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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글로벌 줌업]살벌한 이스라엘 '모사드' 정권교체를 걱정않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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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글로벌 줌업] 모사드 <상>  

국가정보원이 숨 돌릴 틈 없이 펀치를 맞고 있다. 예산 삭감에 조직과 역할 축소, 명칭 변경까지 요구받는다. 전직 원장들이 줄줄이 구속되기까지 했다. 이에 대해 여당은 국정원이 이전 정권에서 정치 개입에 나섰다고 비난한다. 반면 야당은 정보기관 본연의 정보 능력 저하와 활동 침체를 우려한다. 서로 할 말이 많다.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상> #이스라엘 해외정보공작기관 모사드 #국가안보 위해 '미션 임파서블' 수행 #정치적 중립 지키며 국민 지지 얻어 #정치권, 기관장 자리와 명예 지켜줘 #능력·의지로 적은 물론 우방도 겁내 #

모사드 로고. 모사드는 &#39;정보 및 특수작전 연구소&#39;라는 뜻의 길다란 헤브루어 이름의 약자다. 이름은 연구소지만 연구보다 실천이 우선인 조직이다. &#34;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34;라는 구약성서 잠언 11장 14절을 실천하는 조직이다. 정보기관의 성과는 국가안보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실증한 조직이기도 하다. [출처=모사드 홈페이지]

모사드 로고. 모사드는 &#39;정보 및 특수작전 연구소&#39;라는 뜻의 길다란 헤브루어 이름의 약자다. 이름은 연구소지만 연구보다 실천이 우선인 조직이다. &#34;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34;라는 구약성서 잠언 11장 14절을 실천하는 조직이다. 정보기관의 성과는 국가안보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실증한 조직이기도 하다. [출처=모사드 홈페이지]

이런 상황에서 바람직한 정보기관과 그 수장의 자격과 업무, 그리고 자세를 해외 사례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 세계 정보기관은 서로 장단점이 있지만, 이스라엘의 모사드는 자타가 공인하는 벤치마킹 대상이다. 모사드는 대부분의 국가 정보기관과 마찬가지로 오로지 국민과 국가를 위해 묵묵히 할 일을 할 뿐이다. 피 냄새를 마다치 않고 은밀하고 살벌한 정보와 공작의 세계를 지켜온 모사드 국장은 정권 교체와 별 상관없이 임무를 수행해왔다. 국가의 사활이 걸린 정보 수집과 정세 판단으로 국가안보를 지킴으로써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시켰기 때문이다.

현직인 12대 모사드 국장 요시 코헨(2016년~현재).  건국 전 시오니스트 민병대인 이르군 요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30년간 모사드에 근무하며 해외 정보수집에 주력했다. 히브리어는 물론 영어, 프랑스어, 아랍어에 능통하다. 모사드 재임 중 총리 안보보좌관으로 잠깐 옮겼다가 국장으로 복귀했다. 옷을 잘 입어 별명이 ‘모델’이다. 하지만 모사드 요원을 외모로만 평가할 순 없다. 그는 유능한 현장요원이자 엄격한 보스로만 알려졌다. 어떤 일을 어떻게 했기에 이런 평가를 얻었는지는 비밀이다. [출처=모사드 홈페이지]

현직인 12대 모사드 국장 요시 코헨(2016년~현재). 건국 전 시오니스트 민병대인 이르군 요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30년간 모사드에 근무하며 해외 정보수집에 주력했다. 히브리어는 물론 영어, 프랑스어, 아랍어에 능통하다. 모사드 재임 중 총리 안보보좌관으로 잠깐 옮겼다가 국장으로 복귀했다. 옷을 잘 입어 별명이 ‘모델’이다. 하지만 모사드 요원을 외모로만 평가할 순 없다. 그는 유능한 현장요원이자 엄격한 보스로만 알려졌다. 어떤 일을 어떻게 했기에 이런 평가를 얻었는지는 비밀이다. [출처=모사드 홈페이지]

이에 따라 선출된 권력인 정치권조차 모사드를 비롯한 정보기관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한정된 기간 권력을 위임받은 정권보다 국가와 운명을 함께하는 정보기관을 국민이 더 믿고 지지하기 때문이다. 물불을 가리지 않는 요원들 덕분에 서방의 접근이 극히 어려운 이란, 시리아 등에 침투해 얻은 고급정보를 풍부하게 보유해 국제적으로도 경외의 대상이다. 미국이나 러시아가 이스라엘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초대 모사드 국장 레벤 실로아흐(1949~53년 재임). 모사드가 창립도 되기 전에 아랍의 이스라엘 공격 정보를 입수해 다비드 벤구리온 총리에 제출함으로써 정보기관 설립의 필요성을 인식시켰다. [출처=모사드 홈페이지]

초대 모사드 국장 레벤 실로아흐(1949~53년 재임). 모사드가 창립도 되기 전에 아랍의 이스라엘 공격 정보를 입수해 다비드 벤구리온 총리에 제출함으로써 정보기관 설립의 필요성을 인식시켰다. [출처=모사드 홈페이지]

모사드는 이스라엘의 해외 정보공작기관이다. 국경 밖에서 전 세계를 상대로 벌이는 모든 정보수집과 암살·납치, 역정보 흘리기 등 공작활동을 담당한다. 국내보안국인 신베트(Shin Bet, 샤박(Shabak)이라고도 함), 군정보국인 아만(Aman)과 함께 국가정보라는 ‘음지’를 책임진다. 국내와 점령지인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와 골란고원에서 벌이는 모든 임무는 신베트의 관할이다. 군은 별도로 활동한다.

2대 모사드 국장 이세르 하렐(1953~63년 재임). 홀로코스트를 기획한 나치 인사 아돌프 아이히만을 1960년 아르헨티나에서 찾아 압송해 재판정에 세웠다. 이로써 모사드의 집념과 능력은 전 세계에 알려졌다. [출처=모사드 홈페이지]

2대 모사드 국장 이세르 하렐(1953~63년 재임). 홀로코스트를 기획한 나치 인사 아돌프 아이히만을 1960년 아르헨티나에서 찾아 압송해 재판정에 세웠다. 이로써 모사드의 집념과 능력은 전 세계에 알려졌다. [출처=모사드 홈페이지]

모사드는 1947년부터 활동을 해왔지만 공식 창설은 49년이다. 이후 68년간 12명의 국장이 정보와 공작이라는 양날의 칼을 들고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기관’을 이끌어왔다. 모사드 업무는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는 구약성서 잠언 11장14절 구절로 요약된다. 이는 모사드의 존재 이유다. 모사드 국장은 1200명(추정)의 요원과 함께 온몸으로 이 모토를 실천한다. 국민 안전과 국익에 도움이 되는 일은 뭐든지 수행하고 절대 입을 열지 않아 ‘침묵의 구원자’로 통한다.

3대 모사드 국장 메이어 아미트(1963~68년 재임). 모사드의 &#39;전설적 스파이&#39; 엘리 코헨을 시리 고위층 깊숙이 침투시켜 &#39;6일전쟁&#39; 당시 생생한 정보를 빼내 적을 유린하는 데 기여했다. [출처=모사드 홈페이지]

3대 모사드 국장 메이어 아미트(1963~68년 재임). 모사드의 &#39;전설적 스파이&#39; 엘리 코헨을 시리 고위층 깊숙이 침투시켜 &#39;6일전쟁&#39; 당시 생생한 정보를 빼내 적을 유린하는 데 기여했다. [출처=모사드 홈페이지]

이스라엘에선 좌우할 것 없이 모든 정권이 모사드 국장의 자리를 안정적으로 보장해왔다. 모사드가 해외에서 벌인 ‘잔혹하고 비도덕적인 사건’으로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거나 국제법적 사법처리 가능성이 생기면 오히려 정치권이 나서서 방어하고 보호해왔다. 어떠한 도덕이나 국제법도 국민의 안위나 국익보다 위에 있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난 68년간 12명의 국장 중 2년간 재임한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4~10년씩 자리를 지켰다. 평균 5년 6개월 재임했다. 모사드 국장은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심,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용기, 그리고 정보와 작전 능력과 경험, 그리고 부하들이 목숨을 걸고 사지에 뛰어들게 만드는 리더십이 충만한 인물이 맡아왔다.

1948년 이스라엘 독립전쟁 당시 여성 전사가 수류탄 투척을 준비 중인 모습. 국가안보를 위해 목숨을 걸고, 갖은 지혜를 발휘하는 투철한 국가관의 소유자만이 모사드의 수장이 될 수 있다. [중앙포토]

1948년 이스라엘 독립전쟁 당시 여성 전사가 수류탄 투척을 준비 중인 모습. 국가안보를 위해 목숨을 걸고, 갖은 지혜를 발휘하는 투철한 국가관의 소유자만이 모사드의 수장이 될 수 있다. [중앙포토]

49년 취임한 초대 레벤 실로아흐 국장부터 1989년 물러난 6대 나훔 아드모니 국장까지는 48년 ‘이스라엘 독립전쟁’ 참전용사다. ‘이스라엘-아랍전쟁’ ‘제1차 중동전쟁’으로도 불리는 전쟁이다.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자 주변 아랍이슬람 국가가 일제히 공격해왔다. 나라를 지키는 데 남녀노소가 없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정보기관이 탄생했다. [중앙포토]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자 주변 아랍이슬람 국가가 일제히 공격해왔다. 나라를 지키는 데 남녀노소가 없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정보기관이 탄생했다. [중앙포토]

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자 이를 분쇄하려고 인근 이집트·시리아·요르단·레바논은 물론 이라크·사우디 아라비아와 파키스탄·수단·예멘 등 이슬람권 대부분이 공격에 나섰다. 신생국 이스라엘의 국민은 자국을 포위한 아랍·이슬람권 국가들과 온몸으로 맞서며 독립을 지켜냈다.

4대 모사드 국장 즈비 자미르(1968~73 재임).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에 참전했으며 재임 중 팔레스타인 무장조직 ‘검은 9월단’의 ‘뮌헨 학살’을 보복한 ‘신의 분노’ 작전을 수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모사드 홈페이지]

4대 모사드 국장 즈비 자미르(1968~73 재임).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에 참전했으며 재임 중 팔레스타인 무장조직 ‘검은 9월단’의 ‘뮌헨 학살’을 보복한 ‘신의 분노’ 작전을 수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모사드 홈페이지]

뿐만 아니다. 모사드 수장 대부분은 군에서 상당한 전공을 쌓은 ‘무골’이다. 역대 국장 12명 중 4명이 군 고위 장성 출신이다. 6대 아드모니 국장은 군 정보기관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다 모사드 부국장을 거쳐 국장을 맡았다.

1973년 욤키푸르 전쟁 당시 이스라엘군 기갑부대가 부교를 통해 수에즈 운하를 건너 이집트 본토로 향하고 있다. 당시 이집트군의 기습에 허를 찔려 항공과 기갑 전력의 상당 부분을 상실한 이스라엘군은 필사적인 반격으로 수에즈 운하를 건너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통해 간신히 휴전을 이룰 수 있었다. 적의 공격 징후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39;정보 실패&#39;가 전쟁 초기에 밀린 원인으로 분석된다. [중앙포토]

1973년 욤키푸르 전쟁 당시 이스라엘군 기갑부대가 부교를 통해 수에즈 운하를 건너 이집트 본토로 향하고 있다. 당시 이집트군의 기습에 허를 찔려 항공과 기갑 전력의 상당 부분을 상실한 이스라엘군은 필사적인 반격으로 수에즈 운하를 건너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통해 간신히 휴전을 이룰 수 있었다. 적의 공격 징후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39;정보 실패&#39;가 전쟁 초기에 밀린 원인으로 분석된다. [중앙포토]

5대 호피 국장은 73년 소련제 최신무기를 갖추고 기습한 아랍권에 밀려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던 ‘욤키푸르 전쟁’ 당시 북부군 사령관으로서 전세 역전에 기여한 전쟁영웅이다. 그는 전쟁 직후 국장을 맡아 조직과 임무를 대대적으로 개혁했다. 모사드를 포함한 이스라엘의 정보당국이 연이은 승리에 취해 적인 아랍권을 얕잡아 보는 바람에 기습 징후를 조기 경보하지 못한 ‘정보 실패’로 이어졌다는 처절한 반성 때문이었다.

1973년 시나이 반도에서 파괴된 이스라엘군 주력전차 M60A1이 방치돼 있다. 당시 이스라엘군은 소련제 최신 방공과 대전차 무기로 무장한 이집트군의 기습에 당해 항공과 기갑 전력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 아랍권을 얕잡아본 &#39;정보 실패&#39;가 원인으로 분석돼 전후 이스라엘 정보기관들은 대대적인 혁신이 나섰다. [중앙포토]

1973년 시나이 반도에서 파괴된 이스라엘군 주력전차 M60A1이 방치돼 있다. 당시 이스라엘군은 소련제 최신 방공과 대전차 무기로 무장한 이집트군의 기습에 당해 항공과 기갑 전력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 아랍권을 얕잡아본 &#39;정보 실패&#39;가 원인으로 분석돼 전후 이스라엘 정보기관들은 대대적인 혁신이 나섰다. [중앙포토]

정보 실패로 군이 적군에 유린당하고 장병이 희생되는 과정을 현장에서 목격한 호피가 국장을 맡음으로써 개혁이 순조롭게 이뤄질 수 있었다는 평가다. 이후 모사드는 효율을 극대화해 새로운 정보기관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5대 모사드 국장 이츠하크 호피(1973~82년 재임).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에 참전했으며 1973년 욤키푸르 전쟁 당시 북부군 사령관을 지냈다. 팔레스타인이 납치해 우간다로 끌고간 여객기 승객을 구출하는 ‘엔테베 작전’을 주도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라크 핵시설 폭격 ‘오페라 작전’을 주도한 것으로도 짐작된다. 뮌헨올림픽 당시 이스라엘 선수 학살을 기획한 검은9월단의 &#39;황태자&#39; 살라메의 암살에 개입 또는 주도한 것으로도 추정된다. [출처=모사드 홈페이지]

5대 모사드 국장 이츠하크 호피(1973~82년 재임).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에 참전했으며 1973년 욤키푸르 전쟁 당시 북부군 사령관을 지냈다. 팔레스타인이 납치해 우간다로 끌고간 여객기 승객을 구출하는 ‘엔테베 작전’을 주도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라크 핵시설 폭격 ‘오페라 작전’을 주도한 것으로도 짐작된다. 뮌헨올림픽 당시 이스라엘 선수 학살을 기획한 검은9월단의 &#39;황태자&#39; 살라메의 암살에 개입 또는 주도한 것으로도 추정된다. [출처=모사드 홈페이지]

역대 모사드 국장은 성과로 말한다. 대부분 재임 중 굵직한 업적을 남겼다. 초대 실로아흐 국장은 모사드가 창설되기도 전인 이스라엘 독립전쟁 당시 아랍권의 침공계획을 입수해 다비드 벤구리온 초대 총리에게 전달했다. 정보의 중요성을 절감한 벤구리온은 모사드 창설을 결심했다.

모사드는 아르헨티나에서 신분을 감추고 숨어살던 나치 &#39;홀로코스트 기획자&#39;인 아돌프 아이히만을 1960년 찾아내 이스라엘로 압송했다. 아이히만은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고 교수형으로 처형됐다. [중앙포토]

모사드는 아르헨티나에서 신분을 감추고 숨어살던 나치 &#39;홀로코스트 기획자&#39;인 아돌프 아이히만을 1960년 찾아내 이스라엘로 압송했다. 아이히만은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고 교수형으로 처형됐다. [중앙포토]

2대 이세르 하렐 국장은 모사드란 이름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기획한 아돌프 아이히만을 60년 도피지인 아르헨티나에서 이스라엘로 압송해 재판정에 세웠다.

6대 모사드 국장 나훔 아드모니(1982~89년).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에 참전했으며 군정보기관에서 근무하다 모사드 부국장을 거쳐 국장이 됐다. 재임 중 이스라엘이 미국 상대로 첩보활동 벌인 ‘조내선 폴라드 사건’이 터지고 ‘이스라엘 핵개발 프로그램’이 내부 고발자에 의해 폭로되는 등 ‘고난의 시절’ 묵묵히 이겨냈다. 모사드에도 고난의 계절은 있었다. [출처=모사드 홈페이지]

6대 모사드 국장 나훔 아드모니(1982~89년).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에 참전했으며 군정보기관에서 근무하다 모사드 부국장을 거쳐 국장이 됐다. 재임 중 이스라엘이 미국 상대로 첩보활동 벌인 ‘조내선 폴라드 사건’이 터지고 ‘이스라엘 핵개발 프로그램’이 내부 고발자에 의해 폭로되는 등 ‘고난의 시절’ 묵묵히 이겨냈다. 모사드에도 고난의 계절은 있었다. [출처=모사드 홈페이지]

3대 메이어 아미트 국장은 ‘전설의 스파이’ 엘리 코헨을 시리아의 고위층 깊숙이 침투시켜 ‘6일전쟁’ 당시 적의 일거수일투족을 손금 보듯 하며 정보전과 전쟁에서 완승하는 데 기여했다.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자 주변 아랍이슬람 국가가 일제히 공격해왔다. 나라를 지키는 데 남녀노소가 없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정보기관이 탄생했다. [중앙포토]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자 주변 아랍이슬람 국가가 일제히 공격해왔다. 나라를 지키는 데 남녀노소가 없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정보기관이 탄생했다. [중앙포토]

4대 즈비 자미르는 72년 뮌헨올림픽 당시 팔레스타인의 무장조직 ‘검은9월단’이 이스라엘 선수단을 학살한 데 대한 보복인 ‘신의 분노’ 작전을 기획했다. 영화 ‘뮌헨’으로 유명한 이 작전은 국제적으로 도덕적인 비난을 받았지만 이스라엘의 의지와 집념, 모사드의 작전능력을 잘 보여줬다.

7대 모사드 국장 샤브타이 샤비트(1989~96년 재임) 이스라엘판 델타포스인 특수부대 ‘사예렛 메트칼’ 출신이다. 남부군 사령관을 지낸 장성 출신이다. 재임 기간 은밀하게 작전 수행해 업적이 외부로 알려지지 않있다. 하지만 1995년 11월 평화주의자 이차크 라빈 총리가 극우 청년에게 암살되는 사건(모사드 담당은 아님) 등을 겪으며 힘든 시절을 보냈다. [출처=모사드 홈페이지]

7대 모사드 국장 샤브타이 샤비트(1989~96년 재임) 이스라엘판 델타포스인 특수부대 ‘사예렛 메트칼’ 출신이다. 남부군 사령관을 지낸 장성 출신이다. 재임 기간 은밀하게 작전 수행해 업적이 외부로 알려지지 않있다. 하지만 1995년 11월 평화주의자 이차크 라빈 총리가 극우 청년에게 암살되는 사건(모사드 담당은 아님) 등을 겪으며 힘든 시절을 보냈다. [출처=모사드 홈페이지]

5대 호피 국장은 팔레스타인 무장조직에 납치돼 우간다에 기착해있던 여객기 승객을 구출한 ‘엔테베 작전’을 주도했다. 이라크가 핵시설을 가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해 군이 이를 폭격해서 파괴한 ‘오페라 작전’에도 기여했다.

이스라엘의 엔테베 작전 뒤의 우간다 엔테베 공항 모습. 우간다 공군 소속 소련제 미그기가 남김 없이 파괴됐다. 모사드는 미리 공항 지도와 구출 수송기를 해칠 수 있는 전투기 상황을 파악했을 뿐 아니라 항로상 국가들과의 협상도 맡았다. [중앙포토]

이스라엘의 엔테베 작전 뒤의 우간다 엔테베 공항 모습. 우간다 공군 소속 소련제 미그기가 남김 없이 파괴됐다. 모사드는 미리 공항 지도와 구출 수송기를 해칠 수 있는 전투기 상황을 파악했을 뿐 아니라 항로상 국가들과의 협상도 맡았다. [중앙포토]

이라크 폭격이라는 정치적 결단읕 정치권이 내렸지만 이를 차질 없이 하기 위한 정확한 정보 수집과 작전 지원은 모사드의 작품일 수 밖에 없다. 뮌헨학살 기획자로 ‘검은 9월단의 황태자’로 알려진 알리 하산 살라메를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제거한 작전도 기획했다.

엔테베 작전 뒤 구출된 피랍 여객기 승객들이 돌아오고 있다. 작전을 주도한 특수부대의 요나단 네타냐후는 이 작전의 유일한 희생자가 됐다. 그의 동생 베냐민도 특수부대를 거쳐 현재 이스라엘 총리를 맡고 있다. [중앙포토]

엔테베 작전 뒤 구출된 피랍 여객기 승객들이 돌아오고 있다. 작전을 주도한 특수부대의 요나단 네타냐후는 이 작전의 유일한 희생자가 됐다. 그의 동생 베냐민도 특수부대를 거쳐 현재 이스라엘 총리를 맡고 있다. [중앙포토]

모사드는 이 모든 작전 개입을 인정도 부인도 하지 않는다. 다만 침묵으로 대응할 뿐이다. 모든 작전은 비밀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런 모사드가 정치적 중립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내부의 의지와 정치권의 정보기관 명예 존중, 그리고 국민의 지지 때문이다. 그들은 정치권은 물론 '신의 분노'도 두렵지 않았다. 두려운 건 국가안보가 위태로운 것뿐이었다.

8대 모사드 국장 다니 야톰(1996~98년 재임). 특수부대 사예렛 메트칼 부사령관 출신이다. 중부군 사령관을 지낸 장성 출신이기도 하다. 은밀하게 작전 수행해 업적이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다. 모사드 국장 퇴진 뒤 에후드 바라크 총리의 비서실장, 안보보좌관, 노동당 국회의원을 지내면서도 정보기관의 내부 일에 대해 입이 무겁기는 마찬가지였다. [출처=모사드 홈페이지]

8대 모사드 국장 다니 야톰(1996~98년 재임). 특수부대 사예렛 메트칼 부사령관 출신이다. 중부군 사령관을 지낸 장성 출신이기도 하다. 은밀하게 작전 수행해 업적이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다. 모사드 국장 퇴진 뒤 에후드 바라크 총리의 비서실장, 안보보좌관, 노동당 국회의원을 지내면서도 정보기관의 내부 일에 대해 입이 무겁기는 마찬가지였다. [출처=모사드 홈페이지]

[S BOX] 이스라엘판 델타포스 '사예렛 메트칼' 출신 국장 3명

역대 모사드 국장들의 경력 중 특이한 것은 이스라엘군 엘리트 특수부대인 ‘사예렛 메트칼’ 출신이 많다는 점이다. 7대 샤브타이 샤비트, 8대 다니 야톰, 10대 메이어 드간, 11대 타미르 파르도가 이 부대 출신이다. 사예렛 메트칼은 한마디로 목숨을 내놓고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전 부대다.

별명이 ‘이스라엘판 델타포스’로 적 후방 깊숙이 침투해 수색정찰을 수행한다. 전선의 현장 정보를 입수하고 국경 너머에서 인질을 구출하거나 요인을 저격하는 임무를 맡는다. 목숨이 오가는 ‘불가능한 작전(Mission Impossible)’을 숱하게 성공시켜 조국을 더욱 안전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 이와 함께 작전 내용은 일절 비밀에 부친다는 점에서 모사드와 성격이 통한다.

9대 모사드 국장 에프라임 할레비(1998~2002년 재임) 변호사와 잡지 편집장으로 일하다 모사드에 들어가 현장요원으로 28년간 근무했다. 모사드 국장으로는 드물게 특수부대 출신이 아니다. 이스라엘-요르단 평화협정을 주도한 것으로 추정되며 팔레스타인 강경파 하마스 지도자 암살작전도 주도한 것으로 짐작된다. 납치요원의 구출작전을 성공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출처=모사드 홈페이지]

9대 모사드 국장 에프라임 할레비(1998~2002년 재임) 변호사와 잡지 편집장으로 일하다 모사드에 들어가 현장요원으로 28년간 근무했다. 모사드 국장으로는 드물게 특수부대 출신이 아니다. 이스라엘-요르단 평화협정을 주도한 것으로 추정되며 팔레스타인 강경파 하마스 지도자 암살작전도 주도한 것으로 짐작된다. 납치요원의 구출작전을 성공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출처=모사드 홈페이지]

벤냐민 네타냐후 총리와 엔테베 작전의 영웅으로 현장에서 전사한 요나단 네타냐후 형제, 에후드 바라크 전 총리 등도 이 부대에서 근무했다. 파르도 국장은 군 복무 시절 엔테베 작전에 직접 참여했다.

10대 모사드 국장 메이어 다간(2002~2011년) 홀로코스트 희생자 가족이다. 특수부대 사예렛 메트칼을 거쳐 공수부대에서 근무했다. 1967년 ‘6일전쟁’에 참전했다. 1971년 수류탄 든 팔레스타인 테러범을 제압해 용맹메달을 받았다. 1973년 ‘욤 키푸르 전쟁’, 1982년 ‘레바논 전쟁’에 참전했다. 32년간 군복무 뒤 소장으로 전역해 모사드에 들어갔다. 재임 중 외국인 테러리스트를 적발해 사전에 사살함으로써 민간인 상대 테러 4건을 예방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세한 내용은 비밀이다. 정보기관의 활동과 내부에서 있었던 일은 적에게 알려지면 알려질 수록 국가안보에 불리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34;조직, 정보, 작전에서 대대적인 자체 혁신을 했다&#34;는 칭찬을 받았으나 그 내용도 비밀이다. [출처=모사드 홈페이지]

10대 모사드 국장 메이어 다간(2002~2011년) 홀로코스트 희생자 가족이다. 특수부대 사예렛 메트칼을 거쳐 공수부대에서 근무했다. 1967년 ‘6일전쟁’에 참전했다. 1971년 수류탄 든 팔레스타인 테러범을 제압해 용맹메달을 받았다. 1973년 ‘욤 키푸르 전쟁’, 1982년 ‘레바논 전쟁’에 참전했다. 32년간 군복무 뒤 소장으로 전역해 모사드에 들어갔다. 재임 중 외국인 테러리스트를 적발해 사전에 사살함으로써 민간인 상대 테러 4건을 예방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세한 내용은 비밀이다. 정보기관의 활동과 내부에서 있었던 일은 적에게 알려지면 알려질 수록 국가안보에 불리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34;조직, 정보, 작전에서 대대적인 자체 혁신을 했다&#34;는 칭찬을 받았으나 그 내용도 비밀이다. [출처=모사드 홈페이지]

11대 모사드 국장 타미르 파르도(2011-2016년 재임). 특수부대 사예렛 메트칼을 거쳐 공군 대테러부대인 ‘샬다그’에서 근무했다. ‘엔테베 작전’에 참가했다. 전역 뒤 모사드에 들어가 작전 담당 ‘케셰트’ 부서장을 지냈다. 첨단 전자정보에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모사드 부국장 경쟁에서 탈락해 군 정보 고문으로 옮겼다가 모사드로 복귀해 부국장을 지내다 국장에 선임됐다. 재임 중 2011년 적국인 이란의 수도 테헤란 한복판에서 벌어진 대담한 핵기술자 암살 사건을 주도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모사드 홈페이지]

11대 모사드 국장 타미르 파르도(2011-2016년 재임). 특수부대 사예렛 메트칼을 거쳐 공군 대테러부대인 ‘샬다그’에서 근무했다. ‘엔테베 작전’에 참가했다. 전역 뒤 모사드에 들어가 작전 담당 ‘케셰트’ 부서장을 지냈다. 첨단 전자정보에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모사드 부국장 경쟁에서 탈락해 군 정보 고문으로 옮겼다가 모사드로 복귀해 부국장을 지내다 국장에 선임됐다. 재임 중 2011년 적국인 이란의 수도 테헤란 한복판에서 벌어진 대담한 핵기술자 암살 사건을 주도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모사드 홈페이지]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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