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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열사 지원으로 손해나도 합리적 판단이면 배임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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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우량 계열사를 동원해 부실 계열사를 지원한 기업집단 총수의 결정은 회사에 손해를 끼친 죄(업무상 배임)인가, 경영상 판단인가. 법조계와 재계의 시각 차가 계속돼 온 배임죄 판단에 대한 구체적 기준을 제시한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2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지난 9일 이낙영(56) SPP그룹 회장에게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업무상 배임) 등의 혐의 등으로 징역 2년6월의 실형을 선고한 원심을 일부 무죄 취지로 파기했다고 15일 밝혔다. 이 사건은 부산고법으로 돌아갔다.

대법, 그룹 총수 배임죄 기준 첫 제시 #“특정회사·특정인 사익 추구 아니면 #재량권 내 결정은 고의 인정 어려워” #이낙영 SPP회장에 일부 무죄 판단

계열사 부당 지원 배임혐의에 대한 대법원 판단 변화

계열사 부당 지원 배임혐의에 대한 대법원 판단 변화

대법원은 이 판결에서 “그룹 내 계열사 사이의 지원 행위가 계열사들의 공동이익을 위한 것으로, 특정 회사나 특정인의 사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합리적인 경영 판단의 재량 범위 내에서 행해졌다면 배임의 고의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제시했다. 그러면서 대법원은 고의성을 판단하는 기준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지원을 주고받은 계열회사들이 실질적으로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관계에 있는지 ▶지원 결정이 특정인이나 특정 회사가 아닌 공동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지원한 계열사의 능력과 의사를 충분히 고려해 객관적·합리적으로 결정했는지 ▶구체적인 지원이 정상적·합법적인 방법으로 이뤄졌는지 ▶지원하는 계열사가 부담이나 위험에 상응하는 보상을 기대할 수 있었는지 등이다.

이런 기준에 따라 대법원은 이 회장의 일부 혐의를 무죄로 판단했다. 회사 회생을 위해 자율협약을 맺고 있는 채권단의 승인 없이 계열사끼리 자금을 대여하도록 하고, 여러 계열사가 모기업인 SPP조선을 통해 원자재를 통합 구매하도록 하는 등 현물거래를 하게 한 혐의다. 다만 검찰이 적용한 12개 혐의 중 횡령 등 다른 혐의는 유죄로 판단했다.

업무상 배임죄는 형법상 법정형이 ‘5년 이하의 징역, 1500만원 이하의 벌금’이지만 배임액수가 5억원이 넘으면 가중처벌(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된다. 그 액수가 50억원 이상이면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이 법정형이다. 많은 재벌 총수가 이 법을 두려워한 이유다.

그동안 재계 등에서는 배임 행위에 대한 대법원의 정의가 추상적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법률이나 계약, 신의칙상 당연히 할 것으로 기대되는 행위를 하지 않거나, 당연히 하지 않아야 할 행위를 해서 회사와의 신임 관계를 저버리는 일체의 행위’를 배임으로 정의해 왔다. 유사한 계열사 간 지원 행위를 배임의 고의성이 없는 경영상 판단으로 보는 기준이 일관되지 않다는 비판도 있었다. “단순히 경영상 판단이라는 이유만으로 배임죄의 죄책을 면할 수 없다”고 보는가 하면 “경영자가 기업의 이익을 위한다는 생각으로 신중하게 결정을 내렸다고 하더라도 그 예측이 빗나가 기업에 손해가 발생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이러한 경우까지 형사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고 판단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번 판결에 대해 강동욱 동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대법원은 그동안 경영적 판단을 정상참작의 요소 정도로 여겼을 뿐 정상적인 기업 활동으로 인정하는 데 인색했다”며 “기업의 경영 행위에 대해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 획기적 판결이다”고 평가했다.

궁극적으론 입법적 해결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여전히 높다. 독일의 경우 회사법에 경영판단 원칙에 대해선 면책하도록 규정하고 있고, 우리나라 법체계와 유사한 일본은 ‘손해를 가할 목적’을 배임죄의 성립 요건으로 명문화해 엄격한 입증을 요구하는 추세다. 부장판사 출신인 황정근 변호사는 “경제주체들에게 정확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경제활동의 예측 가능성을 확보해 주는 데 사법의 본령이 있다”며 “경영 판단의 원칙과 배임죄의 관계에 대해 외국의 사례를 면밀히 검토해 엄격한 기준을 설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길용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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