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처음엔 예술의 벗 … 나중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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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8호 14면

대영박물관은 삼성전자의 후원으로 ‘삼성 디지털 디스커버리 센터’를 만들어 어린이들이 다양한 예술 체험을 할 수 있게 하고 있다.

대영박물관은 삼성전자의 후원으로 ‘삼성 디지털 디스커버리 센터’를 만들어 어린이들이 다양한 예술 체험을 할 수 있게 하고 있다.

기술은 예술의 구원자가 될까 아니면 파괴자가 될까.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변곡점을 지난 기술이 예술의 영역까지 손을 뻗고 있다. 구글의 인공지능 예술가 ‘딥 드림(Deep Dream)’은 샌프란시스코의 한 경매에서 그림 29점을 1억1600만 원에 팔아치웠고, AI 작곡가 주크덱(Jukedeck)을 통하면 누구나 저작권 걱정 없이 동영상의 배경음악을 만들 수 있다. 인공지능이 쓴 소설을 읽고 로봇이 연기하는 연극을 볼 날도 멀지 않은 셈이다. 실제로 지난 6월 영국 로열셰익스피어극단이 공연한 ‘템페스트’에서는 인텔의 VR기술로 만든 아바타가 극장 안을 휘젓고 다녔다.

김상훈의 컬처와 비즈니스: #기술과 문화산업

IBM은 올해 초 ‘아트 위드 왓슨(Art with Watson)’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예술가들과 인공지능 왓슨이 협업을 통해 마리 퀴리, 찰스 다윈 같은 위인 7명의 데이터를 분석(위인 중 한 명은 다름 아닌 IBM 창업자 토마스 왓슨이었다), 각각의 숨겨진 위대함의 에센스를 초상화로 표현하는 작업이었다. 지난 4월 뉴욕 캐딜락 하우스에서 공개된 이 전시(‘Hidden Portraits’)를 보고 한 미국 언론은 “주관적인 미술이 아닌 데이터에 기반한 객관적 미술”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마이크로소프트도 자사 인공지능과 얼굴인식 기술을 이용해 렘브란트 사후 350년 만에 렘브란트와 똑같은 스타일로 남자의 초상화를 그려내는 ‘넥스트 렘브란트(The Next Rembrandt)’ 프로젝트를 선보인 바 있다.

정보기술을 예술에 응용하는 1차적인 접근은 ‘디지털화(digitization)’인데, 그 중심에 ‘구글 컬처럴 인스티튜트(GCI)’가 있다. 박물관과 미술관 작품들을 온라인에서 초고해상도로 관람하게 해주는 이 가상 박물관에 등록된 기관이 1000개를 돌파했다. (가상)소장품은 600만 점이 넘는다.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DDP를 포함한 40여 기관이 포함돼 있다. 미술관에 가지 않고도, 아니 가서 보는 것보다 더 선명하고 생생한 화질로, 대영박물관의 앗시리아 부조와 파리 가르니에 오페라극장의 샤갈 천정화 ‘꿈의 꽃다발’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구글은 또 ‘스트리트 아트 프로젝트’를 통해 전세계 거리 예술과 벽화를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 놓았다. 덕분에 사라진 퀸즈 롱아일랜드의 5포인츠(5Pointz) 벽화들을 볼 수 있다. 구글은 공연의 디지털화에도 앞장서고 있는데, ‘구글 아트앤컬처’ 앱을 사용하면 60개 공연장의 오페라·연극·무용 공연을 360도 뷰로 연주자나 댄서의 관점을 포함한 다양한 시점에서 시청할 수 있다.

구글 아트 프로젝트의 웹사이트 화면. 전세계 박물관과 미술관의 명작들을 초고화질로 감상할 수 있다.

구글 아트 프로젝트의 웹사이트 화면. 전세계 박물관과 미술관의 명작들을 초고화질로 감상할 수 있다.

디지털로 가능해진 예술의 상호작용

예술의 디지털화는 이미 대세가 되었다. 19일과 20일 내한공연을 하는 베를린 필 지휘자 사이먼 래틀은 16년간의 재임기간 최대업적 중 하나로 ‘디지털 콘서트홀’을 구축한 것을 들고 있다. 얼마 전 사임한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의 토마스 캠벨 관장도 디지털 사업에 대대적인 투자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뉴욕 메트 오페라의 ‘HD 라이브’, 영국 내셔널 시어터의 ‘NT 라이브’도 예술 디지털화의 오래된 사례다.

디지털화는 관객 도달(reach) 측면에서 확실한 장점이 있다. 문화 소외 계층에게 문화 향유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사회공헌으로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상호작용(interaction)’이 가능한 전시의 기획이 가능하다는 것이 눈에 띈다. 영국의 테이트 미술관은 마이크로소프트의 후원 하에 디지털 기술을 통한 관람 경험의 혁신을 제안한 팀에게 매년 ‘IK 프라이즈’라는 상을 주고 있고, 삼성전자는 대영박물관에 ‘삼성 디지털 디스커버리 센터’를 만들어 관람객들이 자사의 태블릿 PC와 가상현실(VR), 3D 기기를 활용해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게 했다. 미국 스미스소니언의 허시혼 뮤지엄은 올해 초 쿠사마 야요이의 ‘인피니티 미러’ 전시를 기획하면서 장애인의 관람에 대한 고민 끝에 스마트폰과 연계된 VR 관람을 마련해 칭찬을 받았다(이것도 삼성전자가 후원했다). 크레머 컬렉션(Kremer Collection)은 아예 렘브란트 등 17세기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거장들의 작품 전체를 헤드셋을 끼고 관람하는 VR 갤러리를 지난 10월에 오픈했다.

기술로 인해 사라져가는 각종 산업들

이 같은 새로운 관람방식이 오프라인(이른바 ‘브릭 앤 캔버스’) 미술관이나 공연장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없을까. 아직까지는 대부분 ‘참신한 시도’ 혹은 ‘찻잔 속의 태풍’으로 보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 온·오프라인이 보완재로 공생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베를린 필하모닉이 디지털 콘서트홀과 시너지를 내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도 있다.

‘양질의 문화예술 콘텐트를 손쉽게’ 볼 수 있게 해 준다는 명분에 발끈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의 본질은 ‘와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에 있으며 구글·삼성과 같은 IT 기업들이 추구하는 비즈니스 모델의 핵심도 거기에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첫 디지털 혁신인 인터넷이 음반 산업과 홈비디오 산업을 붕괴시켰고, 스마트폰 플랫폼을 활용한 모바일 기술은 금융과 제조업, 교육, 방송 및 엔터테인먼트 산업 전반에 이른바 ‘빅뱅 와해(big bang disruption)’를 가져오고 있다. 돌이켜보면 스마트폰 앱이 하나 등장할 때마다 디지털 카메라, MP3 플레이어, 전자사전 같은 것들이 소리없이 사라져갔다. 4차 산업혁명이 본격화되면 인공지능을 장착한 로봇과 사물 인터넷이 남아 있는 산업을 또 하나씩 제거해 갈 예정이다.

디지털 기술은 당분간 예술계의 총애를 받겠지만 궁극적으로 문화예술 산업을 와해시킬 충분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디지털 공연과 VR 관람 체험이 ‘충분히 좋아진다면’ 더 이상 아무도 공연장과 미술관을 찾지 않는 날이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디지털로 절대 대체불가능한 아날로그 예술 체험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말이다. ●

김상훈 :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 미술경영협동과정 겸무교수. 아트 마케팅, 엔터테인먼트 마케팅 등 문화산업 전반에 걸쳐 마케팅 트렌드와 기법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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