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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불 구이 가다랑어에 편마늘 곁들여 …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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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7호 28면

맛집을 취재하다 보면 외식업의 고충에 대해 자주 듣게 된다. 셰프·직원 구인의 어려움, 건물주의 횡포, 노쇼 고객 등 한두 가지가 아니다. 최근 만난 9년차 외식인은 인생의 나락까지 떨어지는 경험을 했단다. 그가 SNS에 이순신 장군 동상 사진과 함께 올린 글은 모든 걸 압축해 보여주었다. #필사즉생 #필생즉사

이지민의 “오늘 한 잔 어때요?” #<39> 이자카야 ‘로만테이’

그는 25살에 연남동 ‘이노시시’, 28살에 신사동 ‘이치에’를 오픈했다. 둘 다 미식가들 사이에서 꽤 알려진 일식집이다. 빠른 성공으로 얻은 자신감 때문일까. 2015년 필리핀에서 외식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했다. 1년 6개월간 돈을 다 쏟아 부었고, 제대로 망했다. 한국에 돌아와선 3개월 동안 울며 지낼 정도로 슬럼프를 겪었다. 하지만 지인의 격려와 투자에 힘입어 지난 6월 압구정 로데오 거리에 세 번째 가게를 열었다. ‘로만테이’ 홍석진(34) 대표의 이야기다.

식재료 산지를 누구보다 많이 다녀봤다고 자부하는 그는 새로운 가게를 구상하며 일본 열도를 구성하는 4개의 주요 섬 중 가장 작은 시코쿠섬, 섬에서도 가장 남쪽에 위치한 고치(高知)현의 요리를 재조명했다. 임진왜란 당시 ‘토사’로 불리던 이곳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들이 두부와 비지를 소개하고 구황 식량인 도토리묵, 곤약의 제조기술을 전한 덕분에 왜인들로부터 대우를 받았다는 그곳이다.

두 나라의 식문화가 조화를 이뤘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던 걸까. 토사 지방의 요리를 접했을 때의 그 설렘을 잊을 수 없단다. 뼈아픈 실수를 딛고 다시 일식을 해야겠다는 두근거림을 원동력 삼았다. 직접 지은 옥호 로만테이(浪漫亭)는 ‘낭만이 깃든 곳’이라는 뜻. ‘일식에 대한 낭만’을 손님들에게 펼쳐보겠다는 꿈을 담았다.

짙은 갈색 톤의 내부는 넓지만 차분하다. 왼쪽으로 오픈 키친과 다찌 형태의 바(Bar)를 볼 수 있다. 레드 컬러로 포인트를 주었는데 고치현의 명물인 ‘가쓰오 타타키(가다랑어 짚불 구이)’를 모티브로 했다. 남쪽으로 태평양을 접한 고치현에서는 가다랑어가 많이 잡힌다. 성어가 1m 남짓인 작은 참치를 활용한 요리가 발달했다. 가쓰오 타타키는 이 지역 대표 요리로, 볏짚을 직접 태워 그 불에 가다랑어회를 통째로 익힌 다음 썰어서 낸다.

15년차 일식 경력의 천관웅 셰프에게 요즘 맛보기 좋은 요리들을 추천받았다. 스타터는 스텔라마리스(Stella Maris) 석화. 프랑스 종을 수입해 양식한 것으로 사계절 먹을 수 있다. 손바닥 만한 크기의 굴로 쫄깃한 식감·감칠맛·풍부한 육즙 덕분에 고급 레스토랑에서 많이 쓰인다. 폰즈 소스에 간장과 가쓰오 부시를 활용, 젤리 형태로 소스를 만들어 실파와 핑크 페퍼를 올려 내거나, 타바스코와 레몬에 와사비를 곁들여 먹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굴의 신선함을 살려줄 와인으로 오스트리아산 리슬링 로이머 그뤼너 벨트리너를 골랐다. 현지의 고유 토착 품종으로 만든 와인으로 적당한 산도, 상큼한 꽃 향기, 복합미가 매력적이다. 소스와도 아주 잘 어우러진다.

간판 요리인 가쓰오 타타키는 짚불에 재빨리 구워 겉만 익히고 다시 훈연 과정을 거쳐 만든다. 살짝 볶아낸 천일염과 먹어도 되고, 함께 나오는 재료들을 쌈 싸듯 현지 식으로 먹어도 좋다. 가쓰오 내장 젓갈과 실파, 샬롯, 편마늘을 차례대로 올린 뒤 와사비를 곁들이면 된다. 포인트는 편마늘. 회에 편마늘을 곁들여 먹는 우리 식문화가 담긴 메뉴라 더욱 흥미롭다.

홍 대표는 고치현의 사케를 추천했다. 레이블에 호랑이가 그려진 아키토라 준마이다이긴죠. ‘식사를 더 빛나게 하는 술’이라는 컨셉트에 걸맞게 음식과의 조화가 뛰어나다. 부드러운 맛과 향, 적당한 바디감, 너무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음식의 맛을 살려준다.

마지막 메뉴는 마라금태. 일식을 중식·양식과 다양하게 접목해보고자 하는 셰프의 야심작이다. 매운맛을 내는 중국의 향신료인 화자오와 마자오, 텐멘장을 넣고 고기와 피망 등을 넣어 사천풍의 스파이시한 소스를 만들었다. 여기에 반건조한 금태를 숯불에 구워 올려낸다. 금태 위에는 튀긴 파채와 은행알을 올렸는데, 금태 위에 새가 둥지를 튼 듯한 재미있는 비주얼이다. 담백한 금태를 소스에 곁들여 먹으면 되는데, 담백함 뒤로 매콤함이 강렬하게 따라온다. “대표님, 이 강렬함에 어울리는 한방이 필요해요”라고 했더니 씩 웃으며 삼해소주를 가져온다. 아! 신의 한 수다.

삼해소주는 서울의 무형문화재로 오랜 역사를 지닌 명주다. 쌀의 농축미가 돋보이고, 입안 가득히 퍼지는 파워풀한 맛으로 주당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마라금태와 삼해소주의 만남은 그야말로 화룡점정. 기분 좋게 취기가 오르는데 금태를 먹고 남은 소스를 가져가 우동을 볶아 내온다. 이어서 청어 이소베 마끼, 문어 테린을 곁들인 고수 샐러드. 곰장어 짚불구이, 두툼한 연어와 연어알을 올려낸 솥밥 등을 맛보며 제대로 달렸다. 기분 좋게 가게를 나서며 덕담을 건냈다. “대표님,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각오가 제대로 먹힌 것 같아요. 화이팅입니다!”

이지민 : ‘대동여주도(酒)’와 ‘언니의 술 냉장고 가이드’ 콘텐트 제작자이자 F&B 전문 홍보회사인 PR5번가를 운영하며 우리 전통주를 알리고 있다. 술과 음식, 사람을 좋아하는 음주문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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