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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플랫폼 전성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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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창규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김창규 이노베이션 랩장

김창규 이노베이션 랩장

2003년 초 국내 기업 간 ‘전쟁’이 벌어졌다. 주인공은 국내 최대 기업인 삼성전자와 당시 혜성처럼 떠오르던 할인점이었다. 삼성전자가 포문을 열었다. 삼성전자는 할인점에 제공하는 고급 가전제품의 납품가를 출고가 대비 92~94%에서 98%로 올리고 매장에 파견한 판촉직원을 철수시켰다. 할인점이 중소도시로까지 확장하면서 할인점 간 경쟁이 치열해지자 제조업체에 무리하게 가격 인하를 요구한 데 따른 반격이었다. 여기에 할인점의 가전 판매 비중이 커지면 자사의 대리점이 타격받을 것이란 우려도 깔려 있었다. 전자제품 시장에서 직영 대리점 점유율은 1997년 외환위기 전까지만 해도 70%를 넘어섰지만 이때는 50%대로 떨어졌고, 양판점이나 할인점은 각각 25%, 15% 수준이었다.

할인점도 실력행사에 들어갔다. 매장에 진열된 삼성전자 제품을 모조리 철수시켰다. 시간이 지날수록 할인점의 삼성전자 제품 판매가 크게 줄었고, 경쟁사의 점유율이 높아졌다. 결국 삼성전자는 한 달여 만에 납품가 인상을 철회했다. 국내 시장의 헤게모니(주도권)가 제조업계에서 유통업계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그 후 할인점은 다른 제조업체와의 힘겨루기에서 번번이 승리하며 독주 체제를 굳혔다.

할인점의 강점은 전국 유통망이다. 물론 삼성전자도 직영 대리점이라는 강력한 유통망이 있었다. 하지만 할인점엔 있고 직영점엔 없는 것이 있었다. 바로 ‘비교 구매’였다. 당시 소비자의 구매 행태는 특정 회사 제품만 보는 게 아니라 한자리에서 여러 브랜드 제품을 비교하며 살 수 있는 할인점이나 양판점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이렇게 막강하던 유통업체도 요즘 불안에 떠는 신세가 됐다. 이번에도 혜성처럼 등장한 플랫폼이 유통업체의 권좌를 무너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 기업의 격전지인 미국에서 확연하다. 한때 깃발 꽂는 곳마다 시장을 장악한 유통 공룡 월마트는 ‘데워지는 물속의 개구리처럼 서서히 죽고 있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듣는다. 시장의 블랙홀이라 불리는 아마존 때문이다. 94년 온라인 서점에서 출발한 아마존이 음반·DVD·음식·장난감 같은 일상용품뿐 아니라 전자책 단말기, 클라우드 서비스 등으로 무한 확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통 시스템을 보면 한쪽은 생산자, 다른 한쪽은 소비자로 연결되는 단선적 형태다. 하지만 생산자와 소비자가 상호작용을 하는 플랫폼은 무언가를 교환하면서 가치를 만드는 장이다. 생산자가 소비자가 되고, 그 역도 성립하며 가치를 기하급수적으로 창출해 낸다. 에어비앤비나 우버가 숙박시설이나 택시 하나 소유하지 않고도 시장을 뒤흔드는 비결이다. 이제 플랫폼 없이는 쫓기며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시대가 됐다.

김창규 이노베이션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