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 이해할 수가 없죠? 지금 찾아보기 힘든 공동체 의식이 그땐 우리 사회에 분명 있었습니다.”
열다섯 돈 금목걸이, 쌍가락지 결혼반지, 장롱 속 황금열쇠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한 푼 보상도 없이 순수 헌납 형태로 내 논 가계의 귀중품들이다.
[외환위기 20년]97년 12월 금가락지 모으기 정행길씨 #"집집마다 흔했던 돌반지 내놀 수 있겠다 생각" #1주 모금 예상 외 성과, 전국 확산 기폭제 돼 #초기엔 무상 헌납, 350명이 1억3000만원 모아 #98년 '금모으기 운동' 본격화하며 보상판매 전환 #원동력은 공동체 의식…지금 다시 하면? "글쎄요"
정행길(76) 전 새마을부녀회연합회장은 1997년 12월 10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애국 가락지 모으기 운동’ 특별 모음행사를 기획 추진했다.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이듬해 범국민 금 모으기로 발전한 운동의 시초가 된 행사다.
'아기 돌 반지 모으자'는 아이디어로 시작된 금 모으기
지난달 21일 경남 창원 새마을회관에서 만난 정씨는 20년 전 일을 또렷이 기억했다.
“서울 목동 아파트에서 TV를 보는데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어요. 아, 이게 뭔가. IMF가 도대체 뭐지?”
97년 11월 21일 임창열 부총리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신청 사실을 밤 10시 20분 긴급 기자회견 형식으로 발표했다.
정씨는 “이튿날 아침 신문을 보고 공업용·장식용 금을 사는 데 외화가 많이 든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면서 “집집이 널려 있는 돌 반지돌반지를 모아 외화를 아끼는 데 도움이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고 회상했다.
97년 한국의 합계출산율(1.52명)은 지금(1.21명)보다 높았다. 돌 반지 선물을 지금보다 흔하게 주고받던 사회상을 반영한 발상이었다.
애국 가락지 모으기는 12월 3일부터 1주일 간 전국 새마을부녀회 조직을 통해 진행됐다. 당시 연합회장을 맡고 있던 정씨가 11월 25일 긴급 시·도회장 회의를 소집해 “나라가 큰일났다”며 행사를 제안했고 참석자 전원이 찬성해 전국 홍보를 거쳐 모금이 시작됐다. 정씨는 “기생들이 주도했던 일본 강점기 국채보상운동처럼 여성들이 발의해 부도난 나라 살림을 뭘 해서라도 메꿔보자는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이후 전국 시군구·읍면리통 단위 지역마다 부녀회장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모금 활동을 폈다. 정씨가 만든 행사 구호는 ‘우리 아기 돌반지로 나라경제 살립시다’였다.
“조그만 아기 돌반지 하나쯤은 큰 부담 없이 내놓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처음부터 거창한 의도로 추진한 금모으기가 아니었다. 그런데 결과가 예상을 뛰어넘어 기적에 가까웠다. “결산 행사장에서 돌반지는 구석에 밀려 잘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성인 반지·목걸이 등 장신구는 물론 황금열쇠, 금송아지까지 모여들었죠.” 집에 있는 금붙이가 부족해 달러와 은을 내놓은 사람들도 많았다. 여성 350여명이 참여해 모금한 금액이 총 1억3095만원을 기록했다. 정씨는 이 돈을 중소기업청에 전달해 긴급자금이 필요한 기업들이 5년간 이자 없이 빌려 가도록 했다.
당시 행사장에 왔던 조해녕 내무부 장관은 이 사실을 고건 국무총리에 보고했다. 이후 농협중앙회, 여성단체협의회, 한국소비자연맹 등 여러 단체가 참여해 이듬해 1월 5일부터 본격적인 금모으기 운동이 전개됐다. 순수 헌납이 아닌 보상판매 형태로 방식이 바뀐 것도 이때부터다.
고 김수환 추기경이 취임 때 받은 금 십자가를 내놨고 97년 프로야구 MVP 이승엽과 양준혁 등 운동선수들은 금메달을 기탁했다. 98년 한 해 동안 금모으기에 참여한 국민은 약 351만 명이다. 총 227톤의 금이 모였는데 당시 가치로 환산해 약 21억 달러(2조5000억원)어치에 달했다.
한국의 금모으기 운동은 전 세계 경제사에 유례없이 드문 사례로 꼽힌다. 정씨는 “당시에도 금모으기 동참을 원하는 다른 단체들이 찾아와 ‘어떻게 이게 가능했냐’며 사람들을 설득한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어왔다"고 말했다. 정씨가 추진한 초기 캠페인의 기폭제는 70년대 새마을 운동으로 표출되며 경제성장을 주도한 공동체 정신이다. ‘
국가가 망하면 개인도 살 수 없다’는 개발세대식 사고가 모금 참여를 유도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정씨가 “난 사람들을 설득한 게 아니라 단지 제안했을 뿐”이라고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국가 경제 부흥이 곧 가계경제의 윤택함으로 이어진다는 성장우선주의가 90년대 말까지 남아있었던 점도 금모으기를 가능케 한 요인이 됐다.
지방에서 모금 활동을 벌였던 주경효(67) 전 함안군부녀회장은 “그때 외국에 나가 취직을 하면 일본 사람들은 서빙을 하는데 한국 사람들은 화장실 청소를 한다고 했다”면서 “국격이 낮아지면 국민이 힘드니 우리 자식들이 앞으로 기 펴고 살려면 나라가 부강해야 하지 않겠냐고 부인들을 설득하고 다녔다”고 회상했다.
한국 여성 특유의 네트워크 형성 관행과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로 불리는 사회 지도층의 책임의식도 캠페인 유지·확산에 기여했다. 장영애(70) 전 경남도부녀회장은 “지역마다 금붙이가 있는 시장·군수, 국회의원 사모님들을 골라 찾아다녔다”면서 “군수 사모님이 믿고 냈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이 덩달아 동참하는 효과가 있었다”고 말했다.
한 번은 군수 부인이 수십 년간 왼손 약지에서 빼지 않은 쌍가락지를 내놓겠다고 찾아와 비누를 들고 20분 넘게 굵어진 손가락을 문지른 적도 있다고 했다.
경남 김해에서 모금 활동을 벌였던 오성자(73) 전 김해시부녀회장은 “미치지 않으면 (그런 활동을) 못 했다”면서 “부녀회 일은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오지 못하는 마약 같은 측면이 있어 잠까지 줄여가며 밤낮으로 시내를 열심히 다녔다”고 고백했다.
이처럼 민간 주도로 전례 없는 성과를 거두긴 했지만 오늘날 돌이켜 본 금모으기 운동에는 분명 아쉬운 점이 있다. 현장의 에너지가 앞단의 모집 운동에만 그쳐 사후 처리·관리에까지 미치지 못한 점이 그중 하나다.
정씨는 당시 모은 금 현물의 최종 행방을 묻는 질문에 “그게 어디로 갔는지는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면서 “정부가 그다음 해에 달러를 주고 금을 수입하는 양이 줄어들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답했다. 처음부터 목표 액수도, 사용처도 정해놓지 않고 시작한 활동이었기에 행사 당일 모은 금을 정산하는 과정에도 일절 개입하지 않았다는 게 부녀회 임원들의 공통된 반응이었다.
그래도 국민 개개인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금모으기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정씨는 “초기 헌납으로 진행했다가 나중에 보상판매 전환이 됐지만 누구 하나 다시 돌려달라는 요청이 없었다”면서 “이름 없는 여성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한국이 IMF를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 다시 금모으기를 하면 잘 될 것 같냐”는 물음에 인터뷰에 참석한 부녀회장 4명은 모두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요즘에는 공동체 생각하면 바보 취급을 한다”, “다들 이기적이 돼 자기 것을 선뜻 내놓기는 힘들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OECD 가입(96년) 직후 IMF 원조를 받았던 한국의 국내총생산(명목 GDP)은 96년 6568억 달러에서 2015년 1조7468억 달러로 3배 가까이 성장했다. 그 새 일흔을 넘긴 부녀회장 4인의 주름진 손에는 금붙이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창원=심새롬 기자 saero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