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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복마전 중의 복마전’ 강남재건축 수주전 요지경

중앙일보

입력

건설회사들 ‘쩐의 전쟁’에 조합원 매표(賣票) 행위 극심…“부재자투표 때가 화룡점정, 인증샷 보내 확인 후 입금해줘”

“지나가는 개도 5만원짜리 물고 다녔다”

조합원 매표 행위는 자유당 시절의 옛 이야기가 아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서울의 한복판에서 버젓이 일어나는 일이다. 지난 9~10월 강남에서 벌어진 재건축 수주전은 대형 건설회사들이 사활을 걸고 벌인 복마전이었다. 건설회사 주변과 재건축 조합원 등 다각도의 취재를 통해 당시 벌어진 상황들을 정밀 복기했다.

서울의 중산층이 모여 사는 강남의 아파트 숲, 지난 9~10월 강남에서 벌어진 재건축 수주전은 현대, GS, 롯데 등 대형 건설회사들이 사활을 걸고 벌인 복마전이었다.

서울의 중산층이 모여 사는 강남의 아파트 숲, 지난 9~10월 강남에서 벌어진 재건축 수주전은 현대, GS, 롯데 등 대형 건설회사들이 사활을 걸고 벌인 복마전이었다.

올 한 해 건설경기는 주춤했지만 강남 재건축 시장에선 총 사업비가 10조원 넘는 재건축 사업을 놓고 유례없는 진흙탕 싸움이 벌어졌다. 국토교통부가 나서서 대림·대우·롯데·GS·삼성·포스코·현대·현대산업개발 등 8개 건설사 임원들에게 금품 공세 금지와 과열경쟁 자제를 요청했을 정도로 극심한 혼탁상을 보였다. 특히 올가을, 현대·GS·롯데건설이 서울 강남에서 벌인 세 차례의 재건축 수주전은 업계에서 <삼국지>에 등장하는 위·오·촉 3국의 치열한 영토전쟁에 빗대어 회자될 만큼 ‘세기의 대결’이었다.

업계 1위인 현대건설은 ‘힐스테이트’라는 브랜드로 재건축 시장을 장악해온 건설업계 맏형이다. 강남에서는 압구정 현대아파트로 상징되는 전통의 강자였다. 현대건설은 부유한 강동을 근거지로 했던 오나라에 비견할 만했다. GS건설은 지난 몇 년 새 ‘자이’ 브랜드로 강남·북에 걸쳐 영토를 크게 넓히면서 강남 재건축 시장에서 현대를 위협하는 강자로 부상했다. 땅덩어리가 넓고 인재풀이 풍부한 위나라와도 같았다.

이에 비해 잠실의 롯데타운을 근거지로 하는 롯데건설은 두 건설사와 비교해 규모는 작지만 자본력이 탄탄한 신흥 강자다. ‘롯데캐슬’ 브랜드로 주로 도심의 중소 규모 재건축 시장에 뛰어들어 재미를 톡톡히 봐왔다. 롯데건설은 형주를 근거지로 중원 진출을 노리는 촉나라에 비유할 만했다. 지난 9월과 10월 이 세 건설회사가 강남에서 격돌했다. 건설업계의 판도가 바뀔 수 있을 정도로 덩치가 큰 수주전이었다. 건설업계가 바짝 긴장한 건 당연했다.

1차전은 반포주공1단지 1-2-4주구(住區) 재건축 시공사 결정전(9월 27일)이었다. 기존 2120가구를 5388가구로 재건축하는 이 사업은 공사비 2조7000억원을 포함해 총 사업비가 10조원에 달했다. 재건축 수주전 사상 최대 규모의 이 전쟁에 현대건설과 GS건설이라는 두 헤비급 건설사가 맞붙었다. 규모가 큰 만큼 치열한 난타전이 벌어졌다.

공사비 2조7000억, 반포1단지 꿰찬 현대건설  

반포주공1단지 총회에서 조합원들이 시공사 선정을 위한 투표를 하고 있다.

반포주공1단지 총회에서 조합원들이 시공사 선정을 위한 투표를 하고 있다.

현대건설은 돈 많은 조합원들에게 더 돈을 벌게 해주겠다며 ‘수익성’으로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5억원의 이주비 무이자 대여, 7000만원 이사비 지원 등 파격적인 안을 제시했다. 대출비용을 걱정하는 조합원을 위해 현대건설의 자체 신용으로 조합원 주택가액의 20%에 해당하는 금액을 금융 지원하는 이주비 대출서비스도 내놓았다. GS건설은 브랜드의 힘으로 맞섰다. 강남에서는 현대건설의 ‘힐스테이트’ 브랜드가 GS건설의 ‘자이’에 밀린다는 평판을 무기로 조합원들의 표심을 파고들었다.

개표 결과는 현대건설의 압승이었다. 투표에 참여한 조합원 2193명 가운데 1295명(59%)이 현대건설에 표를 줬다. 업계 전문가들에게 따르면 이사비 7000만원을 지급하겠다는 현대건설의 ‘한 방’이 결정타였다. 경쟁사인 GS건설은 사장까지 나서서 강하게 항의했고, 국토부도 현대건설에 시정명령을 요구하며 말렸지만 그냥 700만원도 아니고 7000만원이라는 핵폭탄급 이사비에 혹한 조합원들의 마음을 돌려놓지는 못했다. 반포1단지 조합원 A씨에 따르면 실제 반포1단지 조합이 국토부의 시정명령을 받아들여 이사비 7000만원을 안 받기로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조합원들의 항의 전화가 빗발쳤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사비 7000만원에 자기 돈을 보태 수입차 살 욕심에 주변 수입자동차 대리점을 찾는 조합원들의 방문이 늘어났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사회적 논란을 몰고 온 이사비 7000만원 지원 문제는 현대건설이 협약이행보증금으로 4615억원을 내기로 하면서 일단락됐다.)

반포1단지는 덩치가 컸던 만큼 브랜드 파워보다 두둑한 배짱과 자금력이 승부를 갈랐다. 현대건설은 ‘반포대첩’의 승리로 숙원사업이던 한강변 랜드마크 아파트를 짓게 됐다. 압구정 재건축 시공사 선정에도 유리한 입장에 선 전과를 거뒀다. 1차전은 기세보다는 관록의 승리였다. 하지만 격전이 치열했던 만큼 잡음도 많아 국토교통부가 현재 재건축 조합에 대한 합동점검을 벌이고 있다. 조합도, 현대건설도 마냥 두 손 놓고 안심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2차전은 송파구 잠실 미성·크로바아파트 재건축 쟁탈전이었다. 공사비 4700억원대의 중급 규모 수주전에 GS건설과 롯데건설이 맞붙었다. 롯데건설은 롯데캐슬을 뛰어넘는 하이엔드격 신규 주택 브랜드를 적용해 지상 35층 이하, 14개 동, 1888가구로 재건축하겠다며 기선을 제압했다. 이에 맞서 GS건설은 GS자이의 브랜드 파워와 화려한 설계도, 품질시공을 내세웠다. 수주전은 치열했지만 지역이 잠실인 만큼 롯데건설이 우세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고 한다. 10월 11일 잠실 교통회관에서 열린 미성·크로바 재건축 시공사 선정 총회 투표에서 롯데건설이 시공사로 선정됐다.

총 조합원 수 1412명 가운데 1370명이 투표했는데, 롯데건설이 736표, GS건설이 606표를 얻었다. 하지만 현장 투표에서는 GS건설이 202표, 롯데건설이 108표였다. 업계에서는 막판 자금력에 좌우되는 부재자투표가 승부를 갈랐다는 말이 나왔다. 반포와 잠실에서 연달아 고배를 마신 GS건설의 내상이 컸다. 명색이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사가 지휘하는 건설회사인데,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GS건설은 전열을 가다듬고 3차전에 화력을 집중했다. 3차전(10월 15일)은 공사비 1조원 규모의 서초구 잠원동 한신 4지구 재건축 사업이었다. 기존 2898가구를 지상 최고 35층 29개 동, 총 3685가구 규모 단지로 재건축하는 매머드급 사업이었다. 2차전과 3차전이 거의 동시에 벌어졌기 때문에 GS건설은 내심 3차전에 조직과 화력을 최대치로 가동하고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미성·크로바 수주로 기세를 올린 롯데건설이 마지막에 자금력을 최대로 가동하면서 GS건설을 크게 위협해왔다.

과열영업·매표에 놀란 GS건설 ‘클린 선언’ 

잠실의 미성·크로바 재건축 시공권은 롯데건설이 따냈다. 사진 연합뉴스

잠실의 미성·크로바 재건축 시공권은 롯데건설이 따냈다. 사진 연합뉴스

GS건설은 고민 끝에 특단의 조치를 강구했다. 언론에 보도 자료를 내고 금품·선물을 제공하지 않겠다는 ‘클린 수주’로 방향을 전환했다. 물길을 완전히 돌리는 강공법을 들고 나온 것이다. 언론을 통해 ‘도시정비 영업의 질서회복을 위한 선언’을 발표한 GS건설은 “수주전에서 실패하는 일이 있더라도 위법 사례가 없도록 하겠다”며 사설 신고센터인 ‘불법 매표 시도 근절을 위한 신고센터’를 운영하겠다고 했다. 조합원들에게 금품·선물 공세를 신고하면 신고액의 최고 10배를 포상금으로 주겠다고 했다. 포상금으로만 70억원을 내걸었다. 당장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쩐의 전쟁’은 소강 상태에 들어갔다. 조합원들 표심이 안갯속이 됐다.

결전의 날인 10월 15일, 서울 더케이호텔앤리조트에서 열린 총회에서 마침내 투표함의 뚜껑이 열렸다. 조합원 총 2925명 중 2610명이 투표한 가운데 GS건설이 1359표, 롯데건설이 1218표를 얻었다. GS건설은 환호했고, 롯데건설은 낙담했다. 부재자투표에서는 롯데건설(1068표)이 GS건설(823표)을 앞섰지만 현장 투표에서 롯데건설(150표)이 GS건설(536표)에 한참 뒤졌다. GS건설의 막판 모험이 주효했다. GS건설이 마지막에 웃었다.

강남에서 벌어진 세 차례의 성적표를 보자. 세 건설회사 모두 사이 좋게 한 번씩 승리를 나눠 가졌다. 현대건설은 가장 규모가 큰 전투에 화력을 집중해 반포대첩의 승리를 거머쥐었다. 강남·북 동시다발성 영토 확장이 장기인 GS건설은 반포와 미성·크로바, 잠원동 한신4지구에 세 번 모두 출전해 두 번 졌지만, 마지막 전투인 잠원동에서 승리를 챙겼다. 롯데건설은 두 번 싸웠고, 그중 안방인 미성·크로바에서 웃었다. 그 과정에서 과열영업으로 이미지를 구겨 세 건설회사 모두 적잖은 상처를 입었다. 특히 롯데건설의 내상이 가장 컸다. 롯데건설은 한신4지구 조합원 한 명이 금품수수 행위가 있었다고 경찰에 고발하면서 현재 경찰의 수사를 받고 있다. GS건설은 시공사 선정 투표가 끝난 뒤 자체 신고센터에 접수된 내용을 발표해 롯데의 상처에 소금을 뿌렸다. GS건설은 “금품·향응 신고 총 25건 중 현금 제공 4건을 비롯해 현금+청소기 1건, 현금+숙박권 1건, 상품권+화장품 1건, 명품가방, 명품벨트 지급 사례가 접수됐다”며 백화점 상품권·명품가방, 50만~100만원이 담긴 돈봉투와 5만원권 지폐가 찍힌 사진을 공개했다.

이에 롯데건설은 잠원동 한신4지구에서 위법 행위를 한 적이 없다면서 크게 반발했다. GS건설의 폭로는 국토교통부가 최근 도시정비법 개정을 발표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시공사 선정 과정에서 온갖 불법 등 건설사들의 감춰진 민낯이 드러나면서 정부가 더 이상 개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상황이 됐다.(128쪽 상자기사 참조)

올가을의 재건축 수주전에서 ‘쩐의 전쟁’은 얼마나 극심했을까? 이와 관련해 한 조합원은 “홍보팀이 뿌린 돈으로 아파트 주변이 흥청망청했다. 신세계백화점 명품 매장과 수입자동차 대리점에도 손님이 들끓었다. 어딜 가나 5만원짜리가 흔했다. 지나가는 강아지도 5만원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우스갯소리가 나돌 정도였다”고 전했다. 강남 재건축 시장의 실태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기로 했다. 때마침 국내 건설사의 한 관계자가 “재건축 수주전을 좌우하는 매표(賣票) 행위가 근절돼야 한다”며 강남 재건축 시장의 실상에 대해 구체적인 제보를 해왔다. 제보를 토대로 추가 취재에 들어갔다.

조합원 환심 사려고 ‘식모’ 자청하는 홍보요원 

서울 서초구 반포주공1단지. 공사비만 2조7000억원대인 재건축으로 현대건설이 시공권을 따냈다 [사진 연합뉴스]

서울 서초구 반포주공1단지. 공사비만 2조7000억원대인 재건축으로 현대건설이 시공권을 따냈다 [사진 연합뉴스]

업계 전문가들에 따르면 재건축 시장은 탐욕과 돈이 좌우하는 복마전이다. 백조가 호수 위에 우아하게 떠 있으려면 쉴 새 없이 물갈퀴를 움직여 줘야 한다. 진짜 전쟁은 조합원 대상의 설명회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는 ‘쩐의 전쟁’이다. 건설회사의 목표는 오직 시공권을 따내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 조합원의 표를 하나라도 더 많이 가져와야 한다. 현실에서는 돈으로 조합원의 표를 사는 매표 행위가 그 판을 좌우한다. 건설회사와 계약을 맺은 홍보대행사와 시공사 기획팀, 영업팀에서 잔뼈가 굵은 사원들이 재건축 수주전의 판을 움직이는 프로들이다. 재건축 바닥에서 10년, 20년 버티며 살아남은 이들은 어떻게 하면 조합원들의 표를 얻을 수 있을지 잘 알고 있다. “재건축에서는 브랜드도 필요 없고, 설계도 필요 없다. 모든 것은 돈이다. 봉투와 선물이 모든 걸 결정한다.” 기획팀에 소속된 전문 기술자의 말이다. 이들은 자신들과 계약을 맺은 홍보요원(OS)들을 움직여 돈으로 조합원들의 마음을 사게 만들어내는 ‘선수’다.

혹자는 되물을지 모른다. 지금도 자유당 시절의 고무신 퍼주기 같은 매표가 통하느냐고?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강남 사람들한테? 답은 놀랍게도 “통한다”이다. 이 업계에서 잔뼈가 굵었다는 한 프로는 “매표는 경찰관, 검사, 교수, 사업가, 연예인에게도 다 통한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매표하려는) 그 마음이 조합원들에게 엿보이면 큰일난다”고 했다. 대번에 “우리를 뭘로 알고”라는 말을 듣게 되면서 미움을 받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기획팀의 프로들은 세 가지를 조심한다. “미운털 박히는 것! 조합원을 바보로 아느냐는 소리 듣는 것! 경쟁사로부터 저놈들이나 그렇지 우리는 아니라고 공격당하는 것!”이다.

기획팀의 전문가들(‘프로’라고 한다)은 조합원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조합원의 마음을 선물과 봉투로 잡는다. 안 보이는 곳에 숨어서 분석하고 시나리오를 짜는 이들 전문가가 이 판을 움직인다. 조합원들은 대개 자신이 직접 대면하게 되는 홍보요원들이 전부인 줄 알지만, 사실 홍보요원은 시공사 기획팀이나 홍보대행사의 홍보팀프로에게 매일매일 지시와 각본을 받아 이행하는 하부 조직에 불과하다.

프로들이 홍보요원에게 주문하는 목표는 딱 하나다. 투표 당일에 조합원을 픽업해 투표장으로 같이 가는 것이다. 조합원의 손을 잡고 같이 가서 건설사 직원이 멀리서 지켜보는 가운데 조합원을 들여보내 자기 실적을 기획팀 프로에게 확인시키면 된다. 그 과정에서 인증샷이 필수다. 왜냐고? 비밀유지 문제도 있지만 돈을 받고도 반대로 찍는 경우가 있어서다. 한 프로는 “최근 휴대폰 소지를 못하게 하는 경우가 생기면서 볼펜이나 안경 형태의 몰래카메라를 주고 인증샷을 찍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실제 잠원동 한신4지구 부재자 투표 때는 휴대폰 지참이 금지됐다.

매표는 대개 수주전에서 승산이 적다고 생각하는 시공사가 주도한다. 경쟁사도 이에 질세라 대응해야 하니 매표를 안 하기 어려운 구조다. 그렇다고 돈만 쓰면 다 되는, 그렇게 쉬운 작업도 아니다. 업계의 첫째 신조는 매표는 한순간에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드시 사전작업을 통해 유대관계를 만들어 둔 조합원이라야 내 편이 된다. 적발이 쉽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홍보요원(보통은 OS로 불린다)들은 조합원들의 마음을 어떻게 살까?

40~60대 주부인 조합원을 공략하는 사례를 들어봤다. 홍보요원이 접근하면 대부분 처음에는 1만~2만원도 받기 싫어한다고 한다. ‘내가 왜 남의 것을 공짜로 받느냐?’고 화를 내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을 끌어들이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잔잔한 불에 오래 놔두면 물이 끓듯 천천히, 단계적으로 접근해 가야 한다. 처음에는 아무 선물도 없이 10분가량 가볍게 만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시간이 늘어 점점 30분, 1시간이 된다. 그다음에는 자연스럽게 집안으로 들어가서 얘기를 나누게 된다. 재건축할 아파트이니 집안 군데군데 허름한 곳이 많다. 간단히 청소도 해주고, 마시던 찻잔도 설거지해준다. 조금 안면을 익히게 되면 어지간한 청소나 점심 설거지, 집 안의 궂은일까지 챙겨주는 것으로 발전한다. 어느 날 작은 단지 같은 것을 내어 놓으면서 “저희 어머니가 이번에 담근 된장인데요~” “이번에 고향 밭에서 난 고춘데요~” 하고 내놓는다. 1만원어치도 안 되는 된장단지나 고추봉지가 나중에 자연스럽게 5만원권 뭉치로 조금씩 진화해 간다. 중간중간 건설사들이 조합원을 상대로 제안하는 개별 홍보 시간도 이용한다. 가벼운 선물 증정이나 호텔 식사권 제공, 주변 관광지 전세버스 여행을 주선하면서 시공사에 대해 홍보하거나 상대 업체에 대한 안 좋은 정보를 슬쩍 유포하기도 한다.

친분이 깊어지면 전화도 자주 하게 마련이다. 바쁜 일로 잠깐 집을 비우게 됐다고 하면 집에 와서 집을 봐주고, 아이들이 하교 후에 학원을 가려고 집에 들르면 간식도 해준다. 아이들도 자주 보게 되는 사이가 되면 일주일에 한두 번 밥을 차려 주는 것도 예삿일이 된다. 서초동에서 홍보요원으로 활동했다는 50대의 한 여성은 “조합원들하고 친해지려고 식모살이 비슷하게 하는 친구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 과정을 거쳐 친분을 쌓아놓은 조합원(업계 용어로는 작업이 된 조합원)이 바로 부재자투표 때 결정적인 매수의 대상이 된다.

물론 이 같은 일들이 다 통하는 건 아니다. 상당수 조합원은 귀찮아서, 혹은 경계심이 많아서 접근조차 못하게 홍보요원을 쫓아버리기도 한다. 깐깐하거나 전문성이 있는 조합원이 처음부터 확실하게 특정 시공사 쪽으로 마음이 굳어 있는 경우 마음을 돌리기가 굉장히 어렵다. 하지만 건설사의 입찰 조건이 복잡하기 때문에 빈틈은 항상 있기 마련이다. 건설회사들도 처음에는 조합원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제안서에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도 넣어서 초호화판으로 ‘섹시하게’ 만든다. 설계 전문가가 최대한 기술을 부려 자료를 만든다. 최근에는 아파트의 설계가 복잡해지고 고도화되면서 그 정도가 극심해졌다고 한다.

홍보요원들에게는 최대한 상대방(경쟁사 홍보요원)이 접촉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일도 자기 일 못지않게 중요하다. 인허가 등이 어렵다는 식으로 자사의 문제를 지적하는 상대방은 거꾸로 조합원을 위한 의지가 없는 무성의한 시공사라고 흉을 보고 매도한다. 이를 업계 용어로 ‘업어치기’라고 한다. 그렇게 친분이 깊어지면 ‘어느 시공사가 좋다’고 꼭 집어 확실하게 확신을 가지는 조합원은 생각보다 많지 않게 된다. 특히 한쪽과의 접촉이 상대적으로 많다 보면 모든 게 그쪽 말만 맞는 것 같은 상태가 된다. 이쯤 돼야 조합원에 대한 포섭이 된 상태다. 업계 말로 ‘영업 과정’이 끝난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용의 눈에 점을 찍을 화룡점정! 부재자투표일을 기다리는 것이다.

조합원 성향에 맞춰 상품권·현금·선물 준비 

GS건설이 한신4지구 재건축 수주 과정에서 자체 신고센터 운영을 통해 적발한 금품과 선물 증거 [사진 GS건설]

GS건설이 한신4지구 재건축 수주 과정에서 자체 신고센터 운영을 통해 적발한 금품과 선물 증거 [사진 GS건설]

부재자투표일이 다가오면 시공사의 영업과 홍보대행사는 매일 저녁 조직 전체, 혹은 단위 조직이 모여서 조합원들에 대한 개인별 분석을 통해 우리 편, 중립, 상대편으로 분류하고 공략 방법을 준비한다. 타깃이 되는 조합원 성향에 맞춰 상품권이나 선물, 현금을 준비한다. 현금은 선금과 잔금으로 구분하는데, 200만원, 300만원, 500만원, 1000만원 등 상대한테 먹힐 수 있는 금액을 정확히 제시한다. 실제 지난 10월 잠원동 한신4지구 재건축 수주전 과정에서 GS건설은 조합 임원 이름과 약정 내용 등이 적힌 ‘롯데 B/M 특별 관리자’라는 문건을 공개했다. 이 자료에는 지지자 50명 이상 확보한 이사에게 1000만원, 지지자 30명 이상 조합원에게 500만원, 시공사로 선정되면 계약금의 3배를 주겠다는 내용, 부재자투표 1인당 100만원 등을 주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당시 롯데건설은 이와 관련해 “GS건설이 당사 명의의 조합원 관리문서로 오인할 수 있는 문서를 사실 확인도 없이 배포하면서 회사와 조합의 명예를 훼손했다. 해당 문서는 조합원을 음해하는 불법 유인물임이 확인됐는데도 GS건설에서 악의적으로 배포한 것이다”고 항의했다. 현재 이 내용은 서초경찰서가 수사하고 있다.

조합원의 환심을 사는 과정이 예선전이었다면 부재자투표는 본선과도 같다. 본선에서는 프로들이 주도적으로 개입한다. 홍보요원의 매일매일 접촉 내용과 접촉 시간, 화제와 활동내역 등을 본부에 보고하고 이를 기초로 다음날 어떻게 이 조합원을 타깃으로 어떤 활동을 할 것인지를 결정해 홍보요원에게 개별적으로 지시를 내린다. 홍보요원이 당일 활동보고를 거짓으로 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불시에 사후 확인을 하기도 한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본사(건설회사)의 오더가 떨어지면 일제히 돈을 뿌리는 매표 작업에 들어간다. 작업에 동원되는 것은 홍보요원뿐이 아니다. 그 전에 건설회사들은 이미 조합원, 특히 연고(혈연·지연·학연)가 있는 조합원을 중심으로 조합원 안에도 일종의 ‘조직’을 만들어 놓은 상태다. 이 조직은 다단계 업체와 유사한데, 하위 조합원을 포섭하면 건설사가 확인하고 상위 조직원에 대해 수백만 원대의 수당을 지급하는 구조다.

이 과정에서 관록 있는 50~60대 홍보요원들의 ‘기술’이 들어간다. 예를 들면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다른 단지에서, 혹은 해당 단지에서 있지도 않았던 사건·사고를 가십거리로 슬쩍 던지는 것이다. “지난달 부산 어느 재건축에서 어디서 누가 선물을 받았다가 적발이 돼 망신을 당했다더라” “타 건설사를 찍으면 귀신 같이 안다더라” 등등이 흔한 유형이다. 때로는 “‘OO엄마’하고 나하고 표를 사고파는 얘기를 했다는 사실”을 흘리고는 그것이 무슨 죄가 되는 것처럼 분위기를 조성해서 보안도 유지하고 은근히 부담을 주기도 한다. 세련되고 부드러운 ‘협박’은 효과를 발휘한다. 특히 가정주부나 노년층 등 사회 경험이 적은 조합원들은 은근한 협박에 상당히 위축되기도 한다. 홍보요원은 그러면서 빠짐없이 인간적인 호소를 더하며 초를 친다.

예를 들면 “언니! 내가 아이가 아파서 어쩔 수 없이 나왔는데 이번에 언니가 안 도와주면….” “두 달 석 달 고생했는데 수당이고 뭐고 다 날아가게 생겼는데….” 그동안 와서 말동무 되어주고, 친동생보다 더 때로는 자식보다 더 진지하게 인생 고민까지 들어주고, 집에 와서 청소도 도와주고 했던 불쌍한 사람이 조합원에게 이렇게 사정하니 부탁을 안 들어줄 수 없게 된다. 홍보요원은 “(돈을) 받고 같이 가서 찍는 건 마음대로 해”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부재자투표일 2~3일 전 집중적으로 돈 살포 

한신4지구 재건축 수주전 과정에서 GS건설이 공개한 롯데 BM 특별관리자 문건. 지지자 확보 시 수백만 원의 금액을 약정하고 있다

한신4지구 재건축 수주전 과정에서 GS건설이 공개한 롯데 BM 특별관리자 문건. 지지자 확보 시 수백만 원의 금액을 약정하고 있다

여기까지 끝낸 홍보요원의 마지막 임무는 이제 조합원을 데리고 부재자투표장까지 가는 일이다. 홍보요원의 손을 잡고 온 이상 대부분은 정 때문에 혹은 겁이 나서 자기를 찍을 수밖에 없다는 걸 시공사는 잘 알고 있다. 업계 프로들은 재건축 수주전에서 통상 30% 정도의 지지율만 가지고 있더라도 나중에 매표 행위에 의해 승부를 뒤집을 수 있다고 본다. 그 이유를 프로들은 유독 정에 약한 한국인의 성향에서 찾는다. 겉으로는 다혈질인 것 같지만 그만큼 마음이 약한 게 한국인의 심성이다. 재건축 매표 작전은 그 틈을 파고드는 독버섯 같은 작업이다. 세칭 다단계 영업은 재건축 프로들에겐 게임이 안 된다. 그만큼 치밀하고 집요하다.

부재자투표일 전날 저녁이 되면 홍보요원은 조합원을 찾아가거나 혹은 전화를 걸어 내일 있을 부재자투표 약속을 다시 확답받는다. 다음날 부재자투표 직전에 만날 약속 장소와 데리고 갈 차량 등 방법까지 확인한다. 이제 마지막 실탄(돈)이 나갈 차례다. 이쯤 되면 조합원들도 많이 지친 상태가 된다. 번번이 돈을 받았기에 무언가 꺼림칙했던 감정은 많이 둔감해져 있는 상태에서 돈봉투 500만원짜리를 쓱 찔러 주었을 때 ‘어차피 내 한 표로 좌우되는 것도 아닌데’라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 보아도 이 불쌍한 동생(홍보요원)을 도와주는 게 맞아도 보인다. 아니 그렇게 안 하면 다시는 이 동생과 눈을 마주칠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다. ‘그래 공짜 점심은 없다.’ 결국 홍보요원이 원하는 대로 ‘꾸욱’ 찍게 된다.

부재자투표 날 하루 종일 현장 팀에서는 현장에 숨어 카운트를 한다. ‘홍보요원이 데려온 부재자 몇 명, 상대방은 몇 명, 이도저도 아닌 조합원 몇 명, 그래서 누계 얼마’ 등등 성향 분석을 한다. 이처럼 부재자투표가 시작되기 2~3일 전에 집중적으로 현금을 제시하고, 표를 찍어주는 대가로 추가 사례금을 주는 방식이 정형화돼 있다.

돈을 주는 홍보요원들도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한 홍보요원은 “우리도 사람이다 보니 돈을 주면서도 ‘결국은 이 돈이 조합원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인데’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고 했다. 하지만 홍보요원들은 한 재건축 단지의 작업이 끝나면 전부 다른 단지로 썰물처럼 이동해 갈 뿐이다. 조합원들과의 인간관계도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어느 조합원은 “총회가 끝나고 정적이 감도니 마치 꿈에 취했던 것 같더라. 귀신에게 홀린 기분이다”고 씁쓸히 말했다. 조합원들은 뒤늦게 후회하지만 복마전은 무대를 옮겨 다시 진행될 뿐이다.

일부 재건축 수주전에서는 부재자투표가 매표의 장으로 변질되고 돈 선거의 온상이 된다. 사진은 한신4지구 부재자투표 장면. [GS건설]

일부 재건축 수주전에서는 부재자투표가 매표의 장으로 변질되고 돈 선거의 온상이 된다. 사진은 한신4지구 부재자투표 장면. [GS건설]

일부 부재자투표는 이처럼 사전 매표의 장으로 변질되고, 돈 선거의 온상이 된다. 잠원동 한신4지구의 경우 투표한 조합원 가운데 65.1%가 나흘간 진행된 부재자투표 때 참여했다. 반포1단지 수주전에서는 부재자 투표율이 82.5%를 기록했고, 잠실 미성·크로바 수주전은 투표한 조합원의 76%가 부재자투표 때 참여했다. 부재자 투표율이 높다는 것은 총회 이전에 이미 결정을 했다는 것으로 그만큼 돈에 좌우됐다고 보면 된다는 게 업계 프로들의 얘기다. 물론 재건축 조합도 할 말은 있다. 아무리 수차례 공지하고 홍보를 해도 총회 당일에 참석하는 조합원 본인은 50~60%를 넘지 않는다. 며칠간 부재자투표 기간을 둘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은 특정 건설회사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자정 선언을 했던 GS건설은 물론 지금까지 재건축 수주전에 참여했던 건설회사 대부분에 관행 같은 일이기도 했다.

시공사들은 설계변경으로 공사비 인상 꼼수 

시공업체들의 치열한 수주 전쟁은 공사비와 분양가 인상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사진은 잠원동 한신4지구 35층에 들어서게 될 신반포 메이플자이의 한강 야외수영장 인피니트풀 [GS건설]

시공업체들의 치열한 수주 전쟁은 공사비와 분양가 인상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사진은 잠원동 한신4지구 35층에 들어서게 될 신반포 메이플자이의 한강 야외수영장 인피니트풀 [GS건설]

건설회사 홍보팀의 한 프로는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시공사가 뿌린) 돈은 다 조합원 자신의 주머니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물론 시공사는 말한다. 우리는 여러분을 위해, 이 단지를 위해 투자한다고. 즉 손해를 감수하면서 짓는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손해 보아 가며 짓는다는 이유는 백 가지도 더 된다. 대치동은 대치동이라서, 반포는 반포라서, 압구정동은 압구정이라서, 개포는 개포라서, 여기는 우리 본사가 있는 곳이라서, 여기는 우리 그룹이 있는 곳이라서, 여기는 우리 사장이 사는 곳이라서, 여기는 앞으로 개발이 활성화 될 곳이라서, 여기는 앞으로 재건축될 단지가 많이 남아 있는 곳이라서 등등. 하지만 그만한 이유가 없는 곳은 한 곳도 없다.”

그가 말한 요지는 조합원들이 홍보요원들에게 끝까지 속아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다. 돈에 좌우되는 재건축의 폐해는 시공업체들의 치열한 수주전쟁이 결국 공사비와 분양가 인상으로 이어진다는 점에 있다. 건설업체들이 조합원들의 표심을 잡기 위해 뿌려댄 돈과 각종 혜택은 결국 재건축 조합원의 부담금 증가로 되돌아온다는 얘기다.

이를 위해 시공사가 가장 많이 동원하는 수법이 설계변경이다. 시공사 선정 이후 착공까지 몇 년 동안의 시차가 있는데, 시공사는 이때를 이용해 시간을 끌면서 설계변경을 한다. 조합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섹시하게 준비됐던 설계가 이런저런 이유로 없어지거나 다른 대안으로 바뀌는 게 이때다. 시공사는 변경된 설계에 맞춘 새로운 도급 공사비를 추가로 조합에 들이민다. 시간에 쫓기기 시작하면 조합원들도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다는 걸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으니 시공사는 재건축 조합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집중하게 된다. 재건축 조합 역시 시공사와 몇 차례 힘겨루기를 벌이다 공사비 인상으로 타협을 보기 십상이다.

올 연말까지 강남권은 서초구 반포주공1단지 3주구와 강남구 대치동 쌍용2차, 송파구 문정동 136번지 재건축 수주전이 남아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지역은 공사비 8087억원인 반포주공1단지 3주구다. 가장 적극적인 업체는 현대산업개발이다. 현대건설과 GS건설도 참여를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1월 25일 입찰을 마감하고, 12월 17일 시공사 선정 총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지난 10월 ‘강남대첩’을 거친 업계 프로와 홍보요원들이 벌써 신발끈을 고쳐 매고 더 은밀한 표밭 갈이를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박스기사] 국토부의 재건축 제도 개선안, 통할까 - 이사비 지원 155만~200만원으로 제한

지금까지는 재건축 조합의 부재자투표 기간이 많게는 일주일에서 4일까지 제각각이었고 불법 매표 활동이 기승을 부렸지만 앞으로는 해당 정비 구역 밖의 시·도 거주자 등으로 투표 대상을 엄격히 제한하고 투표 기간도 하루로 명확하게 정했다.

지금까지는 재건축 조합의 부재자투표 기간이 많게는 일주일에서 4일까지 제각각이었고 불법 매표 활동이 기승을 부렸지만 앞으로는 해당 정비 구역 밖의 시·도 거주자 등으로 투표 대상을 엄격히 제한하고 투표 기간도 하루로 명확하게 정했다.

국토교통부(장관 김현미)가 강남 재건축 시장의 과열 혼탁을 막기 위해 칼을 빼 들었다. 재건축·재개발 공사 수주를 위해 조합원에게 과도한 금품이나 향응을 제공한 건설사는 해당 사업에 대한 입찰 또는 시공 자격을 박탈하기로 하는 내용의 도시 및 주거 환경 정비법 개정안을 마련 중이다. 입찰부터 홍보, 투표, 계약으로 이어지는 모든 단계에서 규제를 강화하는 내용으로 준비하고 있다.

우선 건설사가 홍보 단계에서 금품이나 향응을 제공한 사실이 드러나 회사가 1000만원 이상 벌금을 받거나 직원이 1년 이상 징역형을 받아 확정되면 해당 건설사는 2년간 정비 사업에 참가할 수 없게 했다. 홍보대행사 직원이 1년 이상 징역형에 처해질 때도 마찬가지다. 다만 공사가 착공된 이후에는 시공권 박탈 대신 공사비의 10~30% 선에서 과징금을 물리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국토부 관계자는 “보통 재건축 사업을 통해 건설사가 챙기는 수익이 공사비의 5% 정도다. 금품 살포 등이 드러난 건설사가 서둘러 착공해 시공권을 빼앗기지 않는다고 해도 공사비의 10%의 과징금을 물리면 건설사엔 큰 손해일 것이다”고 말했다.

국토부는 또한 논란을 빚은 현대건설의 ‘7000만원 이사비’ 재발을 막기 위해 시공사가 재건축 조합원들에게 고액의 이사비나 이주비는 지원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렇게 되면 서울은 이사비가 전용면적 66~99㎡ 주택의 경우 155만원, 99㎡ 이상도 207만원 수준으로 제한된다.

부재자투표 기간도 하루(1일)만 하기로

초호화판 조감도에도 제동을 걸었다. 국토부는 건설사가 조감도의 근거가 되는 대안 설계를 만들 때 설계도서와 공사비 내역서, 물량산출 근거, 시공 방법 등 구체적인 시공내역을 조합에 입찰 제안서를 낼 때 함께 제출하도록 했다. 이를 어기면 건설사 입찰을 무효로 하기로 했다. 구체적인 설명 없이 수백억 원의 공사비가 들어가는 시설을 조감도에 마구잡이로 그려놓고 시공사로 선정되고 나서는 공사를 축소하거나 과도한 추가 비용을 요구하고, 아예 인허가가 나지 않을 시설을 조감도에 포함해 놓는 경우를 막기 위해서다.

건설사의 과열 홍보도 제한했다. 그동안 건설사 홍보는 합동설명회 외에도 건설사들의 개별홍보가 기승을 부렸다. 개별홍보는 조합원을 호텔로 초대해 식사를 하거나 여행을 주선하면서 이뤄진다. 이 과정에서 과대 홍보를 하거나 상대 업체에 대한 음해성 정보를 유포하고 금품과 선물을 제공하는 통로로 악용됐다. 앞으로는 3회 이상 불법 개별홍보가 적발되면 입찰을 무효로 하기로 했다. 대신 사전에 조합에 등록된 홍보요원이 조합원을 만나는 개별홍보는 할 수 있도록 했는데, 개별홍보를 할 수 있는 기간은 1차 현장설명회 이후 총회 전까지다.

부재자투표도 개선한다. 지금까지는 조합이 정한 장소에서 투표하게 하는 규정만 있을 뿐 대상이나 기간이 정해지지 않아 부재자투표 기간이 많게는 일주일에서 3~4일까지 제각각이었다. 이 기간 동안 불법 매표 활동이 기승을 부렸다. 앞으로는 해당 정비구역 밖의 시·도 거주자 등으로 투표 대상을 엄격히 제한하고 투표 기간도 하루(1일)로 명확하게 정했다. 국토부는 이 같은 ‘정비사업 시공자 선정기준’ 고시 개정안을 행정예고하고 12월부터 시행할 예정이다. 계획대로만 이뤄진다면 재건축 시장이 맑아지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나권일 월간중앙 기자 na.kwoni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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