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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만의 인간혁명]소크라테스·공자·석가모니 공통점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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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학당(1509~1510). 라파엘로는 인류 역사상 큰 발자취를 남긴 위인들을 한데 모아 놨다. 어두웠던 중세가 끝나고 교육과 문화, 예술, 과학이 꽃피웠던 르네상스 시대를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그림 정중앙엔 손을 위로 들고 이데아를 이야기하는 플라톤과 손바닥을 아래로 가리키며 현실을 강조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다. 그 왼편엔 이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진리를 설파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중앙포토]

아테네 학당(1509~1510). 라파엘로는 인류 역사상 큰 발자취를 남긴 위인들을 한데 모아 놨다. 어두웠던 중세가 끝나고 교육과 문화, 예술, 과학이 꽃피웠던 르네상스 시대를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그림 정중앙엔 손을 위로 들고 이데아를 이야기하는 플라톤과 손바닥을 아래로 가리키며 현실을 강조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다. 그 왼편엔 이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진리를 설파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중앙포토]

소크라테스와 공자, 석가모니의 공통점은 뭘까요? 3명 모두 예수와 함께 세계 4대 성인으로 꼽히는 분들이죠. 각기 동서양에서 인류 문명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위인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제외한 위 3명만의 같은 점은?

BC 5세기 동서양이 함께 피운 인문의 꽃? #2500년 전 동서양 공통 정신문화 전성기 #그리스 200여 도시국가 다양한 학문 활동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 사상가들의 요람 #'철기 보급'과 '문자 확산'이 인문 발달 촉진 #AI 기술혁신 앞둔 지금, 인문정신 되살려야 #관용과 개방, 다문화 정신이 미래문명 핵심

 이번 ‘인간혁명’은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이들은 모두 유럽과 아시아에서 정신문화의 꽃을 화려하게 피웠던 주인공들입니다. 무엇보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같은 시대에 살았던 인물이라는 거죠.

 석가모니(BC 563년 ~ BC 483년)가 가장 맏형이고, 그 다음이 공자(BC 551년 ~ BC 479년)와 소크라테스(BC 470년 ~ BC 399년) 순서입니다. 비록 사는 곳은 떨어져 있었지만 활동 기간은 대략 기원전 5세기경으로 3명이 비슷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각기 자신이 속한 문명에서 정신문화의 원류가 됐습니다.

네란자라 강가의 숲에서 명상에 잠겨있는 석가모니. [중앙포토]

네란자라 강가의 숲에서 명상에 잠겨있는 석가모니. [중앙포토]

 2500년 전 인류는 어떻게 비슷한 시기 동서양에서 인문의 부흥을 이끌 수 있었을까요. 그 당시엔 지금처럼 국가와 문화권 사이에서 교류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죠. 더군다나 동서양은 당시만 해도 서로의 존재를 정확하게 알고 있지 못했을 때였습니다.

 ‘인간혁명’은 위의 질문에 대한 고민을 여러분과 함께 나눠보고자 합니다. ‘인간혁명’이 주목한 것은 바로 이 시대부터 ‘인간성’에 대한 고민을 폭넓고 광범위 하게 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한 요인은 두 가지였다고 생각됩니다. 첫 번째는 획기적인 기술의 발달이고 두 번째는 보편적인 문자의 사용입니다.

 ‘인간혁명’은 과연 2500년 전 동서양에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일이 인류의 정신문화를 꽃피우는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오늘은 고대 그리스를 향해 여러분과 함께 여행을 떠나가도록 하죠.

영화 속에서 아킬레우스 역할을 맡은 브래드 피트. [영화 트로이]

영화 속에서 아킬레우스 역할을 맡은 브래드 피트. [영화 트로이]

“아버지, 아킬레우스는 진짜 있었나요? 오디세우스와 헥토르는요.”

 소년의 아버지는 그가 말을 알아듣기 시작할 무렵부터 호메로스의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어릴 적부터 소년에겐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세상의 전부였죠. 가난한 시골 교회의 목사였던 아버지는 아들에게 풍족한 삶을 물려주진 못했지만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큰 꿈을 안겨줬습니다.

 매일같이 트로이의 전쟁 영웅 아킬레우스를 찾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웅들은 당연히 있고 말구. 저 구름 뒤엔 그리스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 곳에는 그들이 살았던 모습이 아직 남아 있단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꼭 가보렴.” 그 때부터 소년의 인생 목표는 일리아드의 전설을 찾아가는 거였습니다.

루벤스의 그림. 전쟁이 끝나고 전리품을 나누는 아킬레우스.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서구 문명사에서 가장 흔한 문학과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됐다. [네이버 지식백과]

루벤스의 그림. 전쟁이 끝나고 전리품을 나누는 아킬레우스.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서구 문명사에서 가장 흔한 문학과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됐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는 바로 독일의 사업가 겸 고고학자인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 1822년~1890년)의 이야깁니다. 가난했기에 정규 교육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던 슐리만은 젊은 시절 잡화상 점원부터 선원까지 닥치는 대로 일했습니다. 트로이의 유적을 찾아 나서기 위해선 무엇보다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일이 끝나면 밤에는 공부를 했습니다. 고고학을 독학하고 외국어를 습득했죠. 특유의 끈기와 열정으로 서부개척시대에 미국으로 건너간 슐리만은 큰돈을 벌어 사업가로 성공합니다. 1868년 46세가 됐을 때 그는 드디어 아킬레우스와 영웅들을 만나러 갈 준비가 됐다고 판단했습니다. 슐리만은 과거 트로이 전쟁의 주 무대였던 터키로 발굴을 떠납니다.

 그러나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슐리만의 이런 행동은 무모하게만 느껴졌습니다.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그저 전설일 뿐이라는 게 당시의 통념이었기 때문이죠. 주인공인 아킬레우스와 오디세우스, 그리고 전쟁이 벌어졌던 트로이 또한 허구의 이야기라고 믿었습니다.

영화 포스터. [영화 트로이]

영화 포스터. [영화 트로이]

 하지만 발굴 작업을 시작한지 5년이 지나고 나서 슐리만의 꿈은 현실이 되고 맙니다. 오랜 세월 목동과 양떼만 지나다녔던 트루바(트로이의 터키어) 마을의 언덕이 신화 속의 배경이라는 놀랄만한 사실이 밝혀진 것이었죠. 한 소년의 열정어린 꿈은 신화 속에 잠자던 트로이를 역사적 실재로 깨우고 맙니다.

 이후 1900년 영국의 고고학자 아서 에번스(Arthur Evans, 1851년∼1941년)가 크레타섬에서 크노소스 왕궁을 발견하며 고대 그리스 문명의 실체를 규명합니다. 이 왕궁은 그리스 신화에서 반인반수(半人半獸)인 미노타우르스가 있던 곳으로 전해내려 옵니다.
 슐리만과 에번스의 노력으로 3000년 동안 잠자고 있던 그리스 초기 문명이 역사 앞에 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후대 역사가들은 이 문명이 지중해의 에게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에게 문명(Aegean civilization)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문명의 중심지였던 지역 이름을 따 초기를 크레타 문명, 후기를 미케네 문명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에게 문명은 왕성한 해상 활동을 통해 여러 지역과 교류하며 유럽 역사상 가장 첫 번째의 문명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는 청동으로 만든 갑옷과 투구, 단검을 사용했다. [영화 트로이]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는 청동으로 만든 갑옷과 투구, 단검을 사용했다. [영화 트로이]

 그러나 이 때까지만 해도 더욱 수준 높은 문명으로 발전하는데 한계점이 많았죠. 글자가 있었지만 아직 초기 형태의 ‘선형문자’를 사용하고 있었고 농사 기구처럼 일상 속에서 사용하는 도구 역시 청동으로 제작됐습니다. 그 유명한 트로이 전쟁에서 아킬레우스가 썼던 단검과 투구도 모두 청동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유럽 문명의 시작을 알린 에게 문명은, 더욱 정확히 미케네 문명은 결국 북쪽에서 침입해온 도리아인들에 의해 멸망하고 맙니다. 영화 ‘트로이’에 묘사된 것처럼 강력한 군대와 찬란했던 문화를 가진 미케네였지만 도리아인들 앞에선 힘없이 무너진 것이었죠.
 그 이유는 바로 도리아인이 사용한 무기에 있었습니다. 당시 유럽에선 히타이트 제국의 멸망(BC 1200년 전후)으로 처음 철제 무기가 도입됐는데, 이를 그리스에 최초로 가져온 민족이 도리아인이었습니다. 미케네의 청동 무기는 철기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뛰어난 전투 능력까지 갖춘 도리아인은 ‘헤라클레스’의 자손이라 불리며 그리스 본토를 점령했죠. 훗날 도리아인의 후손들은 그리스가 도시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영화 ‘300’에 나온 것과 같은 스파르타의 지배층이 됩니다.

그리스 최초 문명지 [두산백과]

그리스 최초 문명지 [두산백과]

 그러나 도리아인은 뛰어난 전투 능력만큼 문화와 지식을 전수하는 데는 관심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미케네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선형문자’라는 표기 수단도 갖고 있었고 활발한 해상 활동으로 다양한 문화를 꽃 피웠습니다. 그러나 도리아인은 미케네 문화를 보존하지 않았고, 문자 또한 사용하지 않으면서 당대의 유산을 전승할 수 없었죠. 그렇기 때문에 고고학자들은 이 당시를 고대 그리스의 ‘암흑기’라고 부릅니다.

 수백년간 계속된 그리스의 ‘암흑기’는 BC 700~800년경 폴리스라는 도시국가가 출현하면서 빛을 보기 시작합니다. 평야가 적고 산과 분지가 많은 그리스는 도리아 왕조의 영향력이 무뎌지면서 200여개의 폴리스로 갈라집니다. 폴리스는 높은 성벽을 쌓고 그 안에는 아고라라고 불리는 넓은 광장을 만들었습니다.

트로이는 서로 다른 시대의 9개 도시 유적이 중첩돼 있어 역사적 상상력이 필요한 곳이지만 해마다 50만명에 달하는 사람이 호메로스의 노래에 이끌려 이곳을 찾는다. [중앙포토]

트로이는 서로 다른 시대의 9개 도시 유적이 중첩돼 있어 역사적 상상력이 필요한 곳이지만 해마다 50만명에 달하는 사람이 호메로스의 노래에 이끌려 이곳을 찾는다. [중앙포토]

 폴리스는 도리아인이 갖고 온 철기를 발전시켜 농사에 활용했습니다. 철제 농기구가 확산되면서 폴리스 전체의 생산력이 월등히 높아졌죠. 또 도리아인이 사용하지 않았던 문자를 발전시켜 폴리스의 생활 문화로 삼았습니다. 철기로 인한 생산력의 급증은 현대로 치면 엄청난 기술혁신을 뜻합니다. 문자의 확산은 교양을 갖춘 사람들이 더욱 많아질 수 있는 문화적 토대를 마련한 것이었고요.

 위와 같은 특징은 폴리스에 전에는 없던 새로운 계급을 생겨나게 했습니다. 왕-귀족-평민-노예였던 사회구조가 무너지고 역사상 처음으로 ‘시민’ 계급이 등장한 거였죠. 시민은 직접 노동을 하지 않지만 노예를 부려 재화를 생산하고, 철기의 사용으로 이전 시대엔 볼 수 없던 높은 생산성을 갖게 됩니다. 거대한 부를 축적한 시민들이 늘면서 시민 모두가 평등하게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고 논의하는 직접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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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처럼 고대 그리스에서 직접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던 이유는 두 가집니다. 첫째는 노예 노동력의 확보와 생산력 증대로 생존을 위한 노동에서 자유로워진 시민 계급이 등장했다는 겁니다. 둘째는 이들이 합리적으로 토론과 논증을 할 줄 알며 이성적으로 의사 결정할 수 있는 시민의 교양을 갖게 됐기 때문이라는 거죠.

아테의 파로테논 신전. 수십년째 보수 공사를 하는 가운데도 많은 관광객들이 그리스 역사를 보기위해 찾아 온다. [중앙포토]

아테의 파로테논 신전. 수십년째 보수 공사를 하는 가운데도 많은 관광객들이 그리스 역사를 보기위해 찾아 온다. [중앙포토]

 이 때 폴리스의 시민들은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누리기 위해 한 가지 능력을 꼭 갖춰야 했습니다. 바로 토론과 논증 능력입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아고라는 모든 시민이 모여 중요한 문제를 논의하고 의사결정을 하는 곳입니다. 이 곳에서 시민 개개인은 사안에 따라 정치인이 되기도 하고, 법조인이 돼야할 때도 있었습니다.

 폴리스의 미래를 논할 때는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의사결정이 이뤄질 수 있도록 타인들을 설득해야 했죠. 또 개인과 개인 간에, 개인과 사회 간에 갈등과 분쟁이 발생했을 때는 자신의 무죄, 또는 상대의 유죄를 밝힐 수 있는 변론 능력을 갖춰야 했습니다. 자신의 이익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설득과 변론의 기술을 꼭 배워야 했던 것이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새로운 계층이 ‘소피스트(sophist)’입니다. 소피스트는 그리스어로 ‘지혜로운 자’라는 뜻입니다. 여러 폴리스를 돌아다니며 다양하고 폭넓은 주제로 강의했습니다. 이들은 유산가와 노동자 사이에 자본이 없으면서도 물리적인 노동을 하지 않는 새로운 계층이었죠.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지식인’이었습니다.

사진을 누르면 '윤석만의 인간혁명' 홈페이지로 이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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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이전에도 지식인은 있었습니다. 최초의 철학자라고 불리는 탈레스나 우주의 근원을 원자로 본 데모크리토스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보편적 진리와 원칙이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고 그것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했습니다. 다만 실재하는 현상 너머의 본질을 찾다 보니 일반 시민들의 생활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피스트는 절대적인 진리 따위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말한 프로타고라스처럼 진리는 상대적이며, 인간의 삶에 쓸모 있는 지식이야 말로 진짜 지식이라고 생각했죠. 특히 소피스트는 시민 계급과 그 자녀들에게 꼭 필요한 변론술을 가르치면서 대중적 인기를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이 가르쳤던 학문을 수사학이라고 부릅니다.

 당시 수사학은 단순히 ‘말기술’을 가르치는 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철학적 사고와 논증을 통해 인간과 현상에 대한 탐구 활동을 이어 나갔죠. 다만 앞서 설명한 것처럼 세상의 본질에 대해선 직전의 자연주의 철학자들과 다른 입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철학뿐만 아니라 실생활과 밀접한 수사학, 문법, 시, 음악 등을 가르치는 전인교육을 실천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이소크라테스(Isokrates)입니다. 그는 플라톤의 아카데미아(academia)보다 일찍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의 학교는 일정 장소에서 입학이 허가된 학생들만을 대상으로 수업료를 받고 운영됐습니다. 훗날 그의 학교는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와 함께 그리스의 양대 교육기관이 됐습니다.

 당시 그리스는 페르시아 전쟁(BC 492년 ~ 448년)의 승리로 큰 번영을 누리고 있던 때입니다. 폴리스의 중심인 아테네는 물질문명 뿐 아니라 정신문화에 있어서도 이전에 상상할 수 없었던 풍요로움을 누렸습니다. 아테네는 지중해 연안 국가들과의 교역을 통해 다양한 학문이 꽃피었고 시민의 교양은 높아졌으며 민주주의를 통한 정치 체제는 성숙했습니다.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개방의 정신, 치열한 토론 속에도 상대의 가치를 인정하는 관용의 문화가 그리스의 정신을 뒷받침했습니다. 이를 통해 고대 유럽사에서 가장 찬란한 인문의 꽃을 피울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인문 정신의 화룡점정을 이뤘던 사람이 소크라테스입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

철학자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그 유명한 ‘대화법(산파술)’로 지식을 전달하며 진리를 깨우치도록 했습니다. 소피스트와 달리 보편적인 진리를 강조했던 그는 당대의 내로라했던 소피스트들과 논쟁을 벌였죠. 요즘말로 하면 ‘토론의 달인’이었던 셈입니다. 지위고하를 막론해 토론하고, 이를 통해 상대의 무지를 깨닫게 하는 ‘대화법’은 그의 제자인 플라톤의 저작 속에 많이 나타납니다.

 이처럼 BC 5세기 그리스는 유럽 역사 그 어느 때보다 인문정신의 전성기였습니다.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자에서부터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로 이어지는 학문의 전성기는 다시 플라톤과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로 연결됩니다. 그리고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알렉산드로스(마케도니아의 왕)가 헬레니즘 제국을 건설하기 까지 그리스는 인문의 부흥기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리스는 쇠망의 길로 들어서죠. 반면 또 다른 도시국가였던 로마는 세력과 영토를 확장하면서 기원후에 들어서 제국을 건설합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대제국을 건설한 로마는 중앙으로 권력을 일원화 하죠. 이때 로마로 편입된 그리스는 도시국가 시절만큼의 다양성을 확보하지 못합니다.

 이 같은 일은 비슷한 시기 중국에서도 똑같이 벌어졌습니다. BC 5세기를 전후한 춘추전국시대엔 제자백가로 대표되는 학문과 사상의 다양성이 꽃을 피우죠. 그 때 나타났던 대표적 인물이 공자였습니다. 그리고 로마가 유럽에서 그랬듯 중국에선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죠. 당시 중국의 상황은 어땠는지, 그리고 과거의 역사가 4차 혁명으로 불리는 우리의 미래에 어떤 교훈을 주는지 다음 회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윤석만 기자 sam@joongang.co.kr

#'윤석만의 인간혁명'은 매주 토요일 아침 업데이트 됩니다.

사진을 누르면 '윤석만의 인간혁명' 홈페이지로 이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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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만 기자는

윤 기자는 2010년부터 교육 분야를 취재했다. 특히 인성·시민 교육 및 미래와 관련한 보도에 집중했다. 앞으로는 성적과 스펙보다 협동과 배려, 공감 같은 인성역량이 핵심능력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를 주제로 ‘휴마트(humanity+smart) 씽킹’이란 책을 냈다. 유네스코가 15년마다 주최하는 세계교육포럼에서 세계시민교육 심포지엄의 기조발표자로 나서기도 했다. 중앙인성연구소 사무국장을 겸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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