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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 리포트]비혼모들이 말하는 낙태 문제 …“혼자 아이 키울 수 있는 사회부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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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오후 비혼모인 김슬기(24), 조가영(33), 안소희(30)(왼쪽부터) 씨가 한국 사회에서 비혼모로 사는 삶, 그리고 최근 벌어진 낙태죄 폐지 논쟁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신인섭 기자

14일 오후 비혼모인 김슬기(24), 조가영(33), 안소희(30)(왼쪽부터) 씨가 한국 사회에서 비혼모로 사는 삶, 그리고 최근 벌어진 낙태죄 폐지 논쟁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신인섭 기자

처음 네가 나를 찾아왔을 때 주위의 반응은 다 "그래서 진짜 낳을 거야?"였다. 그랬다. 사실 나도 너를 낳아 기를 자신이 없었다. 산부인과 번호가 적힌 종이를 손에 쥐고 몇 번을 고민했다. 나는 선택을 해야 했다. 그리고 내 선택은 너를 낳는 것이었다. 지인들은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해보라"며 말렸다. 부모님조차 내가 너를 품은 지 7개월이 될 때까지 임신중절이 가능한 병원을 알아보고 다녔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태어난 너, 사랑하는 우리 아가.

14일 오후 서울 대방동 '카페 인트리'에서 만난 세 명의 비혼모가 들려준 경험담을 요약하면 위의 글이 된다. 21개월 된 딸 해솔이를 키우는 조가영(33)씨와 올해 초등학교에 들어간 시우의 엄마 안소희(30)씨, 그리고 이제 26개월인 아들 한결이와 둘이 살고 있는 김슬기(24)씨, 세 사람이 공히 말했다. 돌이켜 보면 모든 건 '나를 지키기 위한' 선택의 문제였다고.

'카페 인트리'는 비혼모 단체 '인트리'가 비혼모들의 경제적 자립을 돕기 위해 최근 개업한 카페다. 조씨와 김씨는 현재 이 카페에서 일하며 아이를 키우고 있다.

세 사람은 얼마 전 인트리가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제작한 비혼모 인식 개선 영상에 출연했다. 영상에서 이들은 아이와 함께 나와 각자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꺼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거란 짐작이 들었다. 얼굴과 실명이 모두 공개되는 게 부담되진 않았는지 물었다.

조가영씨(이하 조)="그런 걸 고민할만큼 잘못된 행동을 한 적이 없어요.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데 떳떳해 하지 못할 거라고, 부끄럽게 여길 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편견 아닌가요?"

조씨의 대답에 이 질문이 세 사람에게 얼마나 바보같은 질문이었을지 깨달았다. 그저 이들의 이야기를 한 번 허심탄회하게 들어보기로 했다.

14일 서울 대방동의 한 카페에서 세 사람이 육아에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신인섭 기자

14일 서울 대방동의 한 카페에서 세 사람이 육아에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신인섭 기자

안소희씨(이하 안)="20대 초반에 3개월 정도 만난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덜컥 임신이 됐어요. 걔가 그러더라고요. 능력이 없어서 못키우겠다고. 그래서 혼자라도 키우겠다고 했죠. 혼자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대뜸 '애 낳을 거냐'고 묻더라고요. 임신중절 수술 비용까지 알려주면서요. 그 병원엔 다신 안 갔어요. 부모님한테도 시우 낳기 일주일 전까지 말 못했어요. 임신 사실을 알게된 후 엄마가 그러시더라고요. '지금이라도 어떻게 안 되니?'"

조="전 사실 끝까지 안 낳으려고 했어요. 그 친구와 결혼할 생각도 없었을 뿐더러 현재의 제 삶이 너무 소중했거든요. 여기저기 병원을 알아봤는데 좀 크고 안전할 것 같은 병원에서는 다 불법이라 수술을 안 해주더라고요. 그렇게 어영부영 7개월이 됐어요. 제 직업이 보육교사였는데 직장에서도 '결혼도 안 했는데 임신했다'는 이유로 잘렸어요. 그렇게 사회에서 점점 고립돼 가는 기분이랄까…."

김="임신 사실을 7개월 때 알았어요. 아이를 반대하는 부모님 뜻이 워낙 완강해 시골 병원까지 알아봤는데 거기서도 '지금 수술을 받으면 제 목숨까지 위태로운 상황'이라고 하더라고요. 아기 아빠에게 말해 결혼 날짜를 급하게 잡았는데 아이 낳기 전날 아기 아빠와 친구들에게 폭행을 당했어요. 그날 바로 병원에서 유도분만으로 한결이를 낳았죠. 부모님은 한결이를 바로 입양기관에 보냈는데 도저히 아이 없인 못살 것 같아서 제가 다시 데려왔어요. 그리고 지금은 아기와 둘이 살고 있어요."

그렇게 모두의 만류에도 이들은 '아이와의 삶'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 선택으로 짊어져야 하는 짐은 한없이 무거웠다.

조="기초수급 혜택을 받아 수급비가 80만원 정도 나오고 있어요. 이걸로 둘이 살아요. 당연히 빠듯하죠. 그래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놓고 여기서 아르바이트 하고 있어요. 그나마 전 사정이 나은 편이에요. 부양의무자의 소득이 잡히면 수급도 못 받아요. 아이를 낳고 나서 부모와 연을 끊게 되는 비혼모들이 많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소득이 잡히면 수급이 안 나와요."

안="아이가 커갈수록 양육 수당이 줄어요. 시우가 네 살 때 다시 사회활동을 시작했어요. 어린이집에서 우리 아이가 제일 귀가가 늦어 퇴근하면 늘 어린이집까지 전력질주 하던 기억이 나요."

김="한결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간호조무사 시험을 보러 학원에 다녔거든요. 근데 애가 몸이 약해서 자주 어린이집을 쉬어야 했어요. 맡길 데가 없으니까 학원에 데리고 간 적도 있는데 선생님이 '애를 데리고 오면 어떡하냐'고 엄청 뭐라 하더라고요. 그날 이후 어린이집에 '아이가 정말 아프지 않다면 그냥 좀 봐주실 수 없냐'고 말씀드렸어요."

조="근데 또 직업이 생기면 수급이 끊겨요. 그래서 일 안 하고 노는 비혼모들도 있어요. 어차피 괜찮은 데 취직하기도 어려우니까. 확실히 법이든, 사회든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14일 서울 대방동 '카페 인트리'에서 모인 세 명의 비혼모들. 조가영(가운데)씨는 "낙태죄는 아이의 '생명권'을 말하면서도 아이가 '사람답게 살 권리'는 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신인섭 기자

14일 서울 대방동 '카페 인트리'에서 모인 세 명의 비혼모들. 조가영(가운데)씨는 "낙태죄는 아이의 '생명권'을 말하면서도 아이가 '사람답게 살 권리'는 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신인섭 기자

최근 논쟁이 붙은 낙태죄 폐지 찬반 논쟁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궁금했다.

조="아이를 낳을지, 아니면 임신중단을 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은 당사자의 몫이에요. 여기 모인 우리도 선택을 한 거잖아요. 이걸 법으로 정하는 게 과연 맞는 걸까요. 그렇게 태어난 아이와 여성의 삶은 누가 책임져 주나요. 낙태죄는 아이의 '생명권'을 말하면서도 아이가 '사람답게 살 권리'는 말하지 않아요."

안="최근 아이 아빠를 상대로 양육비 소송을 시작했어요. 전 아이와 온갖 편견과 경제적 어려움을 감당하며 살고 있고 아이는 커갈수록 아빠를 찾는데, 정작 자기는 누릴 거 다 누리고 있는 모습에 화가 났어요. 보통 양육비로 요구하는 평균 금액이 월 50만원이에요. 그 이상을 요구하면 따로 또 증빙자료를 제출해야 한대요. 소송 과정에서 남자 측에게 돈 뜯어내려는 '꽃뱀' 취급 받는 경우도 허다해요."

조="상황이 이러니 양육소송도 포기하고 그냥 혼자 아이를 키우는 비혼모들이 많죠. 아이를 낳든, 지우든 왜 모든 책임은 여성이 져야 하는 걸까요. 그게 너무 답답해요."

1시간으로 예정됐던 인터뷰 시간은 어느새 2시간 가까이 돼 가고 있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남아 있었지만 이제 돌아갈 시간이었다. 기다리는 아이에게로, 아이와 함께 살아가야 할 생계로. 세 사람이 찍은 영상의 마지막에는 이런 문구가 등장한다. '어떤 조건에서 태어난 아이라도 안심하고 자랄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홍상지·대구일보 이아람 기자 hong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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