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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짜 맞추는 사회적 대화가 시장에서 통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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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김기찬
김기찬 기자 중앙일보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 논설위원 고용노동선임기자

김기찬 논설위원 고용노동선임기자

참 희한하고 어이없다. 정부가 9일 내놓은 ‘일자리 안정자금 시행계획’이라는 예산안 얘기다. 말 그대로 사망선고를 받을 처지에 놓인 일자리를 연명 치료하는 데 투입할 돈이다. 사업주에게 “일자리를 유지해 달라”고 정부가 대놓고 대는 뒷돈이다. 시장 논리로 보면 부정하다고 볼 수도 있는 돈이고, 정책으로 따지면 최저임금을 너무 많이 올렸다는 걸 자인하는 꼴이다. 최저임금을 확 올릴 때는 언제고, 이젠 국민 호주머니를 털어 일자리를 지키려 안간힘을 쓰는 게 안쓰럽다. 시장이 입을 상처를 국가 예산으로 땜질할 정도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이 정도면 정책의 모럴 해저드라 할 만하다.

정부의 독점적 직권 남용 심각 … 정책 모럴해저드 불러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해야 사회적 대화와 타협도 가능

그렇다면 밀어붙이는 데 따른 부작용을 정부가 몰랐을까? 그럴 리 없다. 최저임금 협상 과정에서 정부가 경영계를 상대로 “오른 만큼 돈을 대줄게”라고 꼬드겼으니 말이다. “정책이념이 개입되지 않았다면 이런 사태까지 오진 않았을 것”이라는 어느 학자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시장에 정치가 개입되면서 틀어졌다는 얘기다. 이게 ‘하명 정책’의 위험성이다. 순리대로 했다면 시장에 미칠 영향을 분석하고, 그에 따라 치열하게 토론하면서 서로의 입장을 좁혀갔을 거다. 적정한 인상 수준 도출도 기대해볼 만했다. 사회적 대화와 타협은 그런 거다. 비판하고 수용하면서 토론하는 과정이 없으면 사회적 타협은 기대하기 힘들다. 하명을 받들어 짜 맞춘 대로 일방통행한다면 사회적 대화 파트너는 들러리일 뿐이다.

그래서일까.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재벌을 혼낼 대상으로 봤다. 한국경영자총협회를 제 역할 못하는 단체로 깎아내렸다. 그의 발언은 경총 해체론으로 해석되기까지 했다. 발언의 진의가 진짜 그렇다면 결사의 자유를 무시하는 위험한 초헌법적 발상이다. 경제단체의 역할이 뭔가. 기업의 입장을 대변하는 거다. 혼내야 하는 대상을 대변하다 큰 코 다칠 수 있다고 눈을 부릅뜨는데, 어떻게 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대화 자체를 내 뜻대로 제어하겠다는 발상과 다를 바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사회적 대화와 대타협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한데 국무위원의 생각이 이렇다면 허심탄회한 대화가 불가능하다. 사회적 대화는 상대를 존중하고 대접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려면 정부 스스로 균형감을 잃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요즘 정부에는 툭하면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수식어가 붙는다. 실제로 정부의 각종 위원회에선 이념 쏠림 현상을 의심할 만한 움직임이 감지된다. 각 부처의 적폐청산위원회나 각종 정책자문위원회 등에서다. 심지어 여러 개의 위원장 직함을 현 정부 출범 뒤 꿰찬 학자도 있다. 이러다 보니 어느 원로 학자는 “우르르 몰려다니는 문화혁명을 보는 것 같다”는 혹평을 하기도 했다. 그는 “요즘 위원회는 토론이 가능한 위원회가 아니다. 이념의 딱지를 붙이는 딱지 위원회”라고도 했다.

공공기관이라고 다르지 않다. 채용비리를 뿌리 뽑겠다면서 공공기관장 내리꽂기는 멈출 줄 모른다. 능력이나 전문성은 상관없다. 거저 줄 잘 선 게 능력으로 둔갑한다. 정부의 뒷배를 타고 연줄형 비리 대열에서도 제외된다.

이쯤 되면 정부의 독점 남용은 심각한 수준이다. 입맛에 맞는 사람이 정책 조언을 하고, 그걸 따른다면 이미 결과는 정해진 셈이다. 다른 의견을 내고 논리를 설파해봐야 먹히지 않을 게 뻔하다. 오히려 꾸중을 듣고 적폐 딱지가 붙기 십상이다. 국책연구기관의 한 연구위원은 이렇게 말했다. “대화 파트너를 윽박지르고 아예 정책 범주에서 떼는 걸 보면 정상적인 사회적 대화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 아니냐. 역설적으로 견제받지 않는 정부의 독점적 직권남용이 코포라티즘(합의주의) 배격 선언은 아닐까”라고.

조만간 사회적 대화판은 만들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미 짜 맞춰진 상태라면? 시장은 또 상처를 입고 휘청거릴지 모른다. 그땐 또 어떤 연명치료책이 나올까. 지친 가을 하늘이 너무 푸르다.

김기찬 논설위원·고용노동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