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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의 250년 된 고택이 일으킨 놀라운 나비효과

중앙일보

입력

전북 완주의 복합문화공간 삼례문화예술촌. 일제강점기 양곡 창고를 문화예술촌으로 재정비했다. [사진 완주군]

전북 완주의 복합문화공간 삼례문화예술촌. 일제강점기 양곡 창고를 문화예술촌으로 재정비했다. [사진 완주군]

오래된 것을 무턱대고 허물고 부수는 ‘재개발’적 발상은 이젠 낡은 개념이다. 요즘은 낡은 것이 멋스럽다. 옛 공간을 허무는 대신 현대적으로 부활하는 도시재생(Urban Regeneration)이 대안으로 등장하면서다. 화력발전소 자리에 들어선 현대미술관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 등이 도시재생의 모범 사례로 거론된다. 도시재생의 현주소를 볼 수 있는 여행지는 국내에도 많다. 대표적인 게 2013년 일찌감치 도시재생에 뛰어든 전북 완주다. 일제강점기 양곡 창고를 복합문화공간으로 가꿨고, 250년 된 고택을 중심으로 카페와 갤러리가 들어선 작은 마을을 조성했다. 덕분에 평범한 농촌 마을이었던 완주는 젊은 여행자가 찾아오는 ‘힙’한 여행지로 거듭났다. 11월 둘째 주 도시재생의 선두주자 완주를 찾아 재생의 현장을 둘러봤다.

쌀 대신 문화 채우는 양곡 창고

삼례문화예술촌을 드론으로 촬영한 사진. 1만㎡의 널찍한 부지에 들어선 창고건물은 현재 갤러리, 목공방 등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중앙포토]

삼례문화예술촌을 드론으로 촬영한 사진. 1만㎡의 널찍한 부지에 들어선 창고건물은 현재 갤러리, 목공방 등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중앙포토]

전북 완주는 전형적인 농경 지대다. 서울에서 차로 3시간 만에 완주에 다다르자 너른 논밭이 드러났다. 완주에서 발원한 만경강 주변으로 펼쳐진 만경평야·김제평야는 우리나라 주요 곡창지대로 꼽힌다. 일제는 식민지 시절 완주를 수탈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완주에서도 수탈의 거점이었던 곳이 삼례읍이다. 일제는 전라선 철도를 깔고 1914년 삼례역을 개통했다. 삼례역 코 옆에는 양곡 창고를 지었다. 1만㎡ 부지에 들어선 6개 창고에 전라도에서 수탈한 미곡을 집결하고 군산항을 통해 반출했다.
양곡 창고는 해방 이후 삼례농협으로 소유권이 넘어갔고, 여전히 비료와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로 활용됐다. 하지만 저장 기술이 발달하고 쌀 수확량이 급감하면서 아픈 역사를 간직한 양곡 창고는 2010년부터 제 기능을 잃고 방치됐다. 지역 흉물을 처리해 달라는 민원을 접수한 완주군이 2013년 부지와 창고건물을 매입했다.

농협 마크가 새겨져 있는 삼례예술촌 외벽과 문. 서울 성수동 못지않은 분위기다.

농협 마크가 새겨져 있는 삼례예술촌 외벽과 문. 서울 성수동 못지않은 분위기다.

여기서부터 반전. 완주군은 창고를 허물고 신식 건물을 세우는 대신 옛 건물을 그대로 유지하는 별난 선택을 했다. 7명 예술가를 초빙해 창고건물을 개조해줄 것을 의뢰했고, 이들은 ‘삼삼예예미미협동조합’을 결성해 오래된 창고를 문화공간으로 가꿨다. 이것이 양곡 창고 자리에 2013년 6월 삼례문화예술촌이 개관하게 된 스토리다. 완주군 문화관광과 김미경 계장 말처럼 “‘도시재생’이라는 개념이 유행하기도 전에 양곡 창고를 문화공간으로 개조하기로 한 것은 드라마틱한 결정”이었다. 1세기의 역사를 가진 양곡 창고는 그렇게 살아남았고, 지금도 벽과 지붕이 본 모습 그대로 보존됐다.

삼례문화예술촌 책공방. 활판 인쇄 체험을 할 수 있다. [중앙포토]

삼례문화예술촌 책공방. 활판 인쇄 체험을 할 수 있다. [중앙포토]

텅 빈 창고의 내부는 문화 콘텐트로 채웠다. 농협 마크를 떡하니 달고 있는 창고는 각각 갤러리·카페·목공방 등으로 변신해 놀이터로 쓰인다. 겉에서 보면 쓰러져가는 낡은 건물인데 내부는 근사한 미디어 아트 전시장이나 활판 인쇄 체험장으로 꾸며져 있어 독특했다. 여행자는 7개의 창고건물을 누비며 카페에서 핸드드립을 배우거나 도마 만들기 등 간단한 목공품을 만들 수 있다.
“삼례문화예술촌이 문화예술시설을 접할 기회가 없는 군민을 위한 시설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완주에 여행객을 끌어들이는 효과까지 거두고 있다”는 김 계장의 자랑은 사실이었다. 20~30대 여행자가 거리를 활보하는 삼례는 여느 도시와 같은 젊은 활력이 느껴졌다. 덕분에 주변 카페와 음식점도 북적였다. 해마다 완주 인구(10만 명)의 절반에 가까운 여행자가 삼례문화예술촌을 방문한다. 삼례문화예술촌은 ‘개발’만이 우리 삶의 공간을 살리는 방법의 전부는 아니라는 방증인 듯했다.

250년 된 한옥이 불러온 나비효과

전북 완주 오성마을에 있는 한옥체험관 아원. 사진에서 가운데 건물이 경남 진주에서 이축해 온 고택이다.

전북 완주 오성마을에 있는 한옥체험관 아원. 사진에서 가운데 건물이 경남 진주에서 이축해 온 고택이다.

삼례문화예술촌이 관이 주도한 도시재생이라면 소양면 오성마을은 민간이 먼저 움직인 완주의 도시재생 사례로 볼 수 있다. 소백산맥 끝자락 종남산(663m) 골짜기에 조성된 오성마을은 원래 농업용수를 저장해 놓은 오성저수지 주변에 농가 몇 채만 덩그러니 있는 심심한 마을이었다. 전북 전주에서 건축사무소를 운영하던 전해갑씨는 30여 년 전 우연히 아침저녁 저수지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오성마을에 닿았다. 자연 풍경을 고스란히 즐길 수 있는 문화 시설은 ‘한옥’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2002년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던 마을 땅을 사들였다. 그러고는 경남 진주에서 발견한 250년 된 한옥을 오성마을에 고스란히 이축했다. 전씨는 “전통건축 장인의 힘을 빌려 안채와 사랑채를 옮기고 정비하는 데 6년이 걸릴 만큼 대공사였다”고 회상했다.

아원에 딸린 갤러리 아원뮤지엄.

아원에 딸린 갤러리 아원뮤지엄.

전씨의 개인 공간으로 쓰이던 고택은 드라마나 CF 촬영장소로 종종 활용됐다. 전씨는 아예 고택 앞마당에 JTBC 드라마 ‘발효가족(2011년 작)’ 세트장으로 쓸 현대식 한옥을 새로 지었다. 아무것도 없던 나대지에 한옥 건물이 쑥쑥 들어서자 완주군은 2013년 오성마을을 한옥마을로 육성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25만3783㎡ 부지를 한옥관광자원화사업지구로 지정하고 한옥을 신축하면 3000만원의 보조금을 지원했다. 전씨는 고택과 현대식 한옥을 묶어 ‘아원’이라는 이름의 한옥체험장을 2015년 개장했다. 현재 오성마을에는 아원을 포함해 모두 7채의 한옥숙박시설이 들어서 있다.
완주군청에서 차로 30분 떨어진 오성마을에 닿기 전에는 ‘과연 이런 벽촌까지 사람들이 찾아올까’라는 의구심이 컸다. 단풍으로 울긋불긋한 종남산을 마주 보는 언덕배기에 조성된 오성마을은 젊은 여행자가 일부러 찾아오게 할 만큼 고풍스럽고 세련된 모습이었다. 한옥이 언덕을 따라 옹기종기 어깨를 잇대고 있고, 마을 곳곳에 갤러리·카페·음식점이 들어선 것이 ‘완주의 한옥마을’이라 불러도 손색없어 보였다. 전주한옥마을이 인증샷을 찍는 젊은 여행자로 북적이고 부산한 여행지라면, 오성마을은 가족여행자가 한옥과 어우러진 풍경을 보며 제대로 쉬어갈 수 있는 여행지였다.

배우 송강호가 대본 리딩을 위해 묵어 간 아원의 별채 건물 안과 밖.

배우 송강호가 대본 리딩을 위해 묵어 간 아원의 별채 건물 안과 밖.

아원의 카페에 들러 오미자차를 주문했다. 카페를 이용하는 손님은 꼭 숙박하지 않아도 정오부터 오후 4시까지 한옥 구석구석을 둘러볼 수 있다. 고택과 신식 한옥도 멋스러웠지만 한옥 건물 사이에 지어진 현대식 노출 콘크리트 건물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배우 송강호가 영화 ‘사도’를 촬영하기 전 이곳에 한 달간 머물며 대본 리딩을 했단다. 창문의 높이가 낮아 바닥에 앉아야 창밖의 한옥의 처마며, 종남산의 능선이 드러났다. 아원 정원에서는 오성마을 전체를 굽어봤다. 문화와 예술의 힘이 지속 가능한 농촌의 미래를 여는 키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도시재생 선발주자 전북 완주 시골마을 #성수동 부럽지않은 분위기로 손님 끌어 #일제 양곡창고였던 삼례문화예술촌에 #250년 고택 있는 한옥촌 오성마을까지

◇여행정보=전북 완주 삼례문화예술촌은 기차로도 쉽게 갈 수 있다. 용산역에서 전주역까지 KTX를 타고 이동한 뒤 전주역에서 전라선으로 환승해 삼례역에 내리면 된다. 삼례역에서 삼례문화예술촌까지 걸어서 5분 거리다. 입장권 2000원. 전화로 예약하면 문화해설사가 무료로 안내해준다. 070-8915-8121. 오성마을은 자가용이 없으면 접근이 쉽지 않다. 네비게이션에 오성한옥마을 혹은 아원고택으로 입력하고 찾아가면 된다. 전주한옥마을에서 차로 30분 거리다. 한옥체험관 아원은 숙박이 가능하다. 1박 27만원부터. 조식 포함. 아원 1층의 카페만 이용해도 된다. 오미자차 1만원.

완주=글·사진 양보라 기자 bor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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