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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기다리는 자의 고백 같은 …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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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8호 21면

필립 헤레베헤와 앙상블 무지크 오블리크의 '대지의 노래' 93년 녹음.

필립 헤레베헤와 앙상블 무지크 오블리크의 '대지의 노래' 93년 녹음.

몇 주 전 인감증명이 필요해 주민센터를 찾았다. 담당자가 신원 확인을 하는 사이 책상 위에 있는 서류 두 장에 시선이 닿았다. 출생신고서와 사망신고서. 민원인의 편의를 위해 예시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잠깐 동안 두 서류 사이에 하나의 삶이 지나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또 다른 서류들과는 달리 두 신고서는 내 손으로 쓸 수 없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음 속에 늦은 가을이 찾아왔다.

WITH 樂 : 구스타프 말러 ‘대지의 노래’

인간은 생의 이전을 알지 못하고 이후를 이야기하지 못한다. 그러니 인간이 미지의 시간을 예술을 통해 이해하려 했던 것은 당연해 보인다. 구스타브 말러에게는 음악이 알 수 없는 세계의 문을 여는 열쇠였다. 당연히 죽음의 문제는 평생 그를 따라다니던 질문이었다.

불행하게도 말러는 1907년 자신의 딸 마리아의 사망신고서를 작성한다. 그 해 빈 음악계로부터 퇴출 통보를 받고 설상가상으로 심장병 진단까지 받는다. 하나의 세계가 파국을 맞고 죽음의 신이 거실 창문을 기웃거린다고 느꼈음직하다. 그가 잠시 빈을 떠나 외딴 오두막에서 만든 곡이 ‘대지의 노래’다. 이 곡은 말러가 밝혔듯이 ‘가장 개인적인 작품’이자 제자인 브루노 발터의 표현을 옮기자면 ‘죽음을 기다리는 자의 마지막 고백’과도 같은 곡이다.

‘대지의 노래’는 이백, 맹호연 등의 중국 한시 7수를 바탕으로 가곡과 교향곡을 혼합한 것이다. 학자들 사이에서 이를 가곡으로 볼 것인지 교향곡으로 볼 것인지 논쟁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평범한 접근법은 아니라 하겠다. 가사는 삶과 죽음에 대한 동양적 관조가 주를 이루며 음악적으로는 민요에서 사용되는 ‘도레미솔라’로 구성된 5음계가 중심이 되어 동양적인 분위기를 강조한다. 말러의 다른 초기 가곡들보다 어떤 면에서는 친숙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 작품은 전설적 음반이 존재한다. 초연을 맡기도 했던 브루노 발터가 캐서린 페리어와 줄리어스 파차크와 함께 한 녹음이다. 발터의 탐미적인 연주와 페리어의 쓸쓸한 음색, 그리고 전후의 어두운 분위기가 만들어낸 1952년 음반은 ‘대지의 노래’의 스테디셀러다. 이와 대척점에 있는 음반이 필립 헤레베헤와 앙상블 무지크 오블리크의 93년 녹음이다. 14명이 연주한 실내악버전인데, 쇤베르크가 1920년대에 손을 댔다가 중단한 것을 83년 라이너 린이 다시 작업한 것이다.

1악장은 ‘현세의 불행에 대한 술노래’다. 이백의 시를 모티브로 했다. 호른이 당당하게 문을 열면 현악총주 사이로 피아노 소리가 바쁘게 오간다. 이어 테너 한스 페터 블로흐위치가 미성으로 “이미 술이 금잔에 부어졌지만”이라고 노래한다. 전개부인 “하늘은 영원히 푸르고”의 도입부는 실내악 편곡의 매력을 보여준다. 바이올린·피아노·잉글리쉬 호른·플루트가 무한한 자연과 유한한 인간의 차이를 비현실적 분위기로 예견한다.

2악장 ‘가을에 고독한 자’는 첫 가사를 고스란히 음악적으로 옮겨놓는다. 가을 안개가 호수 위로 파랗게 일어나듯 목관악기들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이끈다. 3악장은 중국 동화를 보는 듯하다. 트라이앵글이 만드는 이국적인 분위기와 수시로 울리는 드럼, 그리고 그 위를 희롱하는 목관악기들이 매혹적이다. 4,5악장의 흥건한 분위기가 끝나고 나면 29분가량의 ‘작별’ 악장이 시작된다.

사실 마지막 악장을 위해 전반부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죽음의 발걸음 같은 저음 연타와 목관악기의 극단적 대비가 곡의 분위기가 달라졌음을 느끼게 한다. “해는 서산으로 지고”로 시작하는 브리기트 램메르트의 묵직한 음성을 플루트가 홀로 맞는다. 실내악 버전의 장점이 여실히 드러나는 악장이다. 악기들이 어떻게 어울리고 배치되는지 투명하게 드러나 음악이 귀에 쏙쏙 들린다.  ‘대지의 노래’와 함께 사라져 가는 것들을 돌아보기 좋은 계절이다. ●

글 엄상준 TV PD 90empero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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