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줄처럼 질긴 아귀는 여기 없다. 매워서 맛을 헤아릴 수 없는 양념도 없다. 콩나물 범벅 속에서 ‘발굴’해야 겨우 살점이 찾아지는 아귀찜이 아니다. 나물은 맛을 돋우는 데 필요한 만큼만 들어갔다. 야들야들한 아귀 토막과 도톰한 위가 확실한 주역이다. 뭔가 탁해 보이는 양념에는 아귀 간을 갈아서 넣었다. 간에 특별한 양념을 해서 소스에 섞는데 웬만한 집에서는 흉내 낼 수 없는 비법이다. 생아귀를 쓰지 않으면 간을 쓸 수 없고, 간으로 만든 소스는 이 집 주인이 개발했기 때문이다. 들깻가루도 들어갔다. 살에 양념과 간이 잘 스몄다. 맵기는 먹는 사람이 3단계로 선택한다.
'바다의 푸아그라' 아귀 간 푸짐한 수육
아구수육 접시에는 ‘바다의 푸아그라’라고 하는 간이 지붕처럼 올라가 있다. 간 크기가 어른 손바닥만 하다. 홍어 애(간)가 맛있다 하지만 아귀 애도 그에 못잖다. 위와 알집·창자도 보인다. 접시에는 수육이 가득하고 콩나물과 미나리가 드문드문 보인다. 그 구성이 아귀의 신선도를 시위하는 듯하다. 공들여 달인 국물에 삶은 고기는 질감이나 맛이 큰 포구에 가지 않으면 맛보기 어려운 특별한 별미다. 수육 삶은 국물을 따로 내주는데 시원하고 구수하기 이를 데 없다.
점심에만 하는 생아구탕은 국물이 시원하면서 칼칼하다. 우묵한 뚝배기에 양이 푸짐한데 탱글탱글한 아귀 살도 넉넉하게 들어있다. 채소류는 콩나물·미나리·파·새송이·생고추가 맛을 돋운다. 함께 차려진 반찬도 자리만 차지한 접시는 하나도 없다. 늙은호박전, 양배추샐러드, 도토리묵무침, 느타리버섯나물, 무생채, 총각김치, 아삭이고추된장무침, 미역줄기볶음, 된장에 박은 깻잎과 고추지, 솔치(말린 청어 새끼)와 고추장, 이것만으로도 밥 한 그릇 거뜬하겠다. 저녁상에도 같은 찬이 나온다. 늙은호박전 추가는 2000원을 내야 한다. 여름에는 애호박부추전으로 나온다.
이곳은 부산에서 10년, 서울에 올라와 5년째인 생아귀 전문점 ‘홍박아구찜(서울 마포구 마포대로7길 11 용진빌딩 지하 1층/전화 02-337-3066)’이다. 아현동 주민자치센터 앞에 있다. (※표준명이 ‘아귀’인데 음식 이름에는 ‘아구’가 주로 쓰인다. 지역 음식이 서울과 전국으로 퍼지면서 말도 따라가서 그렇다. 이 글에서는 음식점 고유표기는 그대로 따르고, 일반 서술은 표준명으로 쓴다.)
식사는 점심으로 생아구탕(1만4000원)이 있고, 다른 요리를 먹은 다음 남은 양념에 볶은 밥(2000원)과 공깃밥(1000원)뿐이다. 요리는 ▷아구수육(5만~7만원) ▷아구찜(4만~6만원) ▷해물아구찜(5만~7만원) ▷아구전골(4만5000~6만5000원)이 소·중·대로 나뉘어 있다. 얼핏 보기에 비싸다는 느낌을 피하기 어렵다. 하지만 상을 받아보면 그게 아니다. 양이 적지 않은 데다 나물보다 아귀 살이 많다. 얼리지 않은 생아귀라 살은 부드럽고 차지다. 신선도만큼 맛도, 흔히 먹는 냉동 아귀찜과는 확실히 다르다. 먹고 나면 비싼 값을 하는구나, 하고 생각이 바뀔 것이다.
부산서 생아귀 안 올라오는 날이 쉬는 날
아귀라면 대한민국 제일이라고 자부하는 홍탁근(61)씨 부부와 대학 조리학과를 나와 8년째 부주방장으로 아버지를 돕고 있는 아들 주완(31)씨 셋이 운영하는 가족식당이다. 그래서 휴일이 없다. 매일 오전 11시 30분부터 오후 10시까지 문을 연다. 쉬는 날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하늘이 정한다. 날씨가 안 좋아 어선이 조업을 못 해 부산에서 생아귀가 올라오지 않는 날이 쉬는 날이다. 그런 날이 언제인지 모르니 예약하고 가는 편이 안전하다. 좌석은 100석.
이 집은 어쩌면 나에게 역차별을 받았다 할 수 있다. 2년 넘게 다니면서 맛있는 집이라고 분류하고 가까운 사람들을 데리고 다니기도 했지만, 기사로 소개하는 순서는 뒤로 밀렸다. 아귀찜이 겨울 음식인데 연재를 하면서 첫 겨울은 그냥 넘겼고, 두 번째 겨울을 맞으면서 이제야 찾아가는 이유는 내가 사는 동네에 있기 때문이다.
방송 여러 곳에서 찾아왔지만 거절했다는 말을 거듭하며 취재에 응할지 확답을 하지 않다가 하룻밤 지나고 전화를 하니 와도 좋다고 했다. 음식점 바쁜 시간을 피하려고 오후 1시로 약속을 하고 점심을 미루며 기다렸다가 찾아갔다. 탕을 주문해 식사를 하고 얘기를 나눴다.
밑국물 만들어 아귀 조리하는 과정·방법은 방송에 나온 것과 같은지 물었다. 홍씨는 2015년 6월 11일 케이블TV ‘OLIVE’ 채널 ‘신동엽·성시경은 오늘 뭐 먹지’ 제70화에 아귀 대가로 출연해 아귀찜 만드는 과정을 보여줬다. “대동소이하다. 거의 같다고 보면 된다”고 대답했다. 질문자로서는 ‘소이(小異)’와 ‘거의’라는 제한 표현에 관심이 갔다. 완전히 다 공개하지는 않았다는 뜻이겠다. 그게 뭔지 캐물으려는 기색을 보이자 “영업비밀을 다 알려고 하지 마라”고 말문을 막았다. 내가 주방에서 발견한 양념류는 고춧가루 2가지, 들깻가루, 다진 마늘, 전분(찹쌀가루를 섞어 쓴다고), 설탕, 소금, 후추, 기름, 흰 알갱이가 섞인 누런 색과 흰색의 2가지 인공조미료 등 11가지였다.
방송 내용을 살펴보면 아귀찜 만드는 방법은 이렇다. 수육·전골·탕·찜에 모두 들어가는 밑국물부터 준비한다. 무·대파·양파·솔치(청어 새끼)·된장·간장 넣고 15분 정도 끓인 다음 다시마 넣고 15분을 더 끓여 체로 거른다. 다시마는 오래 우리면 텁텁하고 쓴맛이 난다. 솔치는 멸치보다 덜 짜고 맛이 고소해 국물 내는 데 많이 사용한다.
손질한 아귀 얼음에 재우면 살 탱탱해져
다음엔 아귀를 손질한다. 아귀의 신선도는 내장을 보면 알 수 있다. 빛깔이 선명해야 한다. 아귀는 먹이를 닥치는 대로 엄청나게 먹기 때문에 내장의 내용물이 많고 복잡하다. 뒤집어서 깨끗이 세척해야 잡내가 나지 않는다. 손질과 세척이 끝난 아귀 살과 내장에 굵은 소금을 뿌려 간이 배도록 주무른 다음 얼음으로 덮어 30분간 보관한다. 얼음에 재우는 과정은 홍씨가 터득한 방법이라고 했다. 그러면 아귀 살에 탄력이 생기고 신선도가 오래 유지된다고 한다.
아귀 위는 따로 된장 한 큰술을 풀고 삶아서 찬물에 다시 깨끗이 헹군 다음 가위로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둔다. 불순물 없애고 잡내를 제거하는 과정이다. 준비해둔 살과 간을 찬물에 다시 헹궈 위와 함께 끓는 밑국물에 넣고 삶는다. 따로 준비한 오만둥이도 이때 넣는다. 고춧가루(한 주걱)와 매운 고춧가루(취향에 맞게 조절), 전분과 찹쌀가루(반 주걱 동량), 다진 마늘, 소금, 고추기름(각 한 큰술), 들깻가루(반 주걱)를 넣고 물을 부은 다음 저어 양념장을 만든다. 채소는 양파(반 잘라 채썰기)·대파(어슷썰기)·미나리(줄기만 6~7㎝ 길이로)를 준비한다.
준비하는 사이 국물이 졸아들고 아귀가 적당히 익으면 콩나물을 먼저 올리고 그 위에 다른 채소를 올린다. 채소가 숨이 죽으면 국물량을 살펴 보충하거나 덜어낸다. 그리고 준비한 양념장을 넣고 살이 부서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골고루 비빈다. 이 과정에서 이 집의 비법은 얼음과 들깻가루라고 한다.
자리에 앉아 실내를 둘러보면 방송 내용 중 주요장면 스틸 사진들을 모자이크로 편집하고 홍보 글을 써서 벽에 붙여놨다. 글이 재미있다. “홍박 아구찜은 매일 부산에서 경매를 통하여 올리는 국내산 최고급 생아구를 사용하고 아구찜에 사용되는 모든 재료도 국내산 좋은 재료만 사용하여 만드는 최고의 아구찜 맛집입니다. ※생 아귀가 없을 때만 휴무합니다.” 자신감이 웬만해서는 이렇게 써 붙이기 쉽지 않다.
간판의 ‘홍박’도 그의 자부심을 가득 담고 있다. “아귀에 관해서는 박사라고 자부한다. 아귀찜 집들 상호로 지명을 쓰는 경우가 많아 다르게 하고 싶었다. 지점을 내더라도 이름이 좀 달라야 손님들이 얼른 알아볼 거라고 생각했다. 아귀만큼은 대한민국 누구보다 잘 안다는 자신감에 내가 개발한 아귀 음식의 자부심을 얹어 지은 이름이다.”
아귀 요리, 부산서 10년…서울 올라와 5년
부산 해운대와 동래구청 옆에서 식당을 할 때는 10년간 ‘용궁아구찜’이라는 이름을 썼다. 2012년 서울로 옮기면서 ‘용궁아구찜’으로 상호등록 신청을 하니 이미 다른 사람이 해서 퇴짜맞았다. 처음 신촌에서는 ‘홍박 불 아구찜’으로 했다. ‘대한민국 최고 아구찜의 맛’이라는 수식을 앞세웠다. 2014년 공덕동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는 간결하게 ‘홍박아구찜’으로 바꿨다.
그는 의류 도매상이었다. 젊어서는 코오롱 그룹에서 수출 업무를 하다가 그만뒀다. 부산으로 귀향해 수출 의류 봉제단지에서 임자를 못 만난 제품들을 모아 서울 동대문시장과 이태원에 공급하는 보세의류 도매업을 했다. 사업이 한동안 잘됐지만 2000년 무렵 공장들이 일제히 중국으로 넘어갔다. 새로운 살길을 고민하다가 쓰던 사업장을 식당으로 바꾸기로 했다.
이전에 요리를 해본 적은 없다. 현재 음식점 홀을 담당하는 부인이 집에서 맛있는 걸 해주면 잘 먹는 정도였다. 대학 조리학과에 가려고 준비하던 아들 영향도 컸다. 졸업하면 함께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주 종목은 자신이 좋아하는 아귀로 정했다. 아내가 자주 해주고 맛있게 먹던 음식이다.
아들은 지금 아버지를 도와 부주방장으로 8년째 열심히 가업을 배우고 있다. 평소에는 전채로 나가는 호박전과 마무리 식사로 나가는 볶음밥을 담당하지만 아버지가 자리를 비우면 모든 음식을 다 할 수 있다고 한다. 아버지는 “내보다 더 잘하죠” 하면서 뿌듯한 표정이었다. 음식점 명함에는 이미 ‘대표 홍주완’이라고 새겨져 있다.
대학 조리학과 졸업한 아들 8년째 함께
2002년 부산 해운대에서 시작한 음식점은 초반 5년간 아주 힘들었다. 부산 사람들의 독특한 보수성 때문이라고 한다. 알려진 집을 다니는 사람들은 신생 음식점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음식을 더 잘해도 “쫌 하네” 하면서 다니던 집으로 간다. 그런 보수 기질 때문에 주류(主流)시장 진입이 쉽지 않았다. 부산엔 아귀찜으로 오래된 집도 많고 유명한 집도 많으니 경쟁이 심했다.
홍씨는 그 시절을 회상했다. “내가 도전정신이 강하다. 남들 하지 않는 것 과감하게 한다. 초창기에 고기 좋은 것 쓰려고 아귀잡이 어선이 많은 기장군 일광·이동, 서생면 신리 어항 선주들과 계약을 했다. 조업 연락이 오면 한 배가 잡은 걸 다 사버리는 거다. 그런 아귀찜 집이 없었다. 수족관을 만들어 살아있는 아귀를 100kg 정도 넣어두고 그걸로 음식을 했다. 아귀가 수족관에서 3일 지나면 대개 죽는다. 하루 이틀만 지나도 살이 뻣뻣해진다. 수족관은 6개월 만에 접었다. 활어를 잡아서 소금을 약간 친 다음 얼음 채워서 보관하면 신선도가 훨씬 더 잘 유지되는 걸 알아냈다. 그 상태로 하루 이틀 사이가 가장 맛있다.”
‘홍박아구찜’은 지금도 생아귀 고기를 그렇게 갈무리한다. 부산수협 다대포공판장에서 대개 이틀에 한 번 경매를 받는다. 현장에서 속을 갈라 내장을 손질해 분류하고 얼음 채워서 특송화물로 보낸다. 도착한 아귀 살은 다시 깨끗이 세척하고 소금을 뿌려 아이스박스에 넣어 얼음에 재워두고 필요한 만큼 꺼내 쓴다. 간·위·알집·창자 등 내장도 깨끗이 씻어 따로따로 냉장고에 보관한다.
아귀는 값이 비싸기도 하지만 손질 과정에 손실률도 높다. 일반 아귀찜 집에서 쓰는 냉동 아귀 중 미국산이 좋은 편인데 요즘 1㎏에 8000원쯤 한다. 홍씨가 쓰는 3㎏ 이상 국산 생물 아귀는 그보다 2~3배 줘야 살 수 있다. 3㎏ 아귀를 손질하면 실제 음식에 쓸 수 있는 것은 2㎏밖에 안 나온다. 아귀는 제일 빨리 상하는 물고기이기도 하다. 마구 잡아먹은 물고기가 소화 중단 상태로 배 속에 많이 들어있어서 그렇다.
"잘한다는 집 다 먹어봤지만 내가 으뜸"
부산에서 초창기 고전할 때도 유명하다는 집을 다니면서 먹어봤다. 먹을수록 자신이 하는 아귀 음식이 가장 맛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손님이 많지는 않았지만 먹어본 손님들은 맛있다고 극찬했다. 해운대에서 잠시 하다가 동래구청 옆으로 옮겼다. 동래 일대에서는 인정을 받았다. 동래구청 회식 단골집이 됐고 “동래구청 직원들이 인정하는 최고의 맛집”이라는 얘기도 들었다. 그래도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는데 호전의 계기가 생겼다.
목포MBC ‘어영차 바다야’라는 프로그램이 취재를 왔다. 부산에서도 알아주지 않는데 먼 목포에서 찾아와 놀랐다. 취재팀이 다녀간 후 블로거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처음 먹어보는 아귀찜 맛이다. 정말 맛있는데 왜 이렇게 외진 곳에 있느냐”고 놀라기도 하고 아쉬워하기도 했다. 서서히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는 게 느껴졌다. (※목포MBC 홈페이지에서 ‘어영차 바다야’ 폴더를 보니 2013년 1월 5일 첫 방송 후 지난 9월 3일까지 나간 288편의 VOD가 올라와 있는데 제목 리스트에서 ‘부산 동래 용궁아구찜’에 관한 것은 찾지 못했다. 구글에서 ‘동래 용궁아구찜’을 검색해보니 2012년 이전 블로그 포스팅이 몇 편 나오기는 하지만 많지는 않았다. 그 시절에는 기본 찬이 호박전 포함해 10~15찬이고 생선 미역국도 나왔다. 지금은 반찬이 많이 줄었다.)
2012년 신촌으로 옮겼다. 이화여대 미대에 다니던 딸이 서울생활에 외로움을 많이 타고, 걱정도 돼서 서울로 옮기기로 했다. 아귀 음식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이 정립되니까 경쟁이 심한 부산을 벗어나기도 하면서 큰 무대에서 실력을 펼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딸의 자취방 근처인 연세대 입구(대학약국 골목 안)에 자리를 잡았다. 6개월 정도 지나니 사람들이 알아주기 시작했다. 젊은 학생보다 교수들이 많이 왔다. 교수 따라왔던 대학원생들도 점차 찾아왔다. 좌석이 24석밖에 안돼 저녁에는 오는 손님을 다 받을 수 없었다. 주말에는 강남에서 차로 오는 손님도 많았는데 주차 공간도 없었다.
2014년 공덕동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이곳은 전제 231㎡(70평)에 좌석이 100석이다. 손님은 광화문에서 여의도 사이 넓은 지역에서 온다. 높은 사람도 많고 유명인도 많다. 지난 대선 직후 새 정부 구성이 한창일 때 내가 경력 25~30년 된 기자 3명을 안내해 이 집에 갔더니 현 정부에서 중용한 인사 3명이 아구수육을 먹고 있었다. 조용히 지나가려 했으나 눈이 마주쳐 인사하느라 부산을 떤 적이 있다. 기자 오래 하다 보니 이렇게 저렇게 인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인은 오불관언(吾不關焉; 나는 그 일에 상관하지 아니한다는 태도)이다.
"손님이 누구든 난 음식에 최선 다할 뿐”
“누가 오는지 잘 모른다. 어떤 분이 왔다고 나가서 인사하고 눈도장 찍고 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런다고 그분들이 돈 더 주고 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뭘 더 해주는 성격도 아니다. 음식으로 최선을 다하면 내 임무는 끝이다. 손님이 누구든 돈 내는 만큼 양심껏 충실하게 대접하면 되는 거다. 예약할 때 ‘어디 누구다’ 목청 높이고 끗발 자랑하는 사람은 더 모른 척한다. 나는 음식에 최선 다하고 손님은 그만큼 돈 내고 가는 거지 권력 있다고 대접하고 비위 맞추고 하는 건 내 철학과 맞지 않는다. 음식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겸손히 받아들이겠다. 누군가 점심에 좀 대중적인 메뉴를 하면 어떻겠냐고 했다. 생아구탕 한 가지만 하니까 못 오는 손님도 있다는 얘기다. 반대했다. 메뉴를 늘리면 손님이 조금 더 오겠지만 아귀 아닌 음식에 신경 쓸 틈이 없다. 나는 아귀에만 최선을 다하겠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안 한다.”
홍씨는 이런 철학과 자부심의 근거로 늘 연구·연마한 경험과 좋은 재료를 꼽았다. 모든 재료를 비싸도 시장에서 가장 좋은 것만 골라 쓴다고 한다. 고춧가루는 경북 봉화 농가에 계약재배를 해 1년에 600㎏(1000근) 이상 확보해두고 쓴다. 중국산이 한 근에 6000원인데 이 고춧가루는 2만원이다. 국물 내는 다시마도 부산 기장군 일광에서 좋은 것 받아 쓰고, 멸치 대신 솔치를 쓴다. 그는 “재료는 다른 집도 다 비슷하게 넣겠지만 좋은 걸 골라서 쓰는 게 다른 점”이라고 했다.
생물 아귀를 고집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아귀는 생물·선동(잡은 즉시 급랭)·냉동 세 가지가 있다. 내장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생물뿐이다. 냉동 아귀나 노량진수산시장 아귀를 써보려고 시도해봤지만 맛이 안 나와 다 버린 적도 있다. ‘홍박아구찜’이 아귀를 조달하는 다대포항은 아귀 전문 어선만 30척이 넘는 ‘아귀의 어항’이다. 당일 잡은 아귀만 거래하고, 어족자원 보호를 위해 어선당 하루 40㎏들이 15상자까지만 어획을 허용하는 자체 커트제를 운영하기도 한다.
정약전 "낚싯줄 물고기'…영어 이름도 같아
정약전(1758∼1816)이 흑산도에 유배 중이던 1814년 지은 『자산어보(玆山魚譜)』에 아귀는 ‘조사어(釣絲魚), 속명 아구어(餓口魚)’라는 이름으로 실려있다. “큰 것은 2척(60.6㎝) 정도이고 모양이 올챙이 같다. 머리 위에 두 개의 낚싯대와 낚싯줄이 있으며, 줄 끝에는 밥알 같은 미끼가 있다. 낚싯줄과 미끼를 놀려 물고기가 먹으려고 달려들면 잡아먹는다”고 했다. 이런 생태 습성 때문에 낚싯줄 물고기[釣絲魚]라고 이름을 올린 듯하다. 영어로 Anglerfish인데 이 또한 낚시꾼 물고기라는 뜻이다. 속명이 ‘아구어’라 했으니 200년 전 흑산도 사람들은 ‘아구(어)’라고 불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표준명은 ‘아귀’인데 찜·탕·수육 등 음식 이름에 들어갈 때는 ‘아구’로 쓰는 현상이 압도적이다. 원점에 마산이 있다. 아귀찜을 말하자면 ‘마산아구찜’이 한 단어의 관용어처럼 쓰인다. 지금은 전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아구찜’은 우리 음식 가운데 특이하게도 출생 내력이 선명하게 알려져 있다. 창안자와 시기·장소·유래담까지 아주 소상하다.
김영복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 원장의 설명(뉴스천지 ‘별미산책-아귀찜 이야기/2014. 12. 8~14)과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의 ‘아구찜’ 항목 내용을 소개한다.
《구전에 의하면 마산아구찜이 처음 만들어진 시기는 1964년이다. 오동동 요정골목에 간판도 없는 초가에서 장어국을 끓여 파는 선술집(마산시 동성동 186)이 있었다. 사람들은 ‘초가할매집’이라고 불렀다. 추운 겨울날 주인 혹부리 할매(턱밑에 혹이 있어 생긴 별칭/고 안소락선 할머니)에게 어부들이 마산어시장에서 아귀를 들고 와 안주로 해 달라고 했다. 할머니는 재수없다며 봉창(封窓) 밖으로 내던졌다. 얼마 후 봄날 할머니가 시장에 다녀오다 보니 처마 밑에 웬 마른 물고기가 있었다. 겨울에 버린 아귀였다. 그걸로 무와 된장 넣고 자작하게 찜을 만들어 어부들에게 안주로 내놓았다. 맛이 좋아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된장·고추장을 섞고 마늘·파 등을 넣어 만든 양념장을 꼬들꼬들하게 말린 아구에 발라 북어찜처럼 구워서 팔다가 삶은 콩나물을 곁들였다고 전하기도 한다.
처음 만든 사람·장소·연도 밝혀진 아구찜
뒤이어 마산시 동성동 51번지에서 장어국을 팔던 박영자(84) 할머니의 ‘진짜초가집원조(마산시 오동동 152-41)’, 옆 골목의 ‘구강할매집(마산시 오동동 185)’ 등이 몇 달 차이로 비슷한 음식을 팔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마른 아귀에 콩나물·미나리·미더덕을 넣고 찜을 하는 마산아구찜의 틀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아귀를 부산·경남에서는 ‘물꽁(곰)’이라 불렀다. 지역마다 아구·아꾸·망청어·물꿩·반성어·귀임이·꺽정이·망챙어 등 방언도 많다. ‘아구’는 『자산어보』에도 나오듯 흑산도를 비롯한 전라도 말이었다. 전남 신안에서 마산으로 시집온 박영자 할머니가 ‘아구찜’을 만들어 팔면서 ‘물꽁’이라는 토박이말을 밀어내고 ‘아구’가 주인 행세를 하게 된 것이다.》
다른 기록(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마산 어시장과 오동동, 창동의 명물 골목/2016)에서는 박 할머니의 증언이 약간 다르다. “1965년 내 나이 서른셋 때 아구탕 집을 열었어요. 고향인 부산에도 아구탕이 있었고, 이 근처 혹부리 할매 집도 아구탕을 했지예. 그땐 새벽 술손님이 많았는데 1965년인가 1966년인가 하루는 단골이 들어와서 오늘은 배가 부르다고 찜을 한 번 만들어 달라고 했지예. 대충 아구를 삶아서 콩나물에 고추장을 올렸더니 괜찮다 그러더라고. 그 뒤에도 몇 번 주문했고, 이 손님 저 손님 따라 하길래 아예 메뉴로 정했지.”
다시 김 원장의 설명으로 돌아가자. 《아귀를 전국에 알린 공로는 마산이 크지만 음식점에서 다룬 것은 부산이 먼저다. 한국전쟁 시기 부산은 피란민으로 북새통이었고, 먹거리는 부족해 이전에 먹지 않던 것도 새롭게 먹게 됐다. 1950년 중반 부산 서면 미군부대 옆 물탱크 근방 술도가 창고에서 할머니 두 분이 생아귀를 쪄서 양념장에 찍어 안주로 먹을 수 있도록 조리해 ‘물꽁찜’이라는 이름으로 팔았다. 이밖에도 서면과 충무동 일대에 ‘물꽁집’이 더 있었다.
마산아구찜을 전국에 알린 일등공신은 ‘혹부리 할매’의 며느리 김삼연(71) 여사다. 그는 1981년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국풍81’에 아구찜을 가지고 나가 마산에서 즐겨 먹던 아구찜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후에도 마산아구찜을 알리는 데 크게 헌신했다.》
'국풍81' 계기로 마산아구찜 전국 확산
‘국풍 81’은 신군부가 5·18 광주민주화운동 1주년을 맞아 민심이 광주로 쏠릴까 두려워 1981년 5월 28일부터 닷새 동안 벌인 ‘억지 춘향’ 관제 문화축제였다. 부속행사로 팔도풍물장터도 열렸다. 허문도(1940~2016)씨가 기획하고 신문·방송을 총동원해 홍보했다. 이때 전국의 향토 별미들이 많이 발굴, 소개됐다. 당시 대학 4학년이던 나도 마산이 외가인 친구와 그곳에 가서 시대의 우울을 곱씹으며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고 온 기억이 있다. 마산아구찜, 충무김밥, 동래산성막걸리를 거기서 처음 만났다. 이후 마산아구찜은 전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아귀찜 유래에 대한 이설(異說)도 있다. 이번에 처음 들은 얘기지만 현지에 살았던 사람의 증언이고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해 개연성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 기록을 남긴다. 내가 근무하는 회사의 송모(53) 기자는 마산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본적지가 마산항 제1부두 이웃 적산가옥이 밀집했던 마산합포구 중앙동 1가다. 옛 마산화력발전소와 1㎞ 정도 떨어진 곳이다. 마산에서 평생을 산 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아구 얘기를 들었다.
현재는 마산 남부시외터미널과 롯데마트 마산점이 들어선 해운동에는 화력발전소가 있었다. 1954년 10월 15일 착공하고 56년 4월 15일 준공해 82년 12월 31일까지 가동했다. 발전소가 생기자 바로 앞바다의 냉각수 배출구 쪽으로 아귀가 몰려왔다고 한다. 사람들은 발전소에서 내보내는 물에 잔열(殘熱)이 있어 따뜻하니까 아열대성 물고기인 아귀가 몰려드는 것으로 생각했다. 동네 사람들은 아귀를 줍다시피 했다. 아이들도 뜰채만 가지고 나가면 어렵지 않게 건져 올릴 정도로 아귀가 많았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아귀를 즐겨 먹지 않았다.
'발전소 주변 실향민 음식이 원조' 의견도
발전소에서 1㎞ 남짓 남쪽인 창원시 마산합포구 월영동과 가포동 사이, 가포 부영아파트쯤에 한국전쟁 시기에 제7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1980년대까지도 사람들은 그곳을 수용소마을로 불렀다. 휴전회담 막바지이던 1953년 6월 18일 이승만은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단독으로 전국의 포로수용소에 갇혀있던 북한군 포로들을 탈출시켰다. 북한으로 가기 싫다는 반공포로까지 북송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각오 아래 단행한 이른바 ‘반공포로 석방’이었다. 이때 마산수용소에는 포로 3825명이 수용돼 있었는데 18일 0시를 기해 탈출시킨다는 작전명령에 따라 변전소 장애를 빙자해 마산 전역에 송전을 차단했다. 수용소를 지키던 국군 헌병들은 철조망을 잘라 탈출구를 마련해줬다. 2936명이 탈출하고, 144명은 탈출 후 다시 잡혔다. 탈출하다가 3명은 사망하고, 11명은 다쳤으면 731명은 탈출하지 못했다. (※경향신문 1973년 7월 26일자 4면 송효순의 ‘6·25동란과 포로 석방 비화-25 마산수용소 필사 탈출’ 참조).
탈출한 포로들 상당수가 수용소에서 멀지 않은 마산항 부두 주변에 삶의 터를 잡았다. 그 가운데로 작은 산 같은 석탄 더미를 마당에 쌓아둔 마산화력발전소가 들어앉았다. 연료는 중유만 써도 되고 무연탄 90%에 중유 10%를 섞어 쓸 수도 있도록 설계한 발전소였다. 사고무친(四顧無親)으로 남쪽에 남게 된 석방 포로들의 생활은 곤궁했다. 발전소가 가동을 시작한 1956년 무렵 그들에게는 아귀도 쓸만한 먹거리였다. 아귀를 그때는 주로 탕으로 끓여 먹었지만 조려서 먹기도 했다. 오늘날의 아귀찜 같은 형식은 아니라도, 최소한 간을 맞추고 맛도 살려줄 양념을 고민했을 터이다. 없는 살림에 그래 봐야 된장·간장에 고추장 아니면 고춧가루였을 것이다. 미군이 버린 빈 깡통을 두드려 만든 그릇을 이용했다. 흔한 아귀를 수용소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많이 해 먹었다. 음식점에서 팔지는 않았지만, 1950년대 후반부터 집에서 그렇게 해 먹은 게 마산아구찜의 원형이라고 믿는 현지인들이 많다고 한다. 송 기자는, 오동동 ‘초가집 혹부리 할매’가 마산아구찜을 창안했다는 통설을 현지인들은 외려 생소하게 여긴다고 했다. 발전소가 있던 자리에서 아귀찜의 발상지로 알려진 오동동 아귀찜거리는 3.5㎞ 상간이다.
어떤 설을 따르든 아귀찜은 밑바닥 삶이 꽃피운 한 떨기 야생화 같은 ‘별미’다. 아귀는 추워질수록 살이 오르고 맛이 드는 겨울 물고기다. 날이 추워진다. 쟁반처럼 큰 접시 가득, 푸짐하게 나오는 아귀찜에 소주 한잔 곁들이며 지친 삶의 야생성을 회복해보자. 적당한 반주는 하느님도 장려한다고 하지 않는가. 적반! 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