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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 거는 향기로운 야생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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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토종 동백은 꽃 핀 채 통꽃으로 낙화해 꽃 진 뒤에도 나무에 매달린 원예종과 대조된다. [사진 김정명]

토종 동백은 꽃 핀 채 통꽃으로 낙화해 꽃 진 뒤에도 나무에 매달린 원예종과 대조된다. [사진 김정명]

김정명

김정명

해마다 11월이면 단골 고객은 이 물건이 언제 오나, 우편배달부를 기다린다. 벌써 25년째다. 김정명(71·사진) 사진작가는 1995년 제1집 한국의 야생화(野生花)를 펴낸 이래 오직 우편택배로만 주문받는 야생화 달력으로 사반세기를 이어왔다. 사양 산업이라는 달력업계에서 초판 1만5000부를 너끈히 소화하는 그는 뚝심으로 이 바닥의 전설이 됐다.

야생화 달력 25년째 사진가 김정명 #“절벽에 피는 꽃이 더 크고 화려 #종족 번식하려면 곤충 유혹해야”

“백두산부터 한라산까지 들과 산을 훑고 다니며 한국 야생화 사진만 찍었어요.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기고 카메라도 십여 대 박살냈죠. 2018년 무술년(戊戌年) 달력 주제는 ‘바위와 절벽에서 피는 꽃’인데 손님 한 분이 전화를 했어요. 어떻게 찍었느냐고. 절벽 타고 내려가 죽을 둥 살 둥 번개까지 맞았다니까 혀를 차더군요.”

사진은 기본이고 야생화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내는 이야기가 독학으로 깨우친 것인데도 식물학자가 고개를 숙일 정도다. ‘꽃가루받이의 신비’ ‘사람이 볼 수 없는 꽃의 세계’ ‘개미가 만드는 꽃밭’ 등 그가 이제껏 다룬 주제는 달력을 볼 때마다 하루하루를 즐겁게 한다. 왜 절벽에 피는 꽃이 더 처연하고 눈을 끄는지 수십 년 경험으로 간파했기 때문이다. 달력 앞에 붙은 인사말은 그의 야생화 철학이자 새해를 맞는 마음이다.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절벽 바위 위에 터를 잡은 꽃의 가장 큰 걱정은 꽃가루받이입니다. 어떻게든 종족번식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꽃들은 곤충을 유혹하기 위해 짙은 색 꽃과 향기를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바위틈에 피는 꽃들이 땅에서 피는 꽃들보다 크고 화려합니다.”

98년 처음 찍어 발표한 동강할미꽃은 바로 축제로 이어져 정선군이 그를 명예 군민으로 추대했다. 독도 사진을 가장 정확하게 많이 찍은 사진가로도 유명하다. 집념어린 그의 솜씨는 중국에서도 인정해 백두산 여행경로를 담은 안내서 표지에 김정명씨로부터 판권을 산 백두산 천지와 야생화 사진을 실었다.

“사진기 들고 좋아하는 것 찍다가 죽겠다는 마음입니다. 2019년 기해년 달력 주제도 이미 정했어요. ‘백두산에 피는 꽃’이죠. 후손을 남기려 치열하게 투쟁해왔기에 동물보다 꽃이 더 생존에 성공한 유기체라는 걸 깨닫습니다.”

글·사진=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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