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관망명정부의 사교단체서 친일 정치단체로 … 왕권 탈취 노리다 자멸

중앙선데이

입력 2017.11.12 01:09

업데이트 2017.11.12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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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7호 14면

[대한제국 120주년] 다시 쓰는 근대사 <11>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변란
독립협회는 독립문 건립 모금운동 등 창립 취지에 맞는 활동을 초기에 펼치다 점차 변질돼 갔다. 만민공동회를 통해 반러시아·아세아주의(동양평화론) 같은 친일 이데올로기를 전파했다. 사진은 독립협회 초기 독립관에서 열린 강연에 사람들이 모여든 모습으로 추정된다. [중앙포토]

독립협회는 독립문 건립 모금운동 등 창립 취지에 맞는 활동을 초기에 펼치다 점차 변질돼 갔다. 만민공동회를 통해 반러시아·아세아주의(동양평화론) 같은 친일 이데올로기를 전파했다. 사진은 독립협회 초기 독립관에서 열린 강연에 사람들이 모여든 모습으로 추정된다. [중앙포토]

대한제국 창건 직후 고종은 독립신문·독립협회의 방해 공작에 먼저 맞서야 했다. ‘독립신문의 변절’에 대해선 지난주 기사(중앙SUNDAY 11월 5일자 10~11면)에서 살펴보았다. 고종이 창간한 독립신문의 변절은 고통의 시작일 뿐이었다. 아관망명으로 한반도에서 일제의 세력이 일시 퇴조한 시기에 창립된 독립협회에 친일 개화파들이 잠입해 다시 힘을 키워 주도권을 장악해 나갔다. 이들의 준동은 대한제국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무장폭동과 변란으로 치달았다. 독립협회가 해산된 이후에야 비로소 고종은 대한제국 창건의 본래 목적인 항일 독립전쟁과 근대화 추진을 본격적으로 펼쳐 나갈 수 있었다.

친일·반러시아 운동으로 일관
고종의 외교 노선에 혼란 초래
친일 거두 박영효 재집권이 목표

매일·황성·제국신문에 이어
독립신문까지 만민공동회 비판

‘근왕파 탄압으로 민권운동 좌절’
우리 역사책들 앞뒤 바뀐 서술

독립협회를 서재필이 창립한 것처럼 서술해 놓은 역사책이 많은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독립신문을 서재필이 창간한 것이 아니었듯이 독립협회도 그렇다. 이 같은 기초적인 사실 관계조차 완전히 거꾸로 기록돼 있는 것이 우리 역사책의 실상임을 깊이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고종, 독립문 모금 등 ‘독립 이벤트’ 펼쳐

독립협회는 독립신문 창간, 독립문 건립과 맥을 같이하며 창립됐다. 1896년 2월 11일 아관망명이 성공한 직후 4월 7일 독립신문이 창간되었고, 6월 18일께 독립문 건립을 결정했으며, 바로 그 독립문 건립을 위한 추진위원회로 7월 2일 만들어진 것이 독립협회였다. 독립협회가 가장 먼저 한 일이 독립문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이었다. 독립협회 초창기에는 아관망명정부의 고위 관료들이 대거 참여해 일종의 고위직 사교클럽 성격을 띠었다. 창립식이 열린 공간도 아직 친일파로 전락하지 않은 외부대신 이완용의 외부 건물이었다.

독립의 상징을 만들어 가는 일련의 작업은 모두 아관망명정부의 ‘독립 정책’으로 추진됐던 것이다. 고종은 독립문 건립 모금 운동을 비롯한 일련의 ‘독립 이벤트’를 통해 국민들의 항일 독립 의지를 고취하면서 대한제국 창건을 준비해 나갔다. 그 출발점이 아관망명이었던 것이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국사 교과서와 대부분의 한국사 책들은 아관망명을 일제가 붙여준 명칭인 ‘아관파천’이라고 부르면서 매우 부끄러운 행위인 양 비하하고 있다.

독립협회도 역시 독립신문처럼 대한제국 탄생(1897.10.12)을 전후해 변질되기 시작했다. 사교단체에서 친일 정치단체로 바뀌어 갔다. 일본으로 도망간 친일파 박영효·안경수가 독립협회에 끄나풀들을 잠입시켜 반정부 운동을 부추겼다. 대한제국의 항일·친러 노선을 흔들어 왕권을 무력화시키고 박영효 일당이 정권을 재장악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단골 주장은 외세배척이었는데 그 외세는 주로 러시아를 겨냥한 것이었고 일본에 대해서는 시종 우호적이었다. (한영우, 『미래를 여는 우리 근현대사』 76~77쪽)

독립협회는 1897년 9월부터 러시아가 한국을 삼키려 한다는 ‘공아론(恐俄論)’을 퍼트렸다. 고종이 러시아 정부에 군사·경제 동맹을 요청했으나 러시아는 만주와 한반도를 저울질하면서 미온적 태도를 보이던 상황이었다. 러시아의 군사교관 증파와 재정고문 파견, 한러은행 설립, 절영도 러시아 저탄장 건설 등이 당시 러시아와 관련된 현안이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반러 운동을 전개하면서 이 모든 사안을 무산시켰다. 고종은 러시아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으려는 절박한 심정으로 러시아와의 동맹 외교를 성사시키려고 하는데 독립협회는 그런 고종의 외교 노선과 정반대의 주장을 펼치며 혼선을 빚게 했다.

독립협회 창립 임원진을 보면 고문에 서재필, 회장에 안경수, 위원장에 이완용이 포진해 있다. 이완용은 아직 친일파로 전락하기 이전의 ‘친미 정동파’로 분류됐다. 안경수는 일본공사관에서 ‘일본당’으로 규정하고 있을 정도로 일제와 긴밀하게 내통하던 인물이었다. 고종은 그의 실체를 모르고 있었다. 안경수의 정체는 독립협회 회장 재임 중이던 1898년 7월 ‘황제양위 음모 사건’으로 드러난다. 군주 전제정 체제를 구축하려는 고종을 물러나게 하기 위해 ‘양위 쿠데타’를 도모하다 발각돼 일본으로 도망갔다. 이후 안경수는 일본에 체류하는 박영효 휘하에서 윤효정·이규완·황철 등 수하들을 국내에 들여보내고 만민공동회에 자금을 송금해 만민공동회를 장악해 나갔다.(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50~74쪽)

1898년 2월 28일부터 슈페예르 러시아 공사는 본국에 한국의 반러 분위기가 심각한 수준임을 알리고 있다. “반러시아 분위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벌써 독립협회 활동 때문에 피신해 온 자가 있으며 고종황제도 피신해 올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무라비요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1898년 3월 3일 슈페예르에게 다음과 같은 훈령을 내렸다. “최근의 여러 보고서로 보아 대한제국의 정세가 매우 불안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니콜라이 2세는 고종황제 자신과 대한제국이 향후 러시아의 지원을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인정하는지 문의하라고 하셨다. 대한제국의 요청으로 파견된 군사교관단과 재정고문이 필요치 않다면 러시아는 마땅히 그들을 소환하겠다.”(박종효 편역, 『러시아 국립문서보관소 소장 한국관련 문서요약집』, 한국국제교류재단, 2002, 378쪽)

독립협회의 압력에 밀려 정부는 3월 19일 러시아 고문과 교관을 해고했다. 독립협회의 선동으로 여론도 반러로 쏠렸고, 그런 분위기에서 고종마저 상황판단에 혼선을 보이며 일시적으로 러시아의 손을 놓았던 것이다. 일본인 사학자 와다 하루키는 당시 상황을 누가 즐기고 있었는지 알려주고 있다. “(대한제국과) 러시아와의 특별한 관계는 이로써 단절되었다. 일본 공사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와다 하루키, 『러일전쟁과 대한제국』 44쪽)

독립협회, 아세아주의 이데올로기 확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주역들. 서재필(가운데)과 윤치호(왼쪽)는 독립협회를 이끌며 친일·반러시아 논조를 확산시켰다. 이승만(오른쪽·한성감옥 수감 시절)은 배재학당에서 만난 서재필의 영향을 받아 아세아주의에 경도됐으며 만민공동회 연사로 나서 반러시아 주장을 펼쳤다. 훗날 이승만은 회고록에서 간접적으로 당시의 과오를 인정했다. [중앙포토]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주역들. 서재필(가운데)과 윤치호(왼쪽)는 독립협회를 이끌며 친일·반러시아 논조를 확산시켰다. 이승만(오른쪽·한성감옥 수감 시절)은 배재학당에서 만난 서재필의 영향을 받아 아세아주의에 경도됐으며 만민공동회 연사로 나서 반러시아 주장을 펼쳤다. 훗날 이승만은 회고록에서 간접적으로 당시의 과오를 인정했다. [중앙포토]

독립협회·만민공동회가 반러 운동과 함께 확산시킨 이데올로기가 소위 ‘아세아주의(동양주의)’였다. 아세아주의는 한국과 일제의 대립관계를 동양과 서양의 대립으로 바꿔치기 했다. 서재필에 이어 윤치호가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이끌며 이 논리의 확장에 앞장섰다. 황인종 대 백인종의 인종주의적 대결구도 속에서 한·중·일 아세아제국이 일본을 맹주로 단결해 서양과 싸워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서양과 동양 간에 당장 무슨 심각한 적대적 대결이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조작해낸 생뚱맞은 이데올로기였지만 독립협회의 선동에 넘어가는 지식인이 적지 않았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는 이승만도 그중 한 명이었다. 청년 시절 배제학당에서 서재필의 영향을 받아 아시아주의에 경도되었고 만민공동회에서 극렬한 반러·친일 연사로 나서기도 했다.(황태연,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863~869쪽)

훗날 이승만은 당시 일본에서 들어온 박영효계 인사들이 “돈을 물 쓰듯 쓰며” 휘젓고 다녔어도 자신은 “당시에 너무 어리고 천진난만해서 그들의 돈이 어디서 나왔는가 하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후에 그들이 (…) 한국 지도자들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려고 애썼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회고하면서 자신을 비롯한 배제학당 출신 친미세력이 박영효계 친일파와 손잡은 것을 “불행한 연결”로 묘사했다.(이승만, ‘청년 이승만 자서전’, 260~261쪽) 이승만이 간접적으로나마 자신과 만민공동회의 과오를 인정했다고 볼 수 있다. 반성이 없는 여타 친일 개화파와 이승만이 구분되는 대목이다.

반러 운동으로 시작된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의 변절은 왕권을 전복하려는 변란으로 치달았다. 독립협회는 1898년 7월 3일 올린 ‘시폐(時弊) 상소’에서 상·하원 설치를 요구하면서 시폐의 근원을 바로잡는 방법으로 ‘법령은 홍범을 따를 것’을 주장한다. 소위 갑오개혁 때 친일파 박영효가 주도해 만든 ‘홍범 14조’를 다시 지키라고 나선 것이다. 석달 후인 10월 7일에도 독립협회는 홍범 14조를 다시 들먹인다. 소위 홍범 14조는 일본군의 경복궁 침략(갑오왜란) 이후 고종이 포로로 유폐된 상태에서 일제가 친일 개화파 정부를 앞세워 추진한 것으로, 그 핵심은 고종의 왕권을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친일세력은 아관망명을 거치며 기사회생한 왕권을 다시 무력화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대한제국 창건 직후 1898년은 독립협회·만민공동회와의 대결로 점철됐다. 독립신문은 논설로, 독립협회는 집회를 통해 왕권을 압박했다. 친일파가 주도권을 쥔 독립협회의 활동은 명백히 ‘친일매국운동’이었으며, 설사 오늘날과 같은 상황이라고 해도 순수한 ‘시민운동’으로 봐주기 힘들 정도였다. 하물며 당시는 국망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왕권이 항일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상황이었다.

만민공동회 폭력화, 서울 무정부 상태로

독립협회에 맞설 조직으로 고종과 근왕세력은 7월 7일 황국협회를 출범시켰다. 그동안 우리 근대사 책들은 정교·윤치호·남궁억 등 독립협회 세력의 글을 통해 황국협회를 기술해 왔다. 매우 불공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폭력화하며 서울을 무정부 상태로 만들어 간 사실에는 눈을 감고 있다.

독립협회는 황제의 인사권과 의정부의 권한을 중추원으로 이동시키는 음모를 진행하고 있었다. 고종은 ‘헌의 6조’(1898.10.29)에 그런 음모가 내포된 것인 줄 모른 채 이를 수용하는 실수를 범했다. 중추원 의관의 절반을 독립협회가 장악할 경우 국가 권력이 독립협회에 통째로 이전될 수 있는 위기상황이었다. 이에 조병식 등 근왕세력은 이런 음모를 간파하고 고종에게 보고했다. 1898년 11월 4일 밤 고종이 독립협회 지도부 체포 명령을 내리고 헌의 6조를 무효화함으로써 일단 한숨은 돌렸으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독립협회·만민공동회는 더욱 폭력적으로 변해 갔다. 근왕세력 인사들의 집을 공격하고 황국협회의 지지기반인 보부상의 사무실을 파괴했다. 12월 6일에는 서울 변두리 지역의 빈민 1200명을 고용해 목봉을 휴대하게 하는 등 무장경비까지 시키면서 정국을 무정부 상태로 휘몰아 갔다.

이때부터 남궁억·이상재 등 독립협회 내 온건파들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발길을 끊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친일파의 거두 박영효는 계속 만민공동회를 통해 자신의 정계복귀를 요구하도록 추동했고, 결국 중추원에서 박영효와 서재필을 포함시킨 대신(大臣) 임명 요청안을 가결시키게 했다. 이것이 알려지면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목적이 백일하에 드러났고 이것은 결국 독립협회가 민심으로부터 고립당해 자멸하는 변곡점이 됐다.

고종은 영국·독일·러시아·미국공사는 물론 일본공사까지 불러 만민공동회의 폭란을 진압하는 것에 대한 의향을 타진했고 긍정적인 대답을 얻었다. 일본공사도 자신들이 ‘폭란의 배후’로 지목당할 것을 우려해 진압에 찬성했다. 일본에 우호적이었던 뮈텔 프랑스 주교조차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서재필과 박영효를 정부에 등용하라는 제언이 시위대들의 평판을 나빠지게 하고 군중을 이탈하게 만든 데다 결국 정부를 격분시키고 정직한 백성을 각성시켰다.”(『뮈텔 주교 일기(2)』 1898.12.27)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적대적으로 변한 민심의 분노는 당시 여러 신문의 논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국인이 발간한 최초의 일간지 ‘매일신문’이 2월 23일 가장 먼저 만민공동회의 비행을 비판했다. 남궁억 등 독립협회 내 온건파가 관여하는 ‘황성신문’도 12월 26일 논설에서 만민공동회의 해산을 권고했다. 그리고 이승만이 한때 주필로 활동했던 ‘제국신문’도 중추원의 ‘박영효 추천’과 관련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잘못을 비판하고 나섰다.(제국신문 1898.12.28.)

민심 이반과 언론의 비판 속에 고립된 친일 과격파의 말로는 테러 행각이었다. 만민공동회 회장 고영근과 임병길·최정덕 등이 중심이 돼 근왕세력에 대한 폭탄·방화 테러를 자행했다. 고영근과 최정덕 등은 결국 1899년 6월 13일 일본으로 달아났다.

이렇게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자멸의 길을 걸어갔음에도 우리 역사책들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개혁파로 설정해 놓고 ‘수구파’ 고종과 근왕세력의 탄압으로 민권·개혁운동이 실패해 아쉽다는 식으로 묘사해 놓았다. 심지어 독립협회·만민공동회를 애국계몽운동의 선구이자 독립운동의 진원지로까지 왜곡해 놓은 것은 도대체 어떻게 봐야 하는가.

이런 오류는 박은식(1859~1925) 같은 애국지사의 저서에서도 발견된다. 그는 독립협회 창립에 대한 고종의 지원이나 독립협회의 친일 변질, 박영효의 배후조종 등에 대해 전혀 몰랐다. 박은식은 심지어 “일본이 우리 정부와 동의해 법을 설정하고 독립협회를 방해했다”는 식으로 완전히 잘못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서 당시 고종과 근왕세력들을 ‘보수파’로 몰아 비판하고 “오직 독립당만이 신사조직에서 유래해 정신이 족히 숭상할 만한 것을 최상으로 가지고 있다”고 격찬한다. 독립협회 세력에 대해서는 전술적 ‘성급함’만을 지적하고 있다.(박은식, 『한국통사』 제3편.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50~53쪽) 당시 매일신문·황성신문·제국신문에서, 그리고 심지어 독립신문까지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거듭된 과오를 지적하고 있는데 박은식은 마치 그 시대에 살던 사람이 아닌 것처럼 잘못된 기술을 하고 있다.(황태연,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922~923쪽)

오류는 오늘날까지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박은식 선생’이 그렇게 기록했으니까 다 맞다는 식으로 무분별하게 인용되고 있는 것이다. 독립신문과 독립협회의 친일 변절을 통한 자멸에 대해서는 김용섭·주진오 등을 필두로 한 여러 연구를 통해 충분히 입증되었음에도 좀처럼 잘 고쳐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자문 전문가와 기관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황태연 동국대 교수,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 덕수궁 대한제국역사관, 국립고궁박물관 대한제국관

참고자료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황태연·청계·2017), 『19세기 후반 개화개혁론의 구조와 전개』(주진오·연세대 박사학위 논문·1995), 『고종시대의 재조명』(이태진·태학사·2000), 『미래를 여는 우리 근현대사』(한영우·경세원·2016), 김용섭 ‘서평:신용하, 『독립협회 연구』’(『한국사연구』12·1976), 『러일전쟁과 대한제국』(와다 하루키·제이앤씨·2011), 『한국독립운동지혈사』(박은식·소명출판·2008), 이승만 ‘청년 이승만 자서전’(이정식·『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청년시절』·동아일보사·2002)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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