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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광장 사용설명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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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문화데스크

양성희 문화데스크

우리에겐 여러 개의 ‘광장’이 있다. 군사독재를 몰아내고 제도적 민주주의를 완성한 1987년 서울시청 앞 광장이 있다. 레드 콤플렉스를 벗어던진 ‘붉은악마’들이 정치 구호 대신 “대~한민국”을 외치던 2002년 서울 월드컵 축구의 광장이 있다. 그리고 꼬박 1년 전 시민의 숭고한 참여가 일군 촛불의 광장이 있다.

날마다 행사 공해 시달리는 서울시청 앞 광장 #종종 빈 채로 시민의 도심 숨통 될 광장 그리워

시선을 넓히면 지식인 분단 문학의 한 성취라 할 최인훈의 소설 ‘광장’도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 문화의 출발을 알린 다음의 공론장 ‘아고라’도 광장이라는 뜻이다. 한국 사회가 닫힌 사회에서 열린 사회로, 권위와 억압에서 수평과 개방의 사회로 나아갈 때마다 ‘광장’이 드라마틱한 역할을 한 것이다. 어쩌면 한국 사회의 진화란 닫힌 광장을 하나씩 열어젖히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난 주말, 그렇게 열린 서울광장을 지나다가 흠칫 놀랐다. 짙은 밤색과 붉은색 비닐 질감의 초대형 구조물 두 개가 광장에 벽처럼 치솟은 탓이다. 너무도 생경하고 우악스러운 모습이라, 일순 “헉” 탄성을 내뱉었다.

지나치며 보니 ‘서울 김장문화 축제’의 현장이었다. 밤색의 에어돔은 지름 30m, 높이 9m의 장독대 형상. 그 안에서 각종 행사가 치러지는 ‘서울 김장간’이라고 했다. 붉은 구조물도 김장간인데, 아마도 김치의 붉은색이 모티프인 듯했다. 그 옆 야외에서 수백, 수천의 시민이 함께 김치를 담갔다.

서울김장축제는 사라져 가는 김장 문화와 공동체 문화를 되살린다는 취지다. 지난 3~5일 5000여 명의 내·외국인이 담근 김치는 불우이웃에게 전달됐다. 행사의 취지야 십분 공감하지만, 그 행사장의 괴이한 미감(美感)은 한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나만 그런 건 아니었는지 인터넷에는 “거대한 대변인 줄 알았다” “흉물스럽다”는 비판이 꽤 눈에 띄었다. 보도에 따르면 김장간과 부속물 설치에 1억7000만원이 들었다.

며칠 지나 찾은 서울광장. 이번에는 ‘2017 충주사과 서울 나들이 직거래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몽골 텐트 모양의 부스 25개가 광장을 빙 둘러싸고 반짝 세일 행사, 천원 사과 이벤트 등이 이어졌다. 사과즙·사과빵·사과 담금주와 사과 먹인 한우 시식코너도 마련됐다. 중앙의 진행요원이 갑자기 확성기를 들더니 목청 높여 할인 이벤트를 벌였다. 아파트 단지나 각종 직거래 장터, 심지어 고속도로 휴게소나 동네 마트에서 익숙히 보던 행사였다.

내친김에 자료를 뒤적여 보니 서울광장·광화문광장은 거의 하루도 쉴 새 없이 행사가 이어진다. 내용도 천차만별이어서 정치집회, 정부나 관 행사, 시민운동이나 문화페스티벌에서 장터까지 다양하다. 서울광장에서는 10월 한 달간 16가지 행사가 이어졌다. 이 역시 쏟아지는 행사 신청 중에서 엄선했을 터, 시민이 함께 모이는 광장의 체험과 공간을 우리가 얼마나 원하는지 방증하는 셈이다.

문제는 그런 시민의 요구를 최대한 수용하면서도 시청 앞, 광화문광장이 가진 역사성을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소한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한복판에 걸맞은, 품격과 미학이 있는 공간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끔은 비어 있는 광장도 만나고 싶다. 한국 광장의 특징은 잠시도 비어 있을 때가 없고 정치 구호든, 풍악이든, 상인의 호객 소리든 뭔가가 가득 차 넘치는 공간이다. 특히 싸구려 먹거리나 기념품 매대가 빠지지 않고 단골처럼 등장한다. 때로는 ‘광장=집단 이벤트 행사장’처럼 보일 때도 있다. 광장에 대한 이런 공간 미학은 조금의 여백도 그대로 놔두지 못하고, 멈춤보단 속도전에 능한 한국식 삶의 태도와 연관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가끔은 비어 있는 광장 그 자체로 오롯이 존재하는 광장, 그저 시민이 여유롭게 오갈 뿐인 광장, 깔끔하게 조성돼 도심의 숨통 같은 광장이 그립다. 그게 내가 꿈꾸는 광장 활용법이다.

양성희 문화데스크