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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여행 글, 엉덩이 아닌 길에서 나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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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 [사진 smartimages]

영감. [사진 smartimages]

글 쓰는 사람은 흔히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꾸준히 쓰는 것이 찰나의 ‘영감’이나 번뜩이는 표현을 생각해내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글은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로 쓰는 것이다’라고도 한다. 그만큼 무언가를 글로 표현해 대중의 공감을 얻어내는 것이 한순간에 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겠지만, 여행작가에게만은 좀 예외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송이의 뻔하지 않은 여행글쓰기(7) #여행 작가에겐 통찰력보다 경험이 중요 #넓고 깊은 삶 여부가 여행기 품질 좌우

여행의 글은 엉덩이가 아닌 길에서 나온다. 글이 잘 써지거나, 잘 써지지 않거나 여행 글을 쓰려는 자는 책상이 아닌 길 위에 있어야 한다. 앉더라도 의자가 아닌 길 위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야 할 테다. 여행 글의 원천은 길과 그 위에 펼쳐진 오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여행 글에서도 통찰력과 상상력은 필요하지만, 여행 작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경험이다. 일천한 경험은 얕은 이야기를 만들 수밖에 없다. 여행작가는 소설가와는 달리 책 속이 아닌 현실의 세계에서 얻은 직접 경험으로 글에 구체적인 생명력을 부여하고 현실의 바탕 위에서 통찰력을 키운다.

현실의 경험이라는 바탕 위에서 글을 쓰면 구체적이 된다. 느낀 즉시 메모하면 훨씬 살아있는 표현을 얻을 수 있다. 그냥 ‘가을 단풍이 오색 창연하다’와 같은 추상적인 표현이 아니라 ‘가을 거리에 일렁이는 빨갛고 노란 물결이 쓸쓸해진 마음을 지그시 달래준다’라거나 혹은 그냥 ‘매콤달콤하다’가 아니라 ‘유난히 매운 걸 잘 못 먹던 어릴 적 내가 처음 맛본 달큰한 떡볶이의 알싸한 매운맛’과 같은 나만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구체적 표현이 나올 수도 있다.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EPA]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EPA]

어느 작가는 “나는 파리를 떠난 후에야 파리에 관해 쓸 수 있었다”고도 했지만, 파리에 머무르면서 쓸 수 있는 글과 파리를 떠난 후에 쓸 수 있는 글의 결은 다를 것이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은 그 세계에 속한 사람으로서 경험한, 그야말로 피부에 직접 닿는 그곳을 쓸 수 있고 ‘그곳’을 떠난 후에는 그 세계를 떠난 이방인의 마음으로 혹은 찍어놓은 사진을 돌려보듯 먼발치의 시선으로 또 다르게 쓸 수 있을 테다.

실제 거리의 풍경과 고층빌딩의 사무실에서 창밖으로 내다보는 거리의 풍경이 다른 것처럼. 나의 위치에 따라 그렇게 내 시야가 만들어내는 프레임도 달라진다.

내 세계로 들어온 나만의 여행


가지각색의 세상 경험을 원고지에 녹여야 하는 여행작가에게는 경험치의 양도 중요하지만, 질도 중요하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인 만큼 사유하고 사유한 만큼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경험을 했다고 해서 깊은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쓰는 이가 평생을 두고 쌓아온 지식과 교양이 자신도 모르게 글에 거짓 없이 녹아난다. 어느 지식, 어느 경험 하나도 허투루 쓰이지 않는다. 길 위에서 순간순간 맞닥뜨리는 사건과 상황에 대한 관찰의 깊이나 정도가 달라져 버리는 것이다.

글쓰기. [중앙포토]

글쓰기. [중앙포토]

같은 일행과 같은 여행을 하더라도 자신의 세계에 따라 전혀 다른 여행기가 나온다. 교육 정도와 생활 수준이 비슷한 10명의 일행이 함께 떠난 여행에서 모두에게 매일 한 장씩 여행기를 써보라고 하면 전혀 다른 여행기가 탄생한다. 여행을 같이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각자의 세계 속에서 그 나름의 여행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여행의 재미고 여행 이야기의 변수다.

그래서 여행기는 글쓰기의 기술을 익혔다고 해서 한순간에 성큼 나아지지 않는다. 반대로 글쓰기의 기술 없이도 담백하고 진솔한 데다 삶의 깊이가 녹아있는 글을 쓸 수 있다. 이제까지 얼마나 써 봤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깊고 넓게 살았느냐가 여행기의 질을 결정한다. 노년의 얼굴이 그 사람의 인생을 속일 수 없고 나무가 저도 모르게 제 속 깊은 곳에 나이테를 그려내는 것처럼, 깊이 있는 인생을 살았다면 어느 곳에 얼마를 가도 좋은 여행기를 쓸 수 있다.

다만 우리가 지금 여기서 연습할 수 있는 것은 내 지나온 인생이라는 묵직한 도우 위에 어떤 토핑(여행)을 뿌려 어떤 피자(여행기)를 만들 것인가 하는 것 정도다. 그렇더라도 매력적인 토핑을 얹으면 피자는 그런대로 맛있을 것이다. 깊은 맛까지는 아니더라도 짭조름하고 달콤한 피자를 만들 수도 있을 테다.

날씨가 좋은 날뿐 아니라 눈이 오고 바람이 불어도 길 위에 있어야 하는 것이 여행작가의 숙명이듯, 드라마 속 대사처럼 날이 좋아서뿐 아니라 날이 좋지 않아도, 날이 별일 없이 적당해도, 그 모든 날이 좋은 날이다. 글쓰기에는.

이송이 일요신문 여행레저 기자·여행작가 runaindia@hanmail.net

우리 집 주변 요양병원, 어디가 더 좋은지 비교해보고 싶다면? (http:www.joongang.co.kr/Digitalspecial/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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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현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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