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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마약중독자였던 그가 평화전도사 된 이유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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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후손을 위해서도 용서와 평화의 문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르완대 용서캠페인의 창시자인 가수 장 폴 삼푸투가 용서캠페인을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우리 후손을 위해서도 용서와 평화의 문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르완다 용서캠페인의 창시자인 가수 장 폴 삼푸투가 용서캠페인을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We are beautiful(우리는 아름답다). See us beautiful(아름다운 우리를 봐라). We are ONE(우리는 하나다).” 10일 오후 충북 청주시 옛 연초제조창에 르완다 출신 가수 장 폴 삼푸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가 작사, 작곡한 노래 ‘위 아 뷰티풀’은 ‘세상 사람이 모두 함께 평화롭게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2017세계문화대회] #내가 세상을 바꾸는 방법① #르완다 용서 캠페인 창시자 장 폴 삼푸투 #1994년 대학살 때 가족 잃은 뒤 #10년 가까이 술·마약에만 의존 #‘그를 용서하라’는 음성 들은 후 #‘용서하자’고 마음먹자 평화 찾아와 #세계 50개국 다니며 노래·강연 통해 #용서와 평화의 중요성 널리 알려 #“미움 갖고는 절대 행복할 수 없어 #우리 후손 위해서도 용서 문화 필요”

글로벌 문화운동 단체 월드컬처오픈(WCO)과 청주시가 공동 주최하는 ‘2017 세계문화대회(Better Together 2017)’의 개막식 축하공연에서다. 지구촌 곳곳에서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활동해온 컬처디자이너들이 ‘공감과 평화의 문화를 디자인하다’를 주제로 전시, 토크콘서트 등 100여 개 프로그램을 펼치는 행사다.

 10일 오후 청주시 옛 연초제조창에서 열린 ‘2017 세계문화대회’ 개막식에서 르완다 평화 운동가 장 폴 삼푸투가 기타를 치며 축하 공연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10일 오후 청주시 옛 연초제조창에서 열린 ‘2017 세계문화대회’ 개막식에서 르완다 평화 운동가 장 폴 삼푸투가 기타를 치며 축하 공연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삼푸투도 이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처음 한국을 찾았다. 그는 2003년 아프리카의 그래미상이라고 불리는 ‘코라상’을 받았고, 2006년 미국에서 열린 ‘국제 작곡·작사가 경연대회’에서 수상할 정도로 세계에서 인정받는 가수다. 무대 위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보통 가수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가 유명한 이유는 따로 있다. 1994년 르완다 대학살의 아픔을 예술로 치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를 다니며 ‘용서 캠페인’을 벌이는 평화운동가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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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 대학살 당시 그의 나이는 32살이었다. 100일 동안 100만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는 참혹한 사건이었다. 르완다에 거주하는 후투족과 투치족 간의 갈등이 극에 치달아 발생한 비극이었다.

“어느 날 집에 오니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 3명이 죽어 있었어요. 더 충격적인 건 가족의 목숨을 빼앗아간 사람이 이웃에 살면서 누구보다 가깝게 지냈던 가장 친한 친구라는 겁니다.” 종족 간의 갈등이 친구와의 우정마저 버리게 만든 것이다.

그 충격으로 삼푸투는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됐다. 14살부터 프로 가수로 활동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노래 대신 술과 마약에 빠져 하루하루를 보냈다. “당시에는 제 정신으로 있을 수가 없었어요. 매일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지냈죠.”

마음의 평화는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다. 대학살 이후 10년 가까이 술과 마약에 취해 생활한 탓에 몸이 버티질 못하게 돼 병원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삼푸투의 건강을 염려한 친구들이 그를 위한 기도를 시작했다. “그때 어디선가 음성이 들려왔어요. ‘그를 용서해야 한다’는 목소리였죠. 하지만 가족을 죽인 친구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어요. 저는 그 음성이 주는 메시지를 무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2~3개월이 지나도 그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강해졌다. “그때 이게 하나님의 계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그를 용서해 보기로 마음먹었죠.”

그를 억누르고 있던 모든 분노와 미움이 사라지자 마음이 한없이 평화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전까지는 죽지 못해 사는 삶이었지만, 마음을 고쳐먹자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던 중 르완다에서 대학살에 대한 재판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미국에서 지내고 있던 그는 르완다를 찾아가 친구를 위해 법정에 섰다. 대학살 이후 1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후투족에 대한 투치족의 분노는 조금도 가라앉질 않았었다.

그때 삼푸투는 법정에서 “친구를 용서하겠다”고 말했다. 후투족의 학살에 대해 공식적으로 용서하겠다고 말한 투치족은 삼푸투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우리는 아릅습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장 폴 삼푸투의 노래 '위 아 뷰티풀'을 부르고 있다. 그는 모두가 용서하고 화해하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꾼다. 임현동 기자

"우리는 아릅습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장 폴 삼푸투의 노래 '위 아 뷰티풀'을 부르고 있다. 그는 모두가 용서하고 화해하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꾼다. 임현동 기자

당시 투치족 사람들은 삼푸투의 발언에 동의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이 일을 계기로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됐다. 각국의 다양한 방송사에서 인터뷰도 하고, 국제 컨퍼런스에도 참여했다. 가족을 죽인 친구와 함께 컨퍼런스에 나가 ‘용서와 화해’를 주제로 강의도 했다.

삼푸투는 자신이 얻게 된 마음의 평화를 다른 사람도 느낄 수 있게 도와야겠다고 결심했다. 지금까지 일본·미국·호주·노르웨이 등 50개국을 넘게 다니며 ‘용서캠페인’을 진행하는 이유다.

“자신의 마음속에 미움이 있으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과거의 상처에만 집중하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죠. 우리의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미래를 물려주기 위해 용서와 평화의 문화를 만드는 데 앞장서겠습니다.”

전민희 기자 jeon.minhee@joongang.co.kr

☞컬처디자이너=자신의 열정과 재능을 창의적으로 펼쳐 더불어 행복한 사회, 따뜻하고 희망적인 미래를 만들어가는 활동가를 말한다. 창의적 시민이자, 우리사회 작은 영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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