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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채비'...12만 관객 울린 신예감독의 뚝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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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지금 울고 있니?' 영화 '채비'에 12만 관객 폭풍 눈물  

영화 '채비'의 한 장면. [사진 오퍼스 픽처스]

영화 '채비'의 한 장면. [사진 오퍼스 픽처스]

 신예 감독이 장애인 가족을 그린 작은 영화가 벌써 12만 명의 관객을 울렸다. 감독에 따르면 "슬픔으로 관객을 자극하는 게 싫어 '더 슬플 수도 있는' 장면은 편집 과정에서 아낌없이 들어냈다"고 하는데도 말이다. 지난 9일 개봉한 영화 '채비'(감독 조영준, 제작 26컴퍼니) 얘기다.

지적 장애 아들과 어머니의 소소한 일상 소재로 #고두심, 김성균 '내공 연기'와 절제된 연출로 푹풍 눈물 #작은 영화 핸디캡 깨고 입소문 타고 관객 12만 명 돌파

지적 장애를 가진 아들 인규는 엄마의 손길이 24시간 필요하다. [사진 오퍼스 픽처스]

지적 장애를 가진 아들 인규는 엄마의 손길이 24시간 필요하다. [사진 오퍼스 픽처스]

 '채비'는 발달장애를 가진 서른 살의 아들 인규(김성균)와 그를 24시간 돌봐야 하는 엄마 애순(고두심)의 생활을 그린 이야기. 자신의 도움 없이는 밥 한 끼도 해결하지 못하는 아들을 두고 세상을 떠나야 하는 엄마가 아들의 홀로서기를 희망하며 이별을 차근차근 준비해가는 과정을 좇는다.

 영화는 관객을 '웃기고 울리기 위한' 자극적인 장치 없이 관객을 몰입시킨다. 대단한 사건이 없는데도 고두심·김성균 두 배우가 보여주는 모자의 일상으로 감정을 서서히 고조시키며 이야기를 끌어간다. 이 영화의 극본을 쓰고 메가폰을 잡은 이는 조영준 감독(37). 절제된 연출로 스크린에 감정의 울림을 켜켜이 쌓아 올린 솜씨를 보고 나면 이 잔잔한 이야기를 장편 데뷔작으로 내세운 '뚝심'의 주인공이 궁금해진다.

영화 '채비' 촬영현장의 조영준(가운데) 감독. 오른쪽이 인균 역을 맡은 김성균 배우. [사진 오퍼스 픽처스]

영화 '채비' 촬영현장의 조영준(가운데) 감독. 오른쪽이 인균 역을 맡은 김성균 배우. [사진 오퍼스 픽처스]

'채비'는 자극적인 장치도 없는데다 장애인 보호자 사후 케어 시스템에 대한 사회적인 메시지까지 담았다. 관객 입장에선 오히려 이런 영화가 만들어져 상업영화로 개봉된 사실이 신기하더라. 

 "개봉되기까지 포기할 뻔한 고비가 많았는데, 요즘 '채비'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은 관객들을 보며 내가 외려 많은 위안을 받고 있다. 발달 장애인 가족을 모시고 특별시사를 많이 했는데, 많은 분이 영화를 보고 나오며 모두 내 손을 꼭 잡아주셨다. 여기까지 온 게 감사할 뿐이다."

TV에서 80대 노모와 50대 지적 장애인 아들을 다룬 다큐를 보고 영화를 구상하게 됐다고. 

 "2013년에 본 '세상에 이런 일이'(SBS TV)란 프로였는데, 이것을 보고 정말 많이 울었다. '내게 이런 감성이 있었던가?' 스스로 놀랐을 정도로. 나이 드신 어머니는 청소부로 일하고, 아들은 어머니 없이는 아무 일도 못 한다. 어머니가 아파트 한 동을 청소하는 동안 아들은 아파트 꼭대기 층 복도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퍼즐을 하며 어머니를 기다리고. 말미에 어머니가 아들에게 보내는 영상편지에서 웃으시면서 '네 덕에 심심했던 적이 한 번도 없고, 매일 재미있고 행복했다. 너는 하늘이 내게 보내준 천사 같아'라고 하더라. 이 말은 영화 대사에도 썼지만, 내겐 정말 큰 충격이었다. 세상의 수많은 '인규 어머니'를 위로해줄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조 감독은 다큐 속 노모가 '아들과 한날한시에 죽고 싶다'고 하는 말을 듣고 문득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아들은 어떻게 될까?' 궁금해졌다고 한다. 장애인 가족을 만나고 보호 시설 등을 찾아다니며 취재하기 시작했다. 취재할수록 장애인 보호자가 세상을 떠난 뒤 장애인을 돌보는 사회 시스템이 굉장히 열악하다는 걸 알게 됐다. "다큐를 보기 몇 달 전, 서울의 모 구청 홍보팀에서 일하며 지방에 있는 장애인 보호 시설을 방문한 경험도 영화를 만들어야겠다 결심을 굳히는 계기가 됐죠. 그때 본 시설의 충격적인 이미지는 중 엄마인 애순이 시설을 찾아다니는 과정에 고스란히 재현됐습니다. " 조 감독의 설명이다.

시나리오를 완성한 후 투자사를 찾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투자사 관계자들은 "장애인 연기를 하려는 배우가 없을 것""절대로 개봉까지 못 간다"며 말렸다. '선의의 투자사'를 만나기도 했으나 최종 심사에서 부결되기도 했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투자사를 만나 영화가 만들어지고 개봉된 일 자체가 모두 기적 같다"고 했다. 그가 감사하게 여기는 일이 또 있다. 비록 신예감독이지만 시나리오나 콘티 부분에 투자사가 전혀 개입하지 않고 감독에게 자율권을 준 것이다.

영화 '채비'의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조영준 감독. '채비'는 그의 장편 데뷔작이다. 우상조 기자

영화 '채비'의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조영준 감독. '채비'는 그의 장편 데뷔작이다. 우상조 기자

 -장애인 캐릭터를 스크린에 담으며 세운 원칙이 있었다고.

 "'장애인을 희화화하거나 미화하지는 말자'고 했다. 장애인을 극영화에 담는 일은 정말 두렵고 조심스러운 일이다. 주변에선 '당신이 아무리 마음을 다해 찍어도 욕을 먹는다'고 했다. 그래서 편집 과정에서 더 많이 웃기고 더 슬픈 장면일수록 덜어냈다. 영화에서 '자극'과 '쾌감' 수위를 높이려면 아무래도 '사디즘적'인 방식을 쓰게 된다. 고난을 더 만들고 악당을 등장시켜 캐릭터나 배우를 괴롭히게 된다. 하지만 영화 속 인규에게는 이미 장애가 있고, 어머니 애순은 죽음을 앞두고 시간과의 싸움을 벌이고 있지 않나. 두 사람을 더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도움 없이는 끼니조차 챙기지 못하는 발달 장애아들 인규에게 홀로서기를 준비시키고 있는 엄마 애순. 그녀는 세상과의 이별을 그렇게 준비하고 있었다. [사진 오퍼스 픽처스]

자신의 도움 없이는 끼니조차 챙기지 못하는 발달 장애아들 인규에게 홀로서기를 준비시키고 있는 엄마 애순. 그녀는 세상과의 이별을 그렇게 준비하고 있었다. [사진 오퍼스 픽처스]

 -고두심, 김성균 배우와의 작업은 어땠나. 

- "두 배우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고두심 선생님은 사람 죽이고. 건물 부수는 등 이른바 '쎈 영화'가 많은데 신인 감독이 이런 영화 해도 괜찮겠냐'며 걱정하셨다. 김성균씨는 '아내가 시나리오를 보고 펑펑 울었다'며 출연 결정을 알려왔다. 김성균씨는 장애인 연기가 부담됐을 법한데 장애인 관련 동영상을 많이 보며 정말 많이 연구해왔다. 두 분께 정말 많은 빚을 졌다."  =

조영준 감독은 배우들의 연기를 보며 많이 울었다고 한다. 대본 리딩 때도 울고, 촬영 때도 눈물을 흘렸다.조 감독은 "배우들에게 감사할 뿐"이라고 했다. [사진 오퍼스 픽처스]

조영준 감독은 배우들의 연기를 보며 많이 울었다고 한다. 대본 리딩 때도 울고, 촬영 때도 눈물을 흘렸다.조 감독은 "배우들에게 감사할 뿐"이라고 했다. [사진 오퍼스 픽처스]

 -배우들과 대본 리딩을 하며 울고, 촬영 중에도 울었다던데. 

"많이 울었다. 애순이 아들 인규를 지인의 장례식장에 데려가 천진난만한 아들을 바라보며 ‘인규야 엄마도 죽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오케이' 사인을 내며 목이 멨다. 고두심 선생님이 저보고 '주책바가지'라고 하더라(웃음). 나중에 알고 보니 현장의 스크립터도, 현장편집자도 다 울었다.”

 아들 인규는 과연 세상을 잘 헤쳐나갈 수 있을까. 엄마 애순은 근심한다. [사진 오퍼스 픽처스]

아들 인규는 과연 세상을 잘 헤쳐나갈 수 있을까. 엄마 애순은 근심한다. [사진 오퍼스 픽처스]

처음엔 장애인 가족의 이야기로 읽혔는데, 다 보고 나니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더라. 세상의 모든 자식과 부모는 언젠가 이별을 경험한다.  

  "그게 바로 제가 하고 싶었던 얘기다. 우리 모두 언젠가 닥칠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 부모 눈에 자식은 항상 보살펴줘야 하는 대상이고. 살다 보면 누구나 가까운 가족의 부재를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을 만나게 마련이다. 각자의 방식으로 이별을 준비하고, 부재를 견디고, 계속 살아가야 한다. 극 중 어머니 이름 애순은 우리 어머니 이름이고, 누나 문경은 누나 이름이고. 나를 인규에 대입한 거다."

발달 장애우의 어머니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그들의 자립이다. 사회적인 관심과 지원이 매우 필요한 부분이다. 인규는 한 걸음씩 세상으로 나아간다. 영화 '채비'의 한 장면. [사진 오퍼스 픽처스]

발달 장애우의 어머니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그들의 자립이다. 사회적인 관심과 지원이 매우 필요한 부분이다. 인규는 한 걸음씩 세상으로 나아간다. 영화 '채비'의 한 장면. [사진 오퍼스 픽처스]

다큐 속 어머니, 극중 애순이 아들에게 '네 덕에 하루하루가 재미있고 행복했다'고 한 말은 어떤 뜻이었을까.

 "각자의 해석이 있을 것 같다. 난 그게 애순이 아들에게만 하는 얘기가 아니라 과거의 자기 자신한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애순도 괴로운 시간이 적지 않았겠지만, 자신의 삶을 자체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며 받아들인 것인 게 아닐까."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라면. 

 "저희 어머니께서 영화를 보고 제게 하신 말씀이 있다. '누구에게나 이별은 슬플 수밖에 없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최고의 채비는 사랑'이라고. 이 말씀이 가장 가슴에 남는다."

단편 영화를 많이 만들어왔는데. 

 "서강대 국문과, 영상대학원을 졸업하고 지금까지 '생계형 시나리오 작가'로 일해오며 '마녀 김광자'(2012), '피아노'(2013), '사냥'(2015) 등 모두 7편을 연출했다. 운이 좋아서 영상제작 지원도 꽤 받았다. 이렇게 단편을 만들 수 있었기에 긴 시간을 기다리며 영화를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 같다."

다음 영화는.  

"파파라치가 주인공인 액션 스릴러다. 시나리오를 써놓고 '채비'를 작업하느라 잠깐 미뤄둔 작품인데 11월 말부터 본격 준비에 들어간다."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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