워크가 강했지만, 공청단 출신인 리커창은 그러지 못했다. 이 밖에 리커창의 업적에 대한 논란도 있었다. 특히 허난성 근무(1998~2004년) 시절 부르짖었던 중원 굴기(中原崛起) 전략이 그가 떠난 후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는 비판이 적지 않았다.

시진핑 국가주석(왼쪽)과 리커창 총리(오른쪽) [사진 ibktimes]

시진핑 국가주석(왼쪽)과 리커창 총리(오른쪽) [사진 ibktimes]

리커창의 권력 역정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2010년 6월 리커창(李克强) 상임 부총리는 윈난(雲南)성 주무콩(竹木孔)촌의 한 빈민 가정을 예고 없이 방문했다. 사회보장제도에 따라 보조금을 받으며 생활하는 가정이었다. 집 여기저기 둘러보던 리커창은 갑자기 주방과 내실에 들어가 수돗가에 쪼그리고 앉아서 물이 잘 나오는지, 수질은 어떤지를 살폈다. 부엌 벽은 가려져 있었다. 총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당의 개는 아무렇지 않게 안방을 들락거렸다. 가옥 옆에 바짝 붙어있는 외양간에서는 악취가 진동했다. 리커창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동행한 현지 관료를 쳐다보며 “이렇게 주거환경이 열악한 가정이 이 현에 얼마나 되냐”고 쏘아붙였다.

리커창의 찌푸린 미간을 찍은 사진은 다음 날 각 매체를 타고 전국에 보도됐다. 그리고 ‘총리의 찌푸린 미간’ 이라는 말로 인구에 회자된다. 공무원의 행정 무능에 대한 총리의 불만은 중국 사회에 잔잔한 파장을 낳았다. “리커창의 잔뜩 찌푸린 미간에서 그의 진심을 읽었다” “찌푸린 미간에 감동을 받았다”는 댓글이 인터넷을 뒤덮었고, “그의 미간에 중국 인민의 미래가 있다”며 대중들은 환호했다.

물론 리커창에게 슬럼프도 있었다. 2007년 말부터 2년여 동안이다. 2008년 3월 국무원 상무부총리에 임명됐을 때 그에게 주어진 첫 번째 임무는 국무원 대부제(大部制) 개혁이었다.

줄곧 차기 국가 주석감으로 꼽혀오던 리커창으로서는 시진핑(習近平)에 밀린 권력 서열을 뒤엎고 싶었다. 마침 18대 당대회(2012년 11월)까지는 5년이 남아있었다. 반전의 가능성도 있었다. 리커창이 당시로써는 불가능해 보이던 대부제 개혁에 도전한 가장 큰 이유이자 동력이었다.

당시 중국은 28개 부처가 있었다. 미국의 15부, 일본의 12부, 프랑스의 18부에 비해 지나치게 행정 체제가 비대했다. 당연히 비효율적이었다. 리커창은 중국 부처를 20개 안팎으로 축소해 국무원의 효율성을 끌어올리려 했다. 하지만 관료집단의 반발과 정치세력 간 갈등에 밀려 부처 수는 종전 28개에서 27개로 단 1개 순감하는 데 그쳤다. 리커창으로서는 첫 출발에서 체면을 구긴 셈이었다. 이때 다시 한번 그의 리더십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확산된다.

리커창의 상실감은 컸다. 그래서 다시 한번 도전에 나섰다. 2009년 시작된 의료개혁이었다. 중앙정부는 16개 부처로 구성된 의료개혁 영도소조를 조직했고 리커창이 조장을 맡았다. 당시 그는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었다는 이야기마저 나올 정도로 필사적이었다. 대부제 개혁의 실패로 그는 더 물러날 곳이 없었다.

의료개혁의 목표는 공익성을 앞세워 대부분의 인민이 의료혜택을 보게끔 하는 것이 취지다. 3년 내 8500억 위안을 투자해 기본의료보험 제도가 성(省)향(鄕)민을 커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지만, 이 계획 역시 초반의 의욕에 비해 내세울 만한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 시장경제 개념을 배제한 개혁이었기에 의료 서비스의 질적 업그레이드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번의 행정 실패 역효과는 생각보다 거셌다. 당시 관료사회에서는 “TV에서 리커창이 바삐 움직이는 것을 보지만 그가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고, 공문상에서 리커창의 지시를 보지만 그가 지향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볼멘소리가 나왔다.

당시 베이징 정가에서는 리커창의 대안으로 시진핑의 측근인 왕치산(王岐山) 부총리가 차기 총리에 올라설 것이라는 소문이 끝이지 않았다. 그가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임된 후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이 그의 능력에 실망했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물론 이 모든 비판과 우려를 넘어 그는 2013년 3월 총리에 오른다.

전통적으로 중국의 국무원 총리는 경제 정책을 전담했다. 그래서 리커창 총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숙제는 경제 개혁이었다. 개혁 개방 이후 30년 넘게 세계의 공장을 한 덕에 매년 10%대의 고도성장을 했지만 2012년에 들면서는 더는 그런 발전 모델이 통하지 않았다. 실제로 리 총리가 취임 한 2013년부터 중국 경제성장률은 매년 7%대로 주저앉는다. 그래서 나온 게 리커창 경제학, 즉 리커노믹스(Liconomics)다.

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관련 정상회의에 참석한 리커창 총리 [사진 CGTN]

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관련 정상회의에 참석한 리커창 총리 [사진 CGTN]

이 정책의 골자는 단기적인 고통은 감수하고라도 중장기적인 안정 성장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골자는 대규모 부양책 중단, 금융권 채무조정, 경제 구조 개혁, 민생 안정이다. 전임 원자바오(溫家寶) 총리 시대에는 정부가 재정 적자를 감수하고서라도 대규모 경기 부양책으로 고도성장을 지속했다. 예컨대 2008년 세계 금융 위기가 발생하자 중국 정부는 1,000만 채의 집을 짓고 1,800만 대의 차를 사는 등 방법으로 경기를 부양했다. 그러나 리커창은 경제 성장률이 7%로 떨어져도 경기 부양보다는 경제구조 개혁과 분배를 강조했다. 중국 경제를 정부 주도에서 시장 주도로 바꿔 체질을 강화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리코노믹스는 실행 1년도 안 돼 시진핑 국가 주석이  주도하는 ‘신창타이(新常態·new normal)’ 경제 개혁으로 대체되는 수모를 당한다. 동시에 경제 정책도 국무원이 아닌 시 주석이 주도하는 당의 영도 하에 귀속된다.

중국의 신창타이와 미국의 뉴노멀 [사진 중앙포토]

중국의 신창타이와 미국의 뉴노멀 [사진 중앙포토]

당시 인민일보는 신창타이의 4대 특징으로 ▶중고(中高)속 성장 ▶구조 변화 ▶성장동력 전환 ▶불확실성 증대 등을 제시했다. 중국 경제는 과거 연 10% 내외 ‘고속성장’ 대신 연 7~8% 안팎의 ‘중고속 성장’ 시대에 진입했다고 진단하고 새로운 공급자(기업 측) 개혁을 시작해야 한다는 거였다. 물론 정부 주도의 개혁이었다. 이는 시장 주도의 개혁을 강조한 리커창 총리의 경제 개혁과 상반되는 정책이다. 특히 시 주석이 당에 의한 경제 관리를 강조하면서 모든 기업에 당 조직이 만들어지는 등 경제에 대한 당의 통제가 오히려 강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경제마저 리커창의 손을 떠난 것이다.

총리 권력의 추락은 정치적인 이유도 있다. 전술한 대로 보시라이 전 충칭시 서기가 부인의 살인 사건을 계기로 낙마하자 당대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있던 저우융캉(周永康) 세력의 발호가 시작된다. 이른바 중국 권력의 신 4인방의 반격이다. 신 4인방은 저우융캉 전 정치국 상무위원 겸 정법위 서기, 보시라이 전 충칭서 서기, 쉬차이허우 전 중앙 군사위 부주석, 링지화 전 중앙판공청 주임이다. 저우 상무위원은 공안과 검찰, 법원, 무장경찰, 국가 안전부를 총괄해 정치국 상무위원 9명 중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다.

2010년 11월 보시라이 충칭시 서기(오른쪽)가 다스리던 충칭을 방문한 저우융캉 당시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정법위원회 서기(왼쪽). [사진 중앙포토]

2010년 11월 보시라이 충칭시 서기(오른쪽)가 다스리던 충칭을 방문한 저우융캉 당시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정법위원회 서기(왼쪽). [사진 중앙포토]

이들은 보의 실각이 가시화되자 2012년 3월 무장 경찰을 동원해 쿠데타를 도모하지만 사전 정보 누설 등으로 실패로 끝난다. 이때부터 시진핑은 반부패를 앞세워 신 4인방 세력의 제거에 돌입한다. 그리고 4인방 모두에게 부패 혐의를 적용해 무기 징역형에 처한다. 쉬차이허우는 조사 도중 2015년 3월 방광암이 악화돼 사망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총리인 리커창의 역할이 거의 전무했다는 사실이다. 4인방과 그 추종 세력 수백 명 제거에 성공한 시진핑의 권력은 이미 당 총서기(2012년 11월)나 국가 주석(2013년 3월) 당시의 권력이 아니었다. 군과 공안 등 무장 권력은 물론 당내 모든 핵심 인사가 시 주석 권력 권 내로 수렴됐다. 총과 완력을 가진 시진핑, 머리와 스타일을 가진 리커창의 차이였다. 리커창 총리의 역할이 급속히 추락한 배경이다. 그리고 그는 5년 후 조용히 중국의 권력지도에서 사라질 게 분명하다. 그에게 남은 유일한 권력은 국무원을 무리 없이 이끌고, 시대에 병행해 각 부문 정책을 업그레이드하고 관리하며, 시진핑이 주도하는 당의 통치 이념과 전략을 관료계에 전파하고 제도화하는 고급 참모 역이라 할 수 있겠다.  그에게 당대 최고의 ‘참모 엘리트’라는 비아냥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베이징=차이나랩 최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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