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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이엔 원래 아파요” 의사의 말이 더 아픈 노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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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그 나이엔 당연히 아파" "일 하려면 염색부터"…'을'이라서 서러운 노인 

고령사회 진입 계기 노인 차별 기획 <하편> 

"병원에서 의사에게 여기저기 아픈 곳을 말하면 '그 나이엔 당연한 겁니다'라고 합니다. 별다른 설명을 해주지 않고 나이 든 얘기만 하면 서운하죠. 더 잘 들어주고 알려주면 좋을 거 같아요."(70세 문희철 씨)

"대화를 안 해준다 이거에요. 내 병세가 이러저러하다고 말하면 들어줘야 하고, 거기에 대한 답변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의사가 무조건 주사를 맞으라거나 그냥 처방전만 준다니까요." (80대 여성 A 씨)

 지난달 초 서울 용산구의 한 경로당에서 70~90대 할머니 8명에게 최근 병원에 가서 의사를 만난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를 물었다. 3분 이상 진료를 받은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당뇨병·백내장을 앓는 오영자(78) 할머니는 "귀가 잘 안 들리거나 이해가 떨어지는 사람은 시간이 더 필요한데 진료실에 들어가자마자 금방 나올 때도 있다"고 말했다.

서울대병원에서 노인 환자를 챙기는 병원 직원. [중앙포토]

서울대병원에서 노인 환자를 챙기는 병원 직원. [중앙포토]

 한국은 지난해 11월 65세 이상 노인이 유소년(0~14세)을 추월했고, 올 8월 주민등록 기준 노인 인구가 전체의 14%를 넘어 고령사회에 진입했다. 그런데도 의료 현장은 '3분 진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용산구 경로당에서 만난 노인들 얘기처럼 이해력·청력이 떨어지면 더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데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서울대병원을 비롯한 일부 대학병원이 '15분 진료'를 표방하고 나섰지만 정작 이런 게 필요한 데는 '노인 진료실'인데도 변화의 바람이 불지 않는다.

<하편> 병 치료도, 돈 벌기도 쉽지 않은 노년 #'15분 진료' 노인 환자에 그림의 떡 #노년내과 있는 병원 6곳에 불과 #증세와 처방 더 상세히 설명 필요 #의료 현장에서 무시되기 쉬워 #취직하려면 "그 나이에 쉬어야지 #무슨 일을 하려느냐"며 무시하니 #나이 탓할까 봐 아파도 말 못하고 #참으며 일하러 다니는 경우 생겨

 지난 9월 초 오후 신촌세브란스병원 3층 노년내과 진료실에 고모(78·서울 서대문구) 씨가 들어섰다. 그는 척추 수술에 일주일 앞두고 합병증 위험과 정신 건강을 확인하러 방문했다.

"수술 과정에서 마취하는데 크게 세 가지 문제점이 생길 수 있어요. 섬망, 근력 약화, 인지기능 저하 등을 검사한 후에 결과를 보고 제가 또 설명해 드릴 거에요."

김광준 노년내과 교수는 고 씨에게 10분가량 몸짓을 섞어가며 큰 소리로 수술 과정 등을 알려줬다.

그 후 고 씨는 다른 방에서 노인 전문 간호사와 30분간 설문 조사와 상담을 진행했다. 현재 건강 상태와 우울증세, 식사량 등 수백가지 항목을 기재했다. '노인 포괄 평가'를 해서 수술이 적합한지를 체크한다. 이게 끝나자 김광준 교수한테 가서 다시 상담한다.

"점수가 좋아서요. 수술하는 교수님께 특별히 더 해야 할 건 없다고 말씀드릴 거에요. 수술 잘 받으세요." 

김 교수가 고 씨에게 이렇게 당부하면서 이날 진료가 끝난다. 총진료 시간은 46분. 의사 상담에만 15분가량 들어갔다. 고 씨는 만족감을 표했다.

"여러모로 건강 상태를 체크하고 궁금한 점을 들어줘서 고맙죠. 다른 병원에선 짧게 이야기하고 끝났는데 여기선 시간이 길어지니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어 좋았어요."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꼼꼼한 진료 꿈꾸지만 현실은 '퉁명스런 3분' 

한 요양병원에서 재활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 [중앙포토]

한 요양병원에서 재활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 [중앙포토]

병원을 찾는 대부분의 노인에겐 고 씨 같은 사례는 '그림의 떡'이다. 노년내과나 노인병센터를 개설한 6개 병원 정도만 이런 식으로 노인을 대한다. 국내 진료 수가는 시간을 고려하지 않는다. 환자를 3~5분씩 진료해서 총 30분 진료하면 15만원가량 진찰료 수입이 생기지만 고 씨처럼 오래 진료하면 3만원 정도밖에 안 된다.

 김광준 교수는 "의사는 질환 중심으로 환자를 치료하지만, 노인 환자는 '배가 아프다' '기운이 없다'는 식으로 증상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의사는 노인 환자의 표현을 이해하고 대화를 통해 역추적해서 치료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급격한 고령화 속에 노인들이 병원을 찾는 발길은 잦아지고 있다. 고혈압·당뇨병 등 만성질환을 앓고 있는 노인은 90.4%(2014년 기준)에 달한다. 2012년 16조3401억원이던 노인 건강보험 진료비는 지난해 25조187억원까지 늘었다.

노인 입원 환자로 가득한 요양병원 다인실. 입원이나 퇴원 결정은 대개 노인 자신보다 자녀의 몫인 경우가 많다. [중앙포토]

노인 입원 환자로 가득한 요양병원 다인실. 입원이나 퇴원 결정은 대개 노인 자신보다 자녀의 몫인 경우가 많다. [중앙포토]

  하지만 의료 만족도는 그에 따라가지 못한다. 지난해 의사의 진료 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환자 비율은 77.9%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사 대상 18개국 중 15위에 그쳤다. 한국 노년학회지(2013)에 실린 캐나다 토론토 약물중독정신건강연구소 김일호 박사 연구팀 논문에 따르면 충북에 사는 60~89세 남녀 345명의 11%가 '의료진이 고령 때문이라며 내 병을 과소평가했다'고 답했다. 일부(0.6%)는 치료를 거절당한 적 있다.

  ‘질’보다 ‘양’으로 가다 보면 노인의 병을 키우고 진료 만족도도 떨어진다. 심폐소생술 금지 요청서(DNR) 등 연명의료 결정은 가족이 나서는 경우가 많다. 서울대병원이 2009~2013년 임종 환자 635명을 조사했더니 99.4%가 가족이 DNR에 서명한 것으로 나타났다.

 석재은 한림대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노인들은 찬찬히 말하는 데다 이미 들은 것도 불안해서 재차 묻기도 한다. 그런데 병원 등에선 진료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짜증 내거나 제대로 대우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면서 "노인들에게 불친절이 이어진다면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될 수 있다. 우리 사회 시스템을 고령 친화적으로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나이 많다고 월급 깎아, 외모 지적도

한 아파트 경비원이 아침 일찍 단지 내 쓰레기를 치우고 있다. 노인들은 대부분 경비나 청소, 조리 등 비교적 단순한 업무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다. [중앙포토]

한 아파트 경비원이 아침 일찍 단지 내 쓰레기를 치우고 있다. 노인들은 대부분 경비나 청소, 조리 등 비교적 단순한 업무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다. [중앙포토]

고용시장에서 차별도 빼놓을 수 없다. 노후 준비가 덜 된 노인들은 노동시장에 내몰린다. 지난해 65세 이상 고용률은 30.7%다. 노인 10명 중 3명은 생업에 나서는 셈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불안정한 일자리다. 통계청에 따르면 농림어업(38.3%)이 제일 많고 경비ㆍ수위ㆍ청소(19.3%), 운송ㆍ건설(10.8%), 가사ㆍ조리ㆍ음식(8.2%) 등이 뒤를 이었다.

그러다 보니 임금도 젊은 세대보다 훨씬 열악한 수준이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에 따르면 15~49세 전일제 근로자의 평균 월급은 246만9000원(2014년 기준)이었다. 반면 65세 이상 노인 근로자는 그보다 100만원 가까이 적은 149만6000원에 그쳤다.

 K(70) 씨는 지난해 말 빌딩 경비원에 취업했는데 동료보다 월급이 적었다. 40~50대 직원들은 매달 150만원을 받았지만, K 씨만 130만원이었다. 노인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는 해고나 인사상 불이익을 우려해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하는 걸 포기했다.

지난해 말 부산에서 열린 장노년일자리 채용박람에 많은 구직자들이 몰려 서류를 작성하는 모습. [중앙포토]

지난해 말 부산에서 열린 장노년일자리 채용박람에 많은 구직자들이 몰려 서류를 작성하는 모습. [중앙포토]

나이 때문에 일을 하고 싶어도 못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김일호 박사 연구에 따르면 고용을 거절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11.9%였다. '당신이 그 일을 하기엔 너무 늙었다'는 말을 들었다는 비율도 23.7%에 달했다. 김병국(82ㆍ서울 은평구) 씨는 "나이 많다고 제외되는 일이 많죠. 국가에서 하는 공공근로사업도 70살 넘으면 안 된다. 정부부터 차별하는데 노인이 기업에서 차별받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고 꼬집었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 김문정 연구원 팀이 지난 5~6월 기업 1000곳의 인사 담당자를 조사한 결과 '나이가 들면 지능은 점점 더 떨어진다'는 데 동의한 비율이 58.2%에 달했다. '고령 노동자가 젊은이보다 일을 효과적으로 하지 못한다'에 54%가 동의했다. 60대 여성 B 씨는 "젊은 사람들 출근시간대에 지하철·버스를 타면 '왜 우리를 불편하게 하느냐'는 시선을 느낀다. 하지만 노인도 그 시간에 열심히 일하러 가는 거다"고 말했다.

지난 2008년 열린 고령자 고용촉진 캠페인 &#39;Working 60+&#39;. 어르신들이 슈퍼맨과 원더우먼 복장을 하고 홍보하고 있다. [중앙포토]

지난 2008년 열린 고령자 고용촉진 캠페인 &#39;Working 60+&#39;. 어르신들이 슈퍼맨과 원더우먼 복장을 하고 홍보하고 있다. [중앙포토]

심지어는 채용 전부터 '외모'를 지적하기도 한다.

"젊은 횟집 주인이 나더러 '아이 할머니 아니에요? 취직하려면 머리 염색을 하세요'라고 하더라고요.”(60대 여성 C 씨)  

2009년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 고용촉진에 관한 법률’(연령차별금지법)을 만들었다. 근로자의 모집과 해고 등에 연령을 제한할 수 없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거의 유명무실하다. '을'의 입장인 노인 근로자가 제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 청소 용역회사에 취직한 72세 노인은 체념한 채 말했다.

"인간답지 못한 모욕을 당한 적도 있지만 그런 걸 어떻게 합니까. 참고 넘어가는 거죠."

서울의 한 노인복지관 취업 담당 직원은 "기업들은 인건비가 싸면서도 상대적으로 건강하다고 여기는 65~70세 노인을 선호한다. 70세가 넘으면 일자리가 급격히 줄어든다"면서 "노인 근로자가 차별을 받아도 고발할 창구가 거의 없다. 스스로 노무사를 찾아가고 고용노동부에 신고해야 하는 실정이다"고 꼬집었다.

여전한 노인 차별

전문가 조언은 

생계를 위해 폐지가 담긴 손수레를 끌고 가는 노인. 퇴직 고령자를 위한 직업 훈련 활성화, 노인 고용 촉진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중앙포토]

생계를 위해 폐지가 담긴 손수레를 끌고 가는 노인. 퇴직 고령자를 위한 직업 훈련 활성화, 노인 고용 촉진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중앙포토]

박윤섭 공인노무사는 "어르신은 취직해도 대개 4대 보험 가입이 안 되는 사업장이 상당수다. 연령을 떠나서 똑같이 적용돼야 하는 임금과 수당, 연차휴가 등이 고령 근로자에게 불리하게 적용될 때가 많다"고 지적했다. 박 노무사는 "65세를 넘기면 정부도 노인 복지의 영역으로 보고 근로자를 잘 챙기지 않는다. 앞으로 노인 일자리 수요가 꾸준히 늘어나는 만큼 정부는 손 놓고 있지 말고 적극적인 대책을 내놔야 한다"고 강조했다.

허준수 숭실대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우리나라는 막연히 고령 근로자의 경륜과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측면이 강하다. 또한 법이 있어도 고령자 고용 촉진이 장애인 고용처럼 강제화되지 않고 명목상으로만 존재한다"면서 "퇴직을 앞둔 고령자를 위한 단기 직업 훈련을 활성화하고, 대기업ㆍ공공분야부터 법으로 보장된 노인 고용 촉진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신성식 복지전문기자, 이민영·정종훈·박정렬·백수진 기자 sssh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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