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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시간 버텨라, 마트봉지로 삼각붕대 만들기 가르치는 일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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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덜커덩.’ 10층에서 탄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멈췄다. 몸을 가누기 힘들 만큼 바닥이 흔들리더니 전등이 꺼졌다. 잠시 후 “지금 큰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여진이 예상됩니다”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체험시설이니 긴장할 것 없어”라고 되뇌었지만 솔직히 뭘 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도쿄 ‘지진 대응 체험시설’ 가보니 #페트병 의자, 간이 화장실 만들기 #구조 전 생존법 구체적으로 훈련

지난 17일 방문한 도쿄 고토(江東)구 ‘도쿄 린카이 광역 방재공원’ 내 ‘재해방지체험 학습시설’. 지진 공포가 일상화된 일본 국민이 ‘진도 7, 규모 7.3의 지진으로 교통과 통신이 두절될 경우 구조대의 손길이 닿기 전 72시간 동안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학습하는 곳이다.

규모 7 지진을 가정해 시가지를 재현한 모습. 운전 중 지진을 만나면 서서히 속도를 줄인 뒤 차 키를 꽂아 놓고 나와야 한다.

규모 7 지진을 가정해 시가지를 재현한 모습. 운전 중 지진을 만나면 서서히 속도를 줄인 뒤 차 키를 꽂아 놓고 나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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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방재 당국의 계산으론 지진 발생 시 최대 1만7400명이 엘리베이터에 갇힐 수 있다. 직장인들의 움직임이 가장 많은 점심 시간대를 염두에 뒀다. 엘리베이터에 갇히면 일단 모든 버튼을 눌러 가장 가까운 층에서 내려야 한다. 승강기 문이 열리지 않으면 구조 인력이 올 때까지 3일 이상 버텨야 하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다. 휴대전화의 예비용 배터리, 간이 화장실로 사용할 수 있는 검은색 비닐을 평소 가방에 넣고 다니면 좋다.

‘2XXX년 12월 X일 오후 6시.’ 추운 날씨와 어두운 시간대를 가정해 건물 밖 행동수칙을 배우는 순서다.

도로는 엿가락처럼 휘어져 부서졌고, 곳곳에 자동차가 버려져 있다. 아무리 급해도 자동차로 피난해선 안 된다. 자동차 안에서 지진을 만났다면 서서히 속도를 줄인 뒤 차 키를 꽂아둔 채로 하차해야 한다. 나중에 다른 누군가가 차를 옮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다. 머리 위에선 고층 건물의 잔해와 유리 조각이 시속 35㎞의 속도로 떨어진다. 되도록 건물에서 떨어져 도로 한가운데를 걷는 것이 그나마 안전하다. 자판기에 동전을 넣는 도중에 지진이 왔더라도 재빨리 몸을 숨겨야 한다. 동전을 회수하거나 음료수를 뽑는 데 10초도 안 걸리지만 실제 상황에선 큰 차이다. 자판기가 넘어질 수도 있고, 에어컨 실외기, 간판, 전신주 등 머리 위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만약 카페나 식당에서 지진을 만났다면 테이블 아래로 몸을 숨겨 잠잠해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피난소 임시거처는 박스로 칸막이를 만들어 사용하는데 사생활 보호가 어렵다.

피난소 임시거처는 박스로 칸막이를 만들어 사용하는데 사생활 보호가 어렵다.

가상 도시의 피난 장소 안내 표지판을 따라 지정 피난 장소인 ‘중앙 공원’에 도착했다. 수도권에서 이런 지진이 발생했을 경우 당장 집에 돌아갈 수 없는 ‘귀택 곤란자 수’는 약 800만 명으로 예상된다. 수도권 인구 약 3000만 명 중 4분의 1이 임시 피난소에 몸을 맡겨야 한다. 제일 큰 불편은 화장실이다. 하수도가 역류할 수 있기 때문에 변기의 물을 내려선 안 된다. 비닐을 이용해 간이 화장실을 만들거나 검은 비닐을 망토처럼 뒤집어쓰고 쪼그리고 앉아 볼일을 봐야 한다. 각자 용변은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 다시 가져가야 한다. 도로가 끊겨 쓰레기 수거 차량이 최소 2주 동안 다닐 수 없다. 페트병을 이어 붙여 의자를 만들고, 마트의 비닐봉지로 임시 삼각붕대를 만드는 요령도 미리 배워 둬야 한다. 임시 피난소는 한 사람이 겨우 몸을 눕힐 수 있을 정도로 좁다. 박스를 접어 옷장 서랍을 만들고 생활용품을 담은 비닐을 곳곳에 매달아 쓴다. 도쿄도가 발간한 『도쿄방재』 책자는 “가족회의를 열어 피난 경로와 피난 장소를 점검하고 예행연습까지 해보라”고 권고한다. 철저한 준비 외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도쿄=윤설영 특파원 snow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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