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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대훈의 시시각각

‘적(敵)을 폐(廢)하라’가 오해로 끝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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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고대훈 기자 중앙일보 기획취재1국장
고대훈 논설위원

고대훈 논설위원

6년 전 이맘때 노무현재단 이사장이던 문재인 대통령은 『문재인·김인회의 검찰을 생각한다』를 펴냈다. 검찰의 권력화와 개혁의 좌절,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 최후에 대한 회한 등을 생생하게 담았다. ‘무소불위의 권력 검찰의 본질을 비판한다’라는 부제가 암시하듯 검찰에 대한 깊은 불신과 배신이 바탕에 흐른다. 그런 문 대통령이 검찰에 적폐청산의 주역을 맡긴 건 미스터리다. 어떤 극적 변화가 그를 움직이게 했을까 하는 궁금증에서 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문 대통령, 불신과 배신의 검찰이 #과거 털어내고 변신했다고 믿나

문 대통령은 검찰을 ‘저항’과 ‘복수’라는 두 개의 프레임을 통해 바라봤다. 저항은 2003~2004년 불법 대선자금 수사 때, 복수는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때 각각 형성됐다. 문 대통령은 대선 자금 수사에 성공한 검찰이 “차라리 내 목을 쳐라”며 노무현 정권에 저항했던 쓰라린 기억을 갖고 있다. 이명박(MB) 정권의 검찰은 노 전 대통령에게 보복극을 펼쳐 ‘정치적 타살’로 몰았다고 본다. 그리고 “참여정부 이후 정치권력과 검찰의 결탁은 노골화됐고 정치검찰은 정권의 주구가 돼버렸다”는 결론을 내린다.

요즘 검찰의 행태는 문 대통령이 경험했던 과거와 너무도 흡사하다. 문 대통령은 검찰의 본질을 꿰뚫었다. “정치권력은 검찰을 이용하고, 검찰은 정치권력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극대화한다. 검찰은 대규모 부정부패 사건을 정치권력의 의도에 따라 왜곡하기도 한다.” ‘적폐 1호’라던 검찰이 정말 환골탈태한 걸까. 청와대 등 ‘정치권력의 의도에 따라’ 맞춤형 수사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마술에 가까운 검찰의 변신이 놀랍다.

검찰의 수사 방식도 문 대통령이 지적한 그대로다. “(검찰은) 수사와 재판이라는 형사 절차를 동원해 반대파 정치인을 파렴치한 형사범으로 만들어 처벌한다.” 노무현 정부부터 세 정권에 걸쳐 합참의장·국방장관·국가안보실장을 역임한 ‘뼛속까지 무인(武人)’ 김관진을 고작 ‘댓글조작범’으로 감방에 몰아넣었고, 전 정권의 국정원장들은 ‘뇌물상납범’으로 엮었다.

문 대통령이 ‘인질사법’이라고 비판했던 무차별적 구속은 다반사다. “구속자는 외부세계와 고립됨으로써 방어권이 무력화되기 때문에 쉽게 수사기관에 굴복하게 된다. 이것을 ‘인질사법’이라고 부른다.” 검찰의 법전(法典)에는 불구속이나 무죄추정의 원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포승에 묶인 채 끌려다니는 한때 유명했던 인사들의 초라한 행색은 어린이들에게도 익숙한 구경거리가 됐다.

모욕주기식 수사를 문 대통령은 혐오한다. “여론재판이 이뤄진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만신창이가 됐다. 국민은 검찰이 흘리고 언론이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 쓴 확인되지 않는 사실에 흥분했다. 인간적인 모멸을 주는 것은 피해야 한다.” ‘MB를 (김관진 장관의) 공범으로 적시하지 않았다’거나 ‘해외 도피’를 이유로 MB를 출국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흘리는 것은 망신주기에 불과하다.

지금 검찰은 조금도 변한 게 없다. 권력의 요구인지, 검찰의 자발적 충성인지, 아니면 권력과 검찰의 교감 속에 이뤄지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과거가 답습되고 있다. 그런데 이제 시작이란다. 국정원은 블랙리스트 등에서 54명을 수사의뢰했고, 더불어민주당은 73건의 ‘적폐청산 리스트’를 만들었다. 이 모든 일이 검찰이라는 종착지로 모여들 것이다.

문 대통령이 6년 전 책 쓸 때를 돌아봤으면 한다. 그가 겪은 저항과 보복을 남기지 않는 절제된 수사가 되도록 견제할 시점이다. ‘적(敵)을 폐(廢)하라’는 말이 나돈다. 쌓인 폐단을 없애는 적폐(積弊) 청산이 아니라 정적의 폐기(씨 말리기)라는 뜻이라고 한다. 시중의 우스개는 그저 말장난으로 끝나야 한다.

고대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