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를 좋아하는 터라 지난 금요일 늦은 밤에 월드컵 조 추첨을 생방송으로 봤다. 본선 진출 32개국 중 11월 현재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이 우리(59위)보다 낮은 국가는 사우디아라비아(63위)와 러시아(65위)뿐. 주최국 러시아는 1포트로 A조에 배정받았지만 만나지 못했고, 사우디는 우리와 같은 4포트라 애당초 같은 조는 불가능했다. 결국 만만한 상대는 한팀도 없었다.
그래도 조 추첨 마지막에 묘한 기대감이 발동했다. F조와 H조에 남은 한 자리를 놓고 한국과 일본이 다투는 상황이 벌어져서다. 독일·멕시코·스웨덴의 F조보다는 폴란드·콜롬비아·세네갈의 H조가 훨씬 나아 보였다. “제발 H조로~.” 그런데 이탈리아 축구의 레전드 파비오 칸나바로가 뽑은 건 한국, 우리가 F조였다. 행운의 여신이 외면한 걸까.
4년 전 브라질 월드컵이 떠올랐다. 당시 우리는 벨기에·러시아·알제리와 H조에 편성됐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역대 최고의 조 편성’ ‘행운의 여신 만난 홍명보호’라는 환호가 쏟아졌다. 결과는 참담했다. 1무2패로 예선 탈락. 2002 월드컵 4강 신화를 썼던 홍명보 감독은 만신창이가 됐다. 스타 감독의 실패였다.
이번 조 편성이 4년 전보다 나쁜 건 분명하다. 독일·멕시코·스웨덴의 ‘승수 자판기’가 될 거란 자조가 나온다.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다. FIFA 랭킹을 단순 합산해 보면 우리가 최악의 조는 아니다. 1위 독일, 16위 멕시코, 18위 스웨덴, 59위 한국의 숫자를 합치면 ‘94’. 전체 8개 조 중 다섯 번째다. C조(프랑스 9+페루 11+덴마크 12+호주 39)가 71로 가장 치열하고, E조(브라질 2+스위스 8+코스타리카 26+세르비아 37=73), B조(포르투갈 3+스페인 6+이란 32+모로코 40=81) 순이다. 일본이 열광한 H조는 98이다.
FIFA 랭킹 단순 합산 숫자에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다만 최악의 ‘죽음의 조’는 아니라는 위안의 근거로 삼을 순 있지 않을까. 4년 전 펑펑 울었던 손흥민의 소감. “어느 팀이든 우리보다 강팀이다. 공은 둥글다. 해볼 만하다.” 그렇다. 공은 둥글다. 신태용 감독이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한국형 압박축구와 조직력은 어디 갔나. 국민이 걱정하는 건 죽음의 조가 아니라 엉성한 전술이다.
양영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