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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하경 칼럼

중국이 그렇게 두려운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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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
이하경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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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아인혼 전 미국 국무부 비확산·군축담당 특보가 지난주 내게 비사(秘史)를 얘기했다. 클린턴 대통령 방북 추진을 위해 2000년 10월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평양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치명적 사드 보복 당하고도 #중국을 WTO 제소 안 한 건 문제 #김정일도 ‘위협하는 이웃’ 간주 #야심 없는 미국과 더 가까워져야

올브라이트: “미군의 한반도 주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김정일: (직접적인 대답을 피하면서) “우리 한국인(남북한 모두 포함)에게는 착한 이웃이 없다. 중국·러시아·일본은 항상 우리를 위협하고, 영토를 욕심냈다. 우리는 영토를 욕심내지 않는, 멀리 있는 강한 친구를 갖고 싶다. 한국(남북한)엔 미국과 친구가 되는 것이 이익이다.”

물론 미국 손님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겠지만 중국에 대한 북한의 불신이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아인혼은 “사드 보복을 보니 중국은 ‘약자를 괴롭히는 존재(bully)’가 됐다”고 비판했다.

중국의 사드 보복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정부는 사드 추가 배치 불가, 미국 미사일방어(MD) 체계 불참, 한·미·일 군사동맹 비추진 등 3노(No)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합의문 어디에도 사드 배치가 북핵에 대비하는 주권적 조치라는 입장은 담겨 있지 않았다. 중국의 사과나 유감 표시도 없었다. 무엇보다 중국의 일방적인 경제 보복에 대해 세계무역기구(WHO)에 제소하지 않은 것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문재인 정부로서는 북핵과 평창 겨울올림픽에 대한 중국의 협조를 얻어내야 하는 현실적 제약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이제 밀면 밀리는 만만한 나라가 됐다.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치명적인 공격을 받고 13조~20조원으로 추정되는 피해를 입었는데 한국의 공식 대응이 없어 다른 나라들이 의아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이러면 중국이 쉽게 제2, 제3의 사드 보복을 할 수 있다. 명백하게 국익에 반하는 일이다.

이하경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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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전 한국에 온 카럴 더휘흐트 전 EU 통상장관은 “중국은 거칠게 다뤄야 한다”고 했다. 미국 하원은 지난 3월 이례적으로 중국의 한국에 대한 통상 보복 행위를 비난하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각국 언론도 중국을 비판하고 있다. 우리가 중국을 WTO에 제소했다면 통상 분야에서 ‘세기의 법정’이 열렸을 것이다. 여기서 “세계화는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흐름”이라면서 자유무역의 수호자를 자처하고 있는 시진핑의 호기를 무색하게 만들 기회가 주어졌을 것이다. 미국 내 코리아 패싱 분위기도 누그러지지 않았을까.

2001년 WTO에 가입한 중국은 차별기간 1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미국과 EU, 일본으로부터 시장경제 지위(market economy status)를 받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상대국이 덤핑률을 매길 때 고율의 관세를 적용받는 처지다. 한국은 2005년 중국에 시장경제 지위를 부여하는 우호적 조치를 취했다. 최병일 이화여대 교수는 “이걸 빼앗겠다고 하면 협상의 레버리지가 될 수 있었다”고 아쉬워 한다.

중국에 대한 WTO 제소가 양국관계의 파탄을 초래하지는 않는다. 중국은 지금까지 39번 제소당했다. 미국이 21번, EU가 8번 걸었다. 일본은 센카쿠 열도 분쟁 이후 중국이 보복하자 즉시 두 번 제소했다. 한국의 무대응과는 정반대였다. 심지어 개도국인 과테말라도 한 번, 멕시코도 네 번 제소했다. 그렇다고 중국과 이들 나라의 관계가 끝장나는 건 아니다. 그저 통상 세계의 자연스러운 업무 절차(Business as usual)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1995년 WTO에 가입한 이후 33건의 분쟁에 참가해 70%에 가까운 승소율을 기록했다. 그런데 중국의 횡포엔 침묵한 것이다.

요즘 세계 질서는 혼돈 상태다. 세계의 대통령이라는 미국의 트럼프가 세계 평화, 자유 수호, 인권 같은 보편적 가치는 내려놓고 그저 내 나라의 돈벌이에만 매달리고 있다. 중국은 미국을 돈으로 다루면 되는 만만한 존재로 보기 시작했다. 시진핑은 2050년에 세계 최강국이 되겠다고 했지만 중국 엘리트들은 시기를 훨씬 당길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

얼마 전 세계 최고(最古)의 출판사인 케임브리지대 출판부가 발행하는 학술지 ‘차이나 쿼터리’ 웹사이트에서 논문 300여 편이 중국의 요청에 의해 삭제됐다가 사흘 만에 복원됐다. 천안문 사태, 문화대혁명 등 중국이 싫어하는 주제의 논문들이었다. 이렇게 유럽의 학문 자유를 위협할 정도로 중국의 힘은 세졌다. 중국과 국경을 접한 나라들은 영토분쟁에 편할 날이 없다. 한국의 WTO 제소 포기는 폭주하는 중국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다.

17년 전 김정일은 ‘혈맹’ 중국이 아닌 미국과 친구가 되는 것이 이익이라고 했다. 그 이유를 이제 우리도 사드 보복을 겪으면서 똑똑히 알게 됐다. 균형외교도 좋지만 멀리 있는 착하고 강한 친구와 친해지는 동맹외교가 우선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략적 협력 동반자인 중국에도 할 말은 해야 한다. 그래야 동맹국의 지지를 받고, 주권과 자존심을 지킬 수 있다.

이하경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