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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줄 없이 은행장 뽑아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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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보수 정부 9년의 공과(功過) 중 금융은 대표적인 과 쪽이다. 이명박 정부는 금융을 전리품처럼 취급했다. 곳곳에 낙하산을 보냈다. MB는 자신과 이런저런 연을 맺은 이른바 ‘4대 천왕’을 4대 금융지주 회장에 앉혔다. ‘흉보면서 닮는다’더니 박근혜 정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과는 불문가지. MB는 한국 금융을 20년 후퇴시켰다는 혹평을 받았다. 박근혜 정부는 한국 금융을 우간다와 동렬에 올려놓았다. 이렇게 망가진 한국 금융의 산 증거가 하나 있다. 우리은행이다.

우리은행장 선임이 #금융적폐 청산 시작돼야

“인사철이면 자리에 있는 임원이 없다. 정치권에 줄 대러 나가는 것이다. L 수석부행장은 아침부터 자리를 비우기 일쑤였다. 임원치고 연줄 없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 일이 제대로 되겠나. 그런 일이 20년 동안 반복됐다.”(우리은행 J 본부장)

그 20년 동안 우리은행은 대형 금융사고의 단골 진원지였다. 저축은행 부도사태를 부른 PF(프로젝트 파이낸싱), 삼성·CJ의 차명계좌, 대통령 친인척 특혜까지. 이번에 터진 채용 비리도 20년 낙하산 인사의 연장선에 있다. 망하지 않은 게 사실은 기적이다.

다른 은행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우리은행의 대손충당금이 단적인 예다. 대손충당금은 은행이 빌려준 돈을 떼일 것에 대비해 쌓아 놓는 돈이다. 이명박 정부 첫해인 2008년엔 1조9000억원이었다. 2009년엔 2조5000억원, 2010년 2조9000억원, 2011년 2조5000억원, 2012년 2조3000억원이었다. 다른 은행보다 한 해 평균 1조원씩을 더 쌓았다(신한은행은 2008년 9377억원, 2009년 1조2669억원, 2010년 1조29억원, 2011년 6456억원, 2012년 8177억원이었다).

그만큼 부실 대출이 많았다는 얘기다. 부실 대출의 이유를 딱 하나만 꼽으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정경 유착이다. 낙하산 CEO들은 부실기업과 짝짜꿍한 정치권의 청탁과 압력을 쉽게 내치지 못했다. 직원들도 덩달아 도덕적 해이의 늪에 빠져들었다. 부실이 안 커지고 사고가 안 나면 그게 비정상일 것이다. 오죽하면 “낙하산이 얼마나 금융을 망가뜨리는지 보고 싶다면 우리은행을 보면 된다”는 말까지 나왔겠나.

이런 악순환을 끊으려고 민영화가 추진됐다. 역대 정부 모두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헐값 매각 논란과 인수자를 찾지 못해서다. 간신히 지난 정부가 민영화의 단추를 뀄다. 7개 과점 주주에게 정부 지분 29.7%를 파는 데 성공했다. 무엇보다 정부가 경영에 완전히 손을 떼겠다고 약속한 게 통했다.

그 약속을 믿고 올 1월 5개 과점 주주가 선임한 이사들이 모여 신임 행장을 뽑았다. ① 내부 출신 ② 정부 개입 배제가 원칙이었고, 원칙은 지켜졌다. 그렇게 뽑힌 이광구 행장이 얼마 전 채용 비리에 얽혀 물러났다. 오비이락, 낙하산 트라우마가 다시 불거졌다. 그럴 만했다. 정부가 먼저 오해 살 짓을 했다. 후임 행장에 대해 ① 내부 출신은 안 된다 ②정부의 대주주 권한을 행사하겠다고 나섰다.

그래선 안 된다.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주가가 떨어지고 민영화가 늦춰진다. 지난 7월 1만9650원까지 올랐던 우리은행 주가는 정부 개입 논란이 불거지면서 하락해 15일엔 1만6300원까지 떨어졌다. 1만4200원 밑이면 들어간 공적자금 원금도 건질 수 없다. 남은 정부 지분(18.52%)을 팔기 어려워진다. 둘째, 과점 주주를 포함한 외국인 투자자의 신뢰를 잃게 된다. 셋째, 한국 금융이 영원히 우간다 수준에 머물게 될 것이다.

이명박근혜 땐 더했다는 말은 이제 그만 하자. 고작 지난 정부와 비교하려고 정권을 잡았나. 지난 정부만큼 하는 게 목표가 아니라면, 이 정부가 할 일은 딱 하나다. 그냥 지켜보는 것이다. 그래야 금융인들의 고질적인 정치권 줄 대기도 끝낼 수 있다. 그게 진짜 적폐청산이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