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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적 프로그램, 페미니즘 토크쇼…이 논란이 가치 있는 이유

중앙일보

입력

지난 27일 방송된 EBS '까칠남녀'의 한 장면. 이날 '까칠남녀'는 여자의 적은 여자인가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사진 EBS]

지난 27일 방송된 EBS '까칠남녀'의 한 장면. 이날 '까칠남녀'는 여자의 적은 여자인가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사진 EBS]

남성 중심적 문화에서 탈피하자는 '페미니즘'의 열기가 지난해부터 이어져 현재까지도 뜨겁다. 'GIRLS CAN DO ANYTHING', 'GIRLS Do Not Need A PRINCE' 등 문구가 찍힌 티셔츠는 불티나게 팔리고, 출판계에서도 페미니즘 서적의 출판이 잇따르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방송계에도 조금씩 일고 있는데, 지난 3월부터 시작한 교육방송 EBS의 프로그램 '까칠남녀'와 8월 초부터 방송하고 있는 온스타일 '뜨거운 사이다'와 '바디액츄얼리'가 그렇다.

올해 초부터 방송계에도 부는 페미니즘 #'까칠남녀' '뜨거운 사이다' '바디액츄얼리' #각종 논란 부르며 '시청 보이콧' 비판도 #민감한 젠더이슈 다루기에 자연스러운 현상 #"목소리 낼 수 있는 공론장 형성했다" 평가 #지나친 성대결, 자극적 소재는 한계로

그런데 이 방송들, '계속 방송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매번 자아낸다. 방송 후 수시로 논란이 일고, 시청자 소감 게시판에는 '당장 프로그램을 폐지하라'는 시청 보이콧이 잇따른다.

대표적 논란만 소개하자면, '까칠남녀'는 최근 '쇼타콤(쇼타로 콤플렉스·성적 대상으로 남아에 집착하는 것)' 논란을 겪었다. '까칠남녀'는 남녀 출연진이 나와 젠더 이슈에 관해 얘기를 나누는 토크쇼다. 여성 커뮤니티인 '워마드'의 사용자가 호주 어린이를 성폭행했다는 의혹이 일자 지난 9월 25일 방송에서 한 여성 출연진이 "롤리타 컨셉과 쇼타 컨셉이 똑같은 선상에서 얘기돼선 안 된다"는 취지로 한 말이 뒤늦게 부각됐다. '아동 성범죄를 옹호했다'거나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지난 8월에는 한 남성 출연진이 데이트 비용 문제에 관해 얘기하던 도중 "(데이트 비용 남자가 내길 바라는 여성의 태도는)넓은 의미로 보면 매춘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27일 방송 후 '까칠남녀'의 시청자 게시판 [사진 EBS]

27일 방송 후 '까칠남녀'의 시청자 게시판 [사진 EBS]

다른 프로그램들도 크고 작은 논란을 겪긴 마찬가지. '뜨거운 사이다'는 '맨스플레인('man'과 'explain'의 합성어·남성이 여성에게 가르치려는 태도)'에 대응해 젠더 이슈뿐 아니라 여러 사회 이슈를 토론하는 여성 출연진들의 토크쇼다. 지난 2일 방송된 '뜨거운 사이다'에서는 한 출연진이 '노브라'에 대해 토론하던 중 "남자의 성기를 개 입마개처럼 채워야 한다"고 해 적지 않은 비판을 받았다. 여성의 몸에 대해 탐구하는 온스타일 프로그램 '바디액츄얼리'는 수시로 선정성 논란에 휩싸인다.

'여성주의 토크쇼'로도 불리는 이 프로그램들이 수시로 도마 위에 오르는 모습은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이 얼마나 논쟁적인지를 한눈에 보여준다. 윤석진 대중문화평론가(충남대 국어국문학 교수)는 "한국에서 페미니즘은 그야말로 뜨거운 감자"라며 "예전보다 여성의 사회적 위상이 올라갔지만 여전히 약자라는 여성의 인식이 강하고, 여성에 대한 사회적·정책적 배려 때문에 오히려 역차별받고 있다는 남성의 인식이 확산되면서 '페미니즘' 논의 자체가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온스타일 '바디액츄얼리'의 온라인 게시물. 배우 정수영이 질염 검사를 받는 장면을 내보내며 '무삭제판'이란 소제목을 달았다. [사진 유튜브 온스타일 채널]

온스타일 '바디액츄얼리'의 온라인 게시물. 배우 정수영이 질염 검사를 받는 장면을 내보내며 '무삭제판'이란 소제목을 달았다. [사진 유튜브 온스타일 채널]

'방송'이란 한계는 민감한 젠더 이슈를 자극적으로 다루며 논란이 증폭시키기도 한다. '바디액츄얼리'는 지난 8월에 한 여성 출연진이 질염 검사를 받는 과정을 영상에 담아 온라인에 공개하면서 거기에 '무삭제판'이란 단어를 썼다가 선정성 논란이 일었다. '까칠남녀'는 남녀 수 균형을 맞춰 폭넓은 논의를 유도하지만 '성(性) 대결'로 번지며 논의가 멈추곤 한다. 27일 방송된 '까칠남녀'에서도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이 여성혐오 프레임이라는 지적이 있다"는 얘기에 방송인 정영진은 "세상에 여성 혐오 아닌 게 없다. 차 문 열어주면 나약한 존재로 본다고, 문 안 열어주면 약자 배려하지 않는다고 여성 혐오라고 한다"고 반박했다. 방송 후 시청자 게시판에는 "페미니즘 탈출은 지능 순" 등 비판 글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이 '논쟁적' 프로그램들이 던지는 사회적 의미는 작지 않다. 사회예술학자이자 『환대받을 권리, 환대할 용기 』저자인 이라영 작가는 "모든 논란을 한꺼번에 묶어 간단히 설명할 수는 없다"면서도 논란이 일어나는 현상 자체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논란은 말할 기회가 없던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다"는 얘기다. "글과 달리 말은 대중에게 다가가는 영향력이 크다. 말하기의 장이 흔치 않은 여성과 소수자들에게 이렇게라도 장이 생기고 목소리를 전할 기회는 분명히 의미가 있다"는 게 이라영 작가의 설명이다.

실제 젠더 이슈에 대해 지상파 방송사에서 공론화했던 토크쇼는 사실상 '까칠남녀'가 처음이다. 손희정 문화평론가는 "'바디액츄얼리'에서 첫 회에서 '월경'을 다뤘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임에도 선뜻 할 수 없었던 낯선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익숙하게 만들고 페미니즘 이슈를 토론하는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방송이 이어져야 한다"며 "남성과 여성이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사회적 합의를 끌어올 리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BS '까칠남녀' [사진 EBS]

EBS '까칠남녀' [사진 EBS]

다만 최태섭 문화평론가는 "방송이라는 한계 때문이긴 하지만 흥미 위주의 소재를 찾으려는 경향을 보이거나 듣기에는 시원시원하지만 논의의 맥락이나 역사를 배제하고 이뤄지는 '사이다' 비판이 많다"며 "이것이 양성 간 이해를 오히려 방해하거나 왜곡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고 우려했다.

'까칠남녀'의 김민지 PD는 "댓글이나 온라인에서만 오가던 극단적 논쟁을 수면으로 드러냈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김 PD는 "초기 강력한 여권 신장만을 주장했던 페미니즘도 모든 성별에 의한 차이를 극복하자는 개념으로 바뀌고 있음에도 여전히 '페미니즘' 자체를 혐오하고 오해하는 이들이 많다"며 "'맨박스(man box·가부장제 하에 남성에게 가해지는 억압)' 등 남성이 희생된 부분도 다루고 논의를 확장해나간다면 더욱 의미 있는 프로그램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젠더 관련 신조어

◇맨스플레인(mansplain)
'남자(man)'와 '설명하다(explain)'의 합성어. 특정 사안에 관해 남자가 거들먹거리며 일방적으로 설명하려는 태도를 일컫는 말이다. 2010년 뉴욕타임스는 '맨스플레인'을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 2014년 옥스포드 온라인 영어사전에 등재됐으며 우리나라에선 2015년 국내에 번역·출간된 레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통해 알려졌다.

◇맨박스(man-box)
토니 포터의 저서 'MAN BOX-남자다움에 갇힌 남자들'에서 따온 개념.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 사회에서 '남자'라는 이유로 받는 억압과 책임감 등을 일컫는 말.

노진호 기자 yesn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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