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2017 이슈 배틀

“관행 깨려면 충격 필요” 토론 뒤 블라인드 채용 찬반 4:5 → 5: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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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장원석 기자 중앙일보 기자

⑨ 정부, 블라인드 채용 옳은가

‘서로 다르다’가 아니라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는 진영 논리가 판친다. 이를 극복하지 않고선 국가 개혁은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다. 중앙일보는 연중 기획으로 ‘2017 이슈 배틀’ 시리즈를 싣고 있다. 한국사회과학협의회·안민정책포럼이 공동 주최하고, 한국연구재단이 후원하는 SSK 네트워킹지원사업단이 주관한다.

정부, 블라인드 채용

정부, 블라인드 채용

1 Round

문 대통령 공약 블라인드 채용
찬성 4, 반대 5 팽팽하게 출발
◆사전투표=2007년 정부는 공공기관 채용 때 성별·신체조건·연령에 따라 자격을 제한할 수 없도록 하는 전형기준 개선안을 발표했다. 10년이 지나 정부가 더 강력한 카드를 꺼냈다. 입사지원서에 출신지역·신체조건·학력·학점 등의 항목을 아예 빼기로 한 것이다. 이른바 ‘블라인드 채용’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블라인드 채용을 의무화해 민간으로 확대하겠다”고 공약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7월 추진계획을 발표하고, 하반기부터 공공부문에 적용하기로 했다. 인종이나 나이·성별 등 인권과 직결된 차별을 막겠다는 점에는 큰 이견이 없다. 그러나 학력과 학점까지 가려야 하느냐에 대해선 논쟁이 치열하다. 찬성 측은 ‘학력과 학점에도 부모의 재력·영향력이 개입한다’고 보지만 반대 측에선 ‘개인의 정당한 노력과 성취마저 부정해선 안 된다’고 반박한다.

11월 10일 ‘2017 이슈 배틀’ 아홉 번째 토론이 열렸다. ‘학력·학점을 포함한 블라인드 채용’을 놓고 사전투표를 했다. 4명이 ‘찬성’을, 5명이 ‘반대’를 택해 팽팽하게 출발했다.

2 Round 

“능력만 봐야” “오히려 불공정”
찬반 1명씩 반대편으로 이동”
◆전문가 의견 청취=찬성 측 강순희 경기대 직업학과 교수가 선공에 나섰다. “취업을 위해 필요 없는 스펙 쌓기에 매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대학 간의 서열화와 학벌주의가 더욱 공고화됐고, 보이지 않는 차별이 자리를 잡았다. 블라인드 채용은 불필요한 요소를 배제하고 능력만을 보고 뽑자는 취지다.”

반대 측 장재윤 서강대 심리학과 교수도 밀리지 않았다. “열심히 공부해 좋은 대학에 진학했고, 또 열심히 공부해 좋은 학점을 받았다. 학력과 학점은 지원자의 성취도를 평가할 가장 선명한 시그널이다. 이 중요한 정보를 빼면 성실한 지원자를 도리어 불리한 환경에 내모는 것일 수 있다.”

이에 강 교수는 “학력과 학점 없이도 능력을 검증할 방법은 있다”고 맞받았다. 그는 “이미 공공기관은 국가직무능력표준(NCS)에 기반한 능력중심채용을 도입했다”며 “직무와 무관한 기재사항은 최소화하지만 직무수행에 필요한 자격·경험·경력 등은 얼마든지 서술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장 교수는 “학력과 학점을 가린 블라인드 채용을 국가적으로 추진하는 건 유례가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인종·성별·출신지 등을 가리는 건 흔하지만 학력이나 학점까지 제한하는 건 엔지니어링이나 디자인 등 직무가 명확한 영역에서만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전문가가 자리를 떴다. 양측에서 각각 한 명씩 생각을 바꿔 반대 편으로 이동했다. 반대로 이동한 판정단①은 “채용 비리부터 단죄하는 게 해법이라는 의견에 동의했다”고 말했다. 반대를 택했던 판정단⑨는 “쓸모 없는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의견에 공감했다”며 찬성으로 이동했다.

3 Round

“부모가 능력 있으면 스펙도 인턴 자리도 만들어줘”
“TV 사러 갔는데 삼성인지 LG인지도 모르고 살 건가“
◆집중토론=반대 측이 선공에 나섰다. 판정단⑤는 “블라인드 채용을 도입하더라도 그건 기업이 스스로 택해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기업마다 원하는 인재가 있을 것이고, 그것은 경영진의 고유한 판단 영역이다. TV를 사러 갔는데 삼성전자인지 LG전자인지도 모르고 살 순 없지 않나?”<판정단⑥>

찬성 측 판정단③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실력으로만 대결하는 복면가왕을 보면서 편견의 무서움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부모의 경제적·사회적 위치에 따라 자녀의 교육 여건이 달라진다. 부모가 능력이 있으면 스펙도 만들고 주고, 인턴 자리도 알아봐주는 게 지금의 현실 아닌가? 그런 보이지 않는 출발선의 격차가 최종학력과 학점에도 영향을 주고, 결국 채용 과정에서 당락을 결정한다. 고질적인 학벌주의를 완화하는 시발점이 될 수 있다.”<판정단②>

이에 대해 판정단⑧은 “복면가왕은 노래라는 정확한 직무가 주어졌기 때문에 평가도 공정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공기업이나 대기업은 특정 시즌에 맞춰 한꺼번에 신규 채용을 한다. 직무별로 구분해 뽑기도 하지만 말 그대로 분류 수준이고, 세부 직무는 입사를 해야 배운다. 공채 문화하에서 직무 능력만 보고 채용을 하면 기업도 지원자도 곤란해질 수밖에 없다. 특히 지원자는 직무 경험을 쌓는다고 또 다른 지출을 해야 한다.”<판정단⑦>

그러자 판정단④는 “그런 인식은 채용을 지원자가 아닌 기업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이라고 반박했다.

“한국은 육성보다 선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고교 교육은 대학 입시, 대학 교육은 취업 관문 돌파만을 생각한다. 기업도 괜찮은 인재를 뽑을 생각만 하지 투자해 키울 생각은 안 한다. 블라인드 채용의 활성화는 사회 전반적으로 육성의 문화를 확산시키는 데도 기여할 것으로 본다.”<판정단③>

그러자 판정단①은 “재교육 등을 통해 인사담당자의 태도 변화를 유도하는 게 가장 현명한 해결책”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판정단⑨는 “그런 식으로 해결될 문제였으면 차별하는 기업도, 채용 비리도, 학벌주의가 심화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최종 투표가 시작됐다. 반대를 택했던 판정단⑧이 입장을 바꾸면서 결과는 찬성 5, 반대 4로 역전됐다. 판정단⑧의 공감을 끌어낸 건 판정단②의 이 한마디였다.

정부, 블라인드 채용

정부, 블라인드 채용

“블라인드 채용을 도입한다고 엄청난 비효율이 발생하는 건 아니다. 역차별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 자체가 그동안 좋은 대학 출신이 이른바 좋은 직장을 과점해왔다는 방증 아닌가? 오랜 문화와 역사가 반영된 제도를 깨려면 충격적인 액션이 필요하다. 지금이 바로 그런 시점이고, 젊은 세대에게 ‘미래는 공정할 것’이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장원석 기자 jang.wonseo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