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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내셔널] 살내·반야월·파군재 … 대구 곳곳 왕건의 흔적 따라가보니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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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고려가 통일을 이루기 전 고려와 후백제는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수없이 많은 전투 가운데 927년(태조 10) 대구 팔공산 일원에서 고려와 후백제가 벌인 동수대전(桐藪大戰)은 후삼국 통일전쟁의 3대 전투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유명하다.

고려 통일 전 후백제와 싸움 치열 #견훤에 쫓기던 탈출로 왕건길 조성 #팔공산 일원서 펼쳐진 동수대전은 #후삼국 통일전쟁 3대 전투로 꼽혀

이 전쟁에서 왕건은 신숭겸 등 기라성 같은 장수를 잃고 견훤군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 왕건은 팔공산에서 금호강~앞산~낙동강을 따라 탈출하며 대구 곳곳에 흔적을 남긴다. 그와 관련된 지명이 대구에 많은 이유다. 팔공산엔 이를 토대로 한 ‘왕건길’도 조성돼 있다.

왕건

왕건

◆살내=대구 북구 동서변동 금호강과 동화천이 합류하는 두물머리 근처. 이곳에는 ‘화살이 내(川)를 이뤘다’는 뜻의 ‘살내’가 있다. 왕건과 견훤이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활을 쏴 하천이 온통 화살로 뒤덮였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무태=무태(無怠)는 왕건이 군사를 이끌고 지금의 대구 북구 서변동을 지나 연경동 방향으로 진군하던 중 군사들에게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고 태만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무태는 현재 대구 북구 동·서변동을 일컫는다.

◆연경동=왕건은 무태에서 숙영을 하고 북구 연경동(硏經洞)에서 동구 지묘동 방향으로 향했다. 연경동은 ‘선비들이 글 읽는 소리가 들렸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지묘동=지묘(智妙)는 ‘지혜로운 묘책’이라는 뜻이다. 신숭겸이 왕건의 갑옷으로 갈아입은 채 어가를 타고 적으로 돌진, 대신 죽음으로써 왕건을 구한 전략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왕건을 무사히 구하는 과정에서 많은 장수가 죽었다. 동수대전에서 8명의 충성스러운 장수가 순절했다고 해서 후일 ‘공산’을 ‘팔공산(八公山)’이라고 부르게 됐다.

대구 동구 파군재삼거리엔 왕건의 충신 신숭겸 장군 동상. [김정석 기자]

대구 동구 파군재삼거리엔 왕건의 충신 신숭겸 장군 동상. [김정석 기자]

◆파군재=파군재는 동구 불로동에서 동화사와 파계사로 가는 길목에 있다. ‘군대가 깨졌다’는 의미다. 왕건은 파군재에서 견훤군에 무참히 패배했다. 파군재 삼거리에는 현재 신숭겸 장군의 동상이 서 있고 뒤로는 동수대전 전투 장면이 그려진 부조가 있다.

동구 봉무동엔 왕건이 혼자 앉아 쉬었다는 독좌암과 독암서당이 자리하고 있다. [김정석 기자]

동구 봉무동엔 왕건이 혼자 앉아 쉬었다는 독좌암과 독암서당이 자리하고 있다. [김정석 기자]

◆독좌암=대구 동구 봉무동 노인회관 북쪽 5m 지점 개천가에 있다. 왕건이 봉무동에 있는 독좌암이란 바위에 홀로 앉아 쉬었다는 데서 유래했다. 독좌암 앞에는 독암서당이 자리하고 있다.

◆불로동=불로동(不老洞)은 독좌암을 거쳐 남동쪽으로 향한 왕건이 지나간 마을이다. ‘노인은 없고 아이들만 있다’ 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불로동에는 200여 개의 거대한 고분군이 있다. 왕건이 견훤에게 패해 도주하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체력이 떨어지는 늙은 병사들은 다 낙오하고 젊은 병사들만 따라오고 있다고 해서 불로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견해도 있다.

◆해안·안심·반야월=왕건이 견훤군의 포위망을 벗어난 뒤 ‘얼굴을 펴고(解顔) 안심(安心)했다’는 데서 비롯된 지명이라는 설이 있다. 해안은 현재 대구 동구 방촌동 지역이다. 반야월은 왕건이 지금의 해안을 거치고 보니 밤은 반야(한밤)이고 달이 떠 있었다고 해서 반야월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대구도시철도 1호선 해안역·반야월역·안심역이 여기에서 이름을 따왔다.

◆은적사=대구 남구 앞산공원 인근에 있는 사찰이다. 은적(隱跡)은 숨는다는 뜻으로 왕건이 숨었던 절이라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은적사 대웅전 옆에는 사람 한 명이 들어갈 만한 조그만 굴이 있는데 왕건이 이 굴에서 사흘간 머물렀다고 한다.

◆안일사=왕건은 사흘간 머물렀던 은적사보다 더 안전한 은신처를 원했다. 안일사(安逸寺)는 은적사보다 깊은 골짜기에 있어 왕건이 ‘편안하게 머물렀다’고 해서 안일사가 됐다는 설이 전해진다. 안일사에서 500m 거리에 위치한 왕굴은 왕건이 안일사까지 추격해 온 견훤을 피해 숨어들었던 풍화동굴이다.

김정석 기자 kim.jung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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