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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논설위원이 간다

7개국 디자이너, 격론 후 차 색 결정…지구촌 두뇌 다 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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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논설위원이 간다 - 남정호의 '세계화 2.0'

9일 화성 현대기아차 남양연구소에서 보제나 랄로바 제네시스컬러팀장이 화상회의로 서울 본사 직원들과 신형차에 들어갈 시트 색 등을 논의하고 있다.

9일 화성 현대기아차 남양연구소에서 보제나 랄로바 제네시스컬러팀장이 화상회의로 서울 본사 직원들과 신형차에 들어갈 시트 색 등을 논의하고 있다.

지구촌의 작동 원리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이젠 세계를 하나의 공동체로 보고 움직이지 않으면 도태되는 세상이 됐다. 글로벌 시장을 염두에 두고 제품을 만들어 파는 건 물론이고 아이디어와 기술조차 전 세계에서 빨아들여야 한다. 이와 관련해 세계에서 손꼽히는 자문회사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지난 4월부터 '신(新) 세계화(New Globalization) 전략' 보고서를 내고 있다. '4차 산업혁명'과 혁명적인 디지털 기술로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는 게 BCG의 진단이다. 저렴해진 항공료 등의 덕에 폭발적으로 늘어난 국가 간 인적 이동도 세상을 바꾸는 기폭제다. 이 때문에 과거엔 상관없던 지구 반대편 일이 이젠 내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게 현실이다. 우리 곁에서 벌어지는 신 세계화의 현장을 시리즈로 다뤄본다.

현대차그룹 남양연구소 #세계를 하나의 공동체로 봐야 #전례 없는 ‘신세계화’ 시대 개막 #각 지역 취향 종합해 차 생산 #어디에도 통하는 월드카 위해 #현대차, 이스라엘 스타트업 투자 #삼성도 국제포럼으로 지식 찾아

독특한 외관이 인상적인 현대기아차 남양연구소 디자인센터

독특한 외관이 인상적인 현대기아차 남양연구소 디자인센터

지난 9일 현대차그룹의 두뇌인 경기도 화성 남양연구소. 여의도의 1.2배(3.5㎢)만 한 이 연구소의 심장부에는 짙은 유리 벽에 독특한 외양이 인상적인 디자인센터가 자리 잡고 있다. 이날 이 건물 2층 화상회의실에선 불가리아 출신의 보제나 랄로바 제네시스컬러팀장이 서울 본사 동료들과 시트에 어떤 색을 쓸지 진지하게 토론하고 있었다. 독일 슈투트가르트대에서 색채학을 전공한 랄로바 팀장은 메르세데스-벤츠에서 9년간 일하다 스카우트돼 온 컬러 전문가다. 승용차에 사용되는 색은 차체 컬러부터 시작해 범퍼·시트·핸들·방향지시등 등 20여종에 달한다. 신형 차의 컨셉에 맞으면서도 모든 부품이 잘 어울리도록 각각의 색깔을 결정하는 게 그의 일이다.

메르세데스-벤츠에서 스카웃된 현대기아차 남양연구소 디자인센터 보제나 랄로바 제네시스컬러팀장.

메르세데스-벤츠에서 스카웃된 현대기아차 남양연구소 디자인센터 보제나 랄로바 제네시스컬러팀장.

하지만 그는 이 일을 혼자 결정하지 않는다. 이 회사가 미국(어바인)·독일(뤼셀스하임)·중국(연타이)에 세운 3개의 해외 디자인 센터 동료들과 상의하며 색깔을 고른다. 이들은 인터넷은 물론 화상회의를 통해 의견을 나눈다. 치열한 격론도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해외의 다른 디자이너들도 랄로바 팀장 못지않게 다양한 배경을 갖고 있다. 어바인 센터엔 미국인 외에 멕시코 출신이, 뤼셀스하임에는 독일인과 헝가리인이 섞여 있다. 연타이 센터만 모두 중국 출신이다. 결국 화성에서 일하는 불가리아 출신 팀장 지휘 아래, 한국·미국·독일·중국·헝가리·멕시코 등 7개국 디자이너들이 신형 차의 차체와 부품 색깔 하나하나를 깊숙한 토론 끝에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제품 하나를 만들기 위해 지구촌 구석구석의 인재들이 동시에 가동되는 '신 세계화'의 현장이다.

색상 선택조차 이처럼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 건 무엇 때문일까. 주병철 디자인실장은 "전 세계에서 통하는 제품이 되려면 각 지역의 취향을 한꺼번에 고려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디자이너들의 의견을 듣고 반영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전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단일 월드카를 만들기 위해 채택된 방식은 네 지역별로 기획안을 내게 한 뒤 이들을 경쟁에 부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최종안이 결정되면 이 안을 놓고 각 지역 디자이너들이 개선점을 제안하도록 한 후 계속 고쳐나간다. "그래야 특정 지역의 취향에 편중돼 글로벌 시장에서 실패하는 일이 없다"는 게 주 실장의 지적이다.

지난 9월 현대기아차 남양연구소 디자인센터 보제나 랄로바 제네시스컬러팀장이 새로 출시된 제네시스 G70의 외양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지난 9월 현대기아차 남양연구소 디자인센터 보제나 랄로바 제네시스컬러팀장이 새로 출시된 제네시스 G70의 외양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최근에 출시된 제네시스 G70의 경우 4곳의 디자인센터에서 각자의 차체 외부안을 내 일단 유럽안과 한국·미국 절충안이 후보로 선택됐다. 절충안은 차체 앞부분은 한국, 뒤는 미국 디자인을 택한 것. 결국 최종 경쟁에서는 유럽안이 승리해 새 차의 기본 모습이 됐다. 하지만 내부 인테리어는 유럽안과 맞붙은 한국안이 채택됐다. 이후 여러 디자이너가 해당 지역의 취향을 반영해 달라고 요구해 적잖은 변화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야말로 신 세계화 시대의 일하는 방식이다.

90년대 김영삼 정부 때 본격적으로 불었던 옛 '국제화' 바람은  완전 딴판이었다. 국내에 뿌리를 둔 정부·기업 등이 외국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새로운 지식과 기술 등을 얻어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세계화 2.0은 차원이 다르다. 기획·생산·판매 등 각각의 단계에서 지구상의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현기차만 하더라도 디자인 부문의 총책임자(CDO)는 폭스바겐·아우디에서 일했던 독일 출신의 피터 슈라이어 사장이다. 현대차보다 한 수 밑으로 평가받던 기아차 디자인을 한 단계 끌어올려 유명해진 인물이다. 센터장도 폭스바겐 그룹에서 아우디·벤틀리·람보르기니 디자인 총괄을 맡았던 루크 동커볼케 전무로 벨기에인이다. 이밖에 남양연구소 디자인센터의 팀장 9명 중 2명이 외국인이며 2명의 한국인은 외국회사 출신이다. 직원 500여명 중에서 외국인은 150여명이며 나머지도 해외에서 일했거나 유학 경험이 있는 경우가 많다. 점점 더 현대차그룹을 순수한 국내기업이라고 부르기 어렵게 되는 셈이다.

지영조 현대차그룹 전략기술본부 부사장이 지난달 31일 이스라엘에서 현지 스타트업 업체와의 협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지영조 현대차그룹 전략기술본부 부사장이 지난달 31일 이스라엘에서 현지 스타트업 업체와의 협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디자인 분야뿐 아니다. 이 회사는 지구촌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샘솟는 곳, 그중에서도 '스타트업의 메카'인 이스라엘에서 각 분야의 혁신적 기술을 캐내려 한다. 이스라엘은 서울보다 적은 850여만 명 인구에도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스타트업 업체가 숱하다. 특히 인공지능·센서융합·사이버보안 분야에서는 전 세계의 기술개발을 주도한다.

여기서 나오는 첨단기술을 미래 차에 접목하기 위해 현대차그룹은 이스라엘 유망 스타트업 업체에 직접 투자도 하고 벤처캐피탈 등을 통한 간접투자로 할 예정이다. 이 같은 지적 수혈을 지원하기 위한 '오픈 이노베이션 센터'도 내년 초 이스라엘에 세운다.

인공지능 분야 석학과 전문가 등 1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지난 9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삼성 글로벌 AI 포럼'.

인공지능 분야 석학과 전문가 등 1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지난 9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삼성 글로벌 AI 포럼'.

국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신 세계화 전략을 쓰고 있건 현대차그룹에 그치지 않는다. 삼성전자 역시 전 세계에 걸친 석학들의 아이디어를 사냥하고 있다. 지난달 말 미국 뉴욕에서 열린 '삼성 글로벌 AI 포럼'이 바로 단적인 사례다. 이날 포럼에는 주빈 가라마니(케임브리지대), 알렉산더 러시(하버드대), 로브 퍼거스(뉴욕대) 등 세계 14개 대학의 석학 20여명을 비롯한 전문가 100여명이 삼성 임원 30여명과 인공지능(AI)의 앞날을 이야기했다. 인공지능 분야 내 언어·영상·분석상의 기술적 한계와 극복 방안이 주제였다. 김창용 삼성전자 DMC 연구소장은 "세계적인 석학과 우리가 각각 생각하는 한계와 문제점을 다 털어놓고 이에 대한 각자의 아이디어를 논의해 보자는 게 이번 행사의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인공지능을 응용한 제품 개발을 위해 전 세계 전문가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이들의 두뇌를 빌리는 것이다.

이렇듯 국내의 대표적 대기업들은 제조는 물론이고 한국 내에서 아이디어를 얻는 단계도 넘어섰다. 국내 인력이 현지인의 취향을 조사해 제품에 반영하는 대신 아예 그 지역 전문 디자이너들에게 일을 맡기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이미 세계를 하나의 공동체로 여기며 사고하고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남정호 논설위원 namjh@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